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

가을의 아픔

by 령욱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긴 계절의 끝이 아님을, 나는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깨닫지 못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그렇게 움켜잡고 있었던 걸까.


침묵은 때때로 가장 무거운 고백이 될 수 있다. 마음속의 응어리들을 묶어 두고 어딘가에 펼쳐 보이지 않으며 속만 뒤엉켜도 그 이상의 가치는 없을 것이다.

마치 나무와 같다. 우연히 피어난 마음속 꽃에 시들 이유를 주고, 노력으로 다시 푸른 잎을 돋아낸다 해도, 얼마 가지 않아 색이 바래며 잎이 떨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내뱉듯이.


1964년 9월 9일, 한창 붉은 잎을 띄우려 하던 앞마당의 이름도 모르는 커다란 나무 앞에서 나를 세워 놓고, 붉은 나무를 준 나라를 도와주러 가게 되었다며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겠단 말과 함께 스무 밤 후를 약속했다.

어려서 그랬을까, 돌아올 때 사온다던 초콜렛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그리도 빨리 보냈다. 조금만 더 짜증도내보고 응석도 부려보며 몇일은 더 아버지를 괴롭혀야 했는데, 그 해 가을 바람이 유달리 쓸쓸했음을 일찍이 알아차릴 정도의 나이였다면, 아버지를 그 자리에 가게 두었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 무렵의 나는, 기다림이라는 것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스무 밤이 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길이가 마음속에서 얼마나 다른 무게로 쌓여 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밤이 하나 지날 때마다 손바닥에 남는 빈자리만 커져 갔고, 그 자리에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도 몰랐다.아버지가 떠난 날, 앞마당의 나무 아래서 내가 쥐고 있던 것이 진짜 약속이었는지, 아니면 초콜릿에 대한 철없는 기대였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어린 나는 그저 하루가 지나면 그만큼 가까워진다고 믿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방패였는지 안다.

사람은 때때로 견디기 위해 스스로에게 작은 거짓말을 한다.

내일이면 분명 더 나아질 거라고,

기다림의 끝이 원하는 모습일 거라고,

낙엽이 떨어지지 않으면 모든 게 멈춘 채 버텨 줄 거라고.


하지만 계절은 내 마음과 다르게 움직였다.

가지 끝에서 색이 바래는 속도는 내가 세는 밤보다 더 빨랐고,

변해 가는 것을 붙잡으려 애쓸수록 손안에서 더 잘게 부서져 내렸다.

그제야 나는 기다림이란 결국 스스로를 견디는 일이라는 걸,

시간을 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버티는 일이라는 걸,

아주 천천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결국 애석하게도 스무 밤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그간 종종 라디오를 들으며 흘렸던 어머니의 눈물은, 기뻐서 그랬던 게 아니었나 보다. 어머니의 눈물이 짙어지는 만큼, 바깥의 붉은 나뭇잎도 시들고 있었다는 걸 깨닫기엔 너무나도 늦어버린 것이다.

상실은 크게 오지 않았다.

작은 금이 조금씩 깊어지며 결국 나를 무너뜨린 것이다.

잎은 결국 색이 바래 변했다.


결국 난 시들어버린 약속들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붙잡아두면 어쩐지 다시 푸르게 돋을 것만 같았던 마음도, 실은 계절을 지나야만 제 자리로 돌아오는 법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 채로.

손안에 꼭 쥐고 있던 것들은 정작 빛이 닿지 않아 더 빠르게 바랠 뿐이었다. 마음이라는 건 억지로 지켜낼수록 가장 먼저 상처 나는 뿌리부터 금이 가기 마련이라는 걸, 그때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떨어지는 잎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스스로에게 고백할 수 있었다. 지켜낸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놓아주지 못한 두려움의 껍질에 불과했다고. 계절은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배워간다. 떨어지는 것들이 모두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흩어지는 순간조차 다음 계절을 위한 조용한 준비일지 모른다는 것을.



“아버지,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매번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당신을 이리도 깊게 그리워할 줄은 나도 몰랐거든.”


“아빠가 도와주러 가는 곳이 전쟁터였다는 걸 알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왜 군복이 뭘 뜻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허망하게 보냈던 걸까요. 그냥 500원짜리 초콜릿이 난 그리도 먹고 싶었던 걸 거예요.”


“어찌 몸 하나 성하게 돌아오지도 못하고, 기일도 모른채로 그저 시도때도 없이 나라가 지정한 기념일이란 핑계로 매번 여기를 와서 안부를 물어보네요, 난 참 못난 딸이에요 그쵸?”


“하지만요, 그렇게 차갑게 시들어 떨어질 약속이었다면, 내게 하지 말지 그랬어요. 오죽하면 가을잎이 떨어지는 게 무서워 그간 나는요, 세상의 계절에서 겨울은 없다고 생각해버렸지 뭐예요.”


"결국, 4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떨어지는 잎 하나가 바닥에 닿는 순간에 나는 오래전의 나를 겨우 용서했어요.”


“아니, 당신을 용서했어요.”


그러니 이제서야 고백하는 거에요,

푹 쉬세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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