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부끄럽다. 내 생각을 나 혼자만 간직하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게 나는 참 부끄럽다.
어렸을 때 부터 나는 누군가 앞에 나서는 게 참 부끄럽고 어려웠다. 재롱잔치 때 하얀색 스타킹을 신고 백조의호수 음악에 맞게 발끝을 세우고 무대에서 움직이는 일.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나와 같은 또래들과 함께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는 일. 중학교 장기자랑에서 춤추는 일. 고등학교 수행평가 가창시험. 교회에서 교회음악에 맞춰 노래 부르는 일. 모두 하나같이 그냥 해내기에는 어렵고 얼굴 빨개지는 일이지만 내가 해온 부끄러운 일들이다. 나를 보여주는 일.
공교롭게도 내가 참 좋아하는 일은 노래부르고, 음악을 즐기고, 사진을 찍고, 가사나 글을 쓰는 것인데 이것들 다 나 혼자만 간직하면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지만, 그렇다고 막상 누군가에게 내가 해온 생각들, 내가 느꼈던 것들에 대한 표현을 보여주는 건 지금 생각만 해도 얼굴이 뜨끈뜨끈 해지는 일이다. 이럴 때면 나라는 사람이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 때로는 나 스스로에게 '그럼 어쩌라는 거야!' 하고 속으로 버럭할 때도 있다.
십대 때 사람에게 크게 데이고 나니 그 이후로 크게 위축되고, 쥐 죽은 듯이, 투명인간처럼 지내는 게 가장 좋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그 당시에 분명 부족했던 나였으리라. 다들 그렇게 말하지 않나. 십대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흔들리는 갈대에 비바람이 몰아쳤으니 꺾일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지금에서야 그 때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세상 이치의 일부라도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누군가가 참 많이 미웠고, 그래서 차라리 내가 아무의 눈에 띄지 않는게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술래가 찾지 못할만한 곳에 꼭꼭 숨어있었다.
다행히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오랫동안 혼자이지 않고. 금방 회복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사람에 대한 무서움이 조금은 남아있다. 이제는 멀어진 과거라 정확한 원인이나 이유가 뭔지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그런 약함을 넘어서고 싶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내 기준에서) 긴 글을 쓰게 된 것도 내 무의식이 나의 취약을 알고 타자기를 두드리게 만든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나의 표현의 욕구가 내 안에만 있기 답답했던 걸까? ㅎㅎ
세상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처럼 많은 아픔이나 장애물을 넘기고 살아가는 멋진 사람들이 많다. 어렸을 때는 그런 사람들이 뭔가 거나한 성격을 가진 소유자라서 가능한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넘기로 맘먹는 일이 그렇지 않은 마음과 한 끗차이구나 싶다. 지구상 사람이라는 게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인 판타지같은 인종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냥 마음 먹기 나름이요, 결심이자 용기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 한 끗 같은 용기가 다른 삶의 태도를 빚어내는 게 아닐까. 나 또한 그런 결심과 스스로에게 지겨운 마음이 들어 갑자기 자신도 없던 글쓰기를 시작한 거니까 말이다.
나와 같은 비슷한 나이대에 사람들이 이제 사회의 초년생을 벗어나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능숙한 사회인으로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원하든 원치 않든 어딘가의 속해 제 몫을 하고 있을 거라 감히 예상해본다. 또는 팍팍한 삶 속에서 지금도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방황하고 있으니까. 전자의 속한 사람이건, 후자에 속한 사람이건 개인의 상황 속에서 분명 고민과 조급함, 초조함이 섞여 각자의 '지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열망들도 있지 않을까? 또는 아픔과 약함에 갇혀서 우울해하고 있는 누군가도 있을 수 있겠다.
너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방문을 닫아놓지 않았으면 좋겠고, 문턱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문을 열고 나와 밖으로 나가 바람도 맞고, 바깥냄새도 맡아본다면 생각보다 무섭지 않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고민한 문턱에서 드디어 한발자국 뗀다면 내가 왜 이걸 망설였었나 싶을지도 모른다. 여러분에게 보이는 세상의 모습이 기괴해보여서 선뜻 다가가기 무서울지라도, 그들의 기괴함과는 상관없이 만화 속 주인공처럼 다 넘어버렸으면 좋겠다. 나 또한 내 스스로가 그랬으면 좋겠고, 나를 포함한 열심히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누군가에게도 그런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비온 뒤 땅이 더 단단히 굳듯이, 부서진 뼈가 더 단단히 붙듯이, 살아가다 한번 쯤 깨질지라도 괜찮다. 당시는 아플지언정 더 단단히 되어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처음에 상사에게 깨지면 덜덜 떨릴 수 있겠지만, 나중엔 퇴근시간만큼 중요한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