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by 김감감무

할머니가 동생과 나를 돌봐주시던 시절이다. 거실에 앉아 밥을 먹는데 천둥번개가 갑작스레 휘몰아쳤다. 처음 겪은 게 아닌데도 그날은 유난히 호들갑을 떨며 무서워했다. 방으로 뛰쳐들어가 이불 속으로 숨었다. 휘몰아치는 세상을 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따라 들어오신 할머니는 따뜻하고 우아한 음성으로 왜 그러니, 사내가 그래서 쓰겠니, 할머니가 있는데 뭐 무섭니라며 나름의 방식으로 달래주셨다. 할머니의 목소리만으로도 날뛰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릴 때였지만 그전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다. 우리 가족의 버팀목이었던 할머니가 주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센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무서움을 드러냈다. 당신이 있으니 어차피 나는 안전할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기댈 곳은 줄어들고 두려움은 노골적이고 다양해진다. 범위가 넓어지면 농도는 얕아지는 게 보통인데 두려움은 그렇지 않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현재의 불안정함 같은 것들. 삶의 근간을 위협할 만한 무언가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처음 사회에 내던져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홀로 사막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왔다. 걸어도 걸어도 오아시스는 보이지 않는다. 이쯤 왔으면 보이겠지. 거의 다 왔겠지. 그렇게 한걸음 한 걸음이 미터가 되고 킬로미터가 되고 마라톤이 됐지만 여전히 갈증에 허덕인다. 오아시스의 존재가 정말 신기루일까 봐 두렵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내색하는 순간 기껏 걸어온 것들이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게들 살고 있지만 내가 말해버리면 어긋난 톱니바퀴가 돼버려 모든 것을 망쳐버릴 것만 같다.

이럴 때면 중대장이 하던 말이 떠오른다. 군 생활이 남자 인생의 마지막 휴가라는 그 엿 같았던 말이. 당시에는 분명 역겹고 억울했고 가증스러웠던 그 말이 어른의 지혜로운, 다 겪어본 인생 선배의 말이었단 말인가 싶다.

가면을 쓴 채 매일을 소몰이하듯 살아간다. 힘들지 않다, 두렵지 않다 나조차 나를 속이며 몰아가는 삶에서 진짜 내 모습을 잊어가며 살아간다. 요즘 핫한 키워드인 추앙과 해방이 너무나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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