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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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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I May 22. 2020

과일을 먹는다는 것

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는_

9년 전, 부모님의 어깨를 짓누르던 아파트 대출금을 한 번에 해결하고 나서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깨끗하고 좋았지만, 부모님은 매 달 돌아오는 은행 빚을 갚기 위해 여유 있는 생활을 포기해야만 했다.


새 아파트에 처음 이사 왔을 때가 고3.

난 그 집에 늘 혼자였다. 집은 넓고 쾌적했지만 온기가 없었다.

어쩐지 집만 멀쩡하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정상이 아닌 듯 보였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집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일만 했고,

나는 밖에서 친구들과 있는 날이 더 많았다.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는 할 일이 없었다.

장을 봐오는 사람도 없었고, 장을 봐오는 즉시 먹고 끝내기 때문에 보관할 음식도 많지 않았다.

매달 허덕이다 보니 과일은 만날 일이 없었다.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만 

마트에 장을 보러 갔는데,

계란, 라면, 두부 등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식료품들만 구입했다.

그때부터였을까

과일을 살 때마다 속이 쓰려온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딸기였는데,

싱싱한 데다 크고 탐스러운 딸기 한 박스가 들어오면 제일 행복해하셨다.

그렇게 어쩌다 한 번, 과일이 들어올 때면 

한동안은 사람사는 집 같았다.


'과일이 도대체 뭐라고...'


먹고 싶은 과일도 못 먹을 만큼 그렇게 지켜야 했던 건 집일까 자존심일까

집의 크기와 가족의 행복이 비례하지 않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좋은 곳으로 이사 가면 모두가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다 부질없었다. 비싸고 넓고 좋은 아파트, 하지만 그 안엔 사람이 없었다.

우린 아파트를 처분하고 주택으로 떠났다.

집을 고치는데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아파트 살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엄마의 작업실과 마당이 생겼다. 고양이 가족도 만났다.

우리 가족이 주택에 적응하는 데는 꼬박 2년이 걸렸다.

사람이 살만한 집으로 고치고 마당에 나무를 심고_

또한 허공이 아닌 땅바닥 위에 몸을 누이는 건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이젠 아무 걱정이 없다는 게 걱정이다.

언젠가 이 평온함이 깨지진 않을까 가끔 불안한 생각도 든다.

이대로 무탈하게 잘 지낼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참아낼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데 아빠는 내가 시집을 갔으면 좋겠나 보다.

뿌린 게 많으신 건지-

하지만 나는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사실 내 인생에 결혼은 없을 것 같은데, 아예 안 한다고 하긴 뭐해서 그냥 웃어넘겼다.

지금처럼 먹고 싶은 거 먹고, 딸기밭에 실컷 구르며 단내 나게 살고 싶다.

나는 요즘 레드향이 참 맛있는데 고 녀석 몸값이 만만치 않다.


따뜻한 주방에

늘 떨어지지 않게 과일을 채워놓는다는 것,

그리고 가족이 함께 마주 보며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그 행복 뒤엔 부모님의 뼈아픈 청춘이 있었다는 걸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지.

그리고 내가 그 주체가 된다는 건 더더욱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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