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이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기본적인 상태라든가 기준이라든가 노말이니 보통이니 하는 것들, 그러니까 무언가의 중간이라는 지점은 그것의 상하좌우는 누가 정하는 걸까. 그것은 세상이라고 자칭하는 타인이지 않은가. 그들의 보통이니 기준이니 기본이니 하는 것들이 나하고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맞지 않는다. 나의 기본적인 정서가 타인에게는 슬픔이나 불행으로 보이기도 하다. 나와 너는 이렇게 다르다. 틀린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당사자에게는 아닐지도 모른다. 다름은 다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틀린 것만 같은 걱정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이 겁을 습관으로, 겁쟁이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불행한 겁쟁이 하나가 세상에 내던져진다.
밀리의 서재에서 인간실격의 베스트 댓글이 "합리화하는 찐따'라고 한다. 충격적이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반가움과는 너무 다른 반응이라 잠시 놀랐고 그것이 오래가지 않은 이유는 지금껏 봐온 타인의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타인, 세상, 이제는 지겨운, 나름 적응한.
약국에 들어간 요조는 약사와 눈이 마주치고 이내 둘은 눈물을 흘린다. 서로의 불행을 초면임에도 감지하고선, 할 수 있는 건 함께 눈물 흘리는 일밖에 없는 마냥. 불행이나 슬픔은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표식처럼 새겨져있는 것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표식은 그것을 지닌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힘을 지닌 것 같다. 자신들 나름의 연대를 하게 하는...
데카당이니 패전 문학이니 하는 것들에는 이제는 좀 관심이 없어졌다. 사실 다자이 오사무에도 그리 관심이 없다. 그저 이 책 한 권과 이 주인공 요조(자전적 인물이란 것을 안다)만이 그리웠고 여전히 반가웠고 어쩐지 좀 짧게 느껴졌다. 중편 정도의 소설인데 이십 대 때는 왜 그리 길게 느껴졌을까. 서로의 불행을 감지하고 연쇄해나가는 소설 속 인물들과 이 책을 읽는 나, 그리고 항상 베스트셀러 매대에 있는 이 책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이 그저 마냥 타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이제는 좀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