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더 열정적인가. 잡아먹는 암컷인가, 먹히는 수컷인가. 암컷은 고작 먹을 뿐이지만, 수컷은 먹히기까지 한다. 암컷은 먹힐 정도로는 정열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먹기만 할 뿐이지만, 수컷은 제 몸을 먹게 내줄 정도로 열정적이지 않은가."
주인공은 목련공원의 찻집 주인 여자와의 불륜 후 아내와 별거한다. 동서는 아파트를 구매하는 걸 목표로 평생 일만 하다가 죽는다. 탈영병은 주인 여자 때문에 탈영하고 그녀의 결혼식장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을 쫓다가 암컷 사마귀에 잡아먹히는 수컷 사마귀 같은 꼴을 겪는다. 아내가 아닌 여자와의 섹스, 아파트 구매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일만 하는 삶, 탈영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탄생이나 사랑, 도덕과 무관한 쾌락만을 좇는 욕망은 죽음으로 향한다. 쾌락 버튼을 누르다 말라죽어버리는 실험실의 쥐를 우리는 알고 있다. 실험실의 쥐와 먹힐 것을 알고도 관계하는 수컷 사마귀처럼 주인공은 여자를 "두려워하면서도 이끌렸다."라고 말하면서도,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욕망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찻집 여자가 산책하던 공동묘지의 묘비에는 각각 관리비 청구서가 붙어있다. "죽음이 삶을 갉아먹고 있는" 운명으로부터 우리는 죽어서도 도망치지 못한다. 죽음은 욕망이라는 미끼로 삶을 유인해서 잡아먹는다. 소설은 탈영병의 손에 이끌려가던 여자의 웃는 얼굴을 발견하며 오싹한 결말을 맺는다. 어디에도 구원이 없는 유독 지독한 작품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어디에도 신의 흔적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신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와 인간 간의 수평적 관계에 대한 고뇌의 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 괜히 생각난다.
욕망에 대한 이승우의 탐구가 그저 불륜 이야기로 읽힐 책이 아닌데 알라딘에 달린 리뷰는 좀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