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정신으로 있는거보단 덜 힘들어"
최근 종영한 나의 해방일지를 보다가 흠칫했던 대사다. 예전의 내가 종종 하던 말이었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이십 대 초반에 그런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그땐 정말 놀면서 술을 마신 때였다. 이 말을 했던 건 술에 기대 살던 이십 대 중후반쯤이었다.
또 은행 로비매니저 시절이다. 하루에 수백 명을 상대하면서 수십 번 사람에 질색하던 나날이었다. 사람이 싫어진 건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목표는 높은데 노력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든 스스로든 전부 못마땅했다. 나조차 나를 미워하며 이 사람, 저 사람, 나 사람에게 받은 상처들 때문에 곪아가던 시절이었다.
한량에게도 쉴 곳은 필요한 법인데 어디 하나 기댈 곳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싶진 않았다. 그도 그의 투쟁을 하고 있을 텐데 나의 투정을 듣고 싶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술 말고 기댈 곳이 없었다. 술만이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줬다. 동네 술집의 대부분에 단골이 될 정도로 싸돌아다니며 마셔댔다.
그러다 어느 LP 바에 단골이 됐다. 맨정신보다는 덜 힘들단 말은 그곳의 직원에게 했던 말이었다. 단박에 언제, 누구에게 했던 말인지 기억이 안 났던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너무 마셔댔나 보다. 쨌든 그녀는 내가 좀 더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조심스레 나의 공백과 공허를 채워주겠다고 말했다. 진심이었겠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얼마 못 가 다시 혼자가 됐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 치유받는다는 말이 못 미더워졌었다. 상처는 전염되는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전보다 더 곪아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겪어봐야만 알게 되는 진리인 것 같다. 곪아가던 상처에 이제야 딱지가 좀 앉은 것 같다. 여전히 삶은 투쟁이고 그 외의 것은 다 공허하지만 이 자체가 삶이라고 받아들일 여유가 좀 생겼다. 간만에 본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저 대사를 했을 땐 닭살이 돋았지만 그래도 이젠 괜찮다. 주인공들의 해방을 보게 됐을 땐 희망을 다시 갖고 싶어졌다. 사람은 사람에게 치유받는다는 말을 다시 한번 믿어보고 싶어졌다. 나를 죽이지 못한 상처는 아무리 아프대도 결국 낫나 보다.
구씨와 미정이의 시작은 추앙해요가 아닌 추앙해줄까요부터다. 나부터 누군가를 치유해 줄 만한 사람이 먼저 되자. 치유받기만을 원하며 술에 찌들었던 지난날의 실수를 인정한다. 드라마는 현실적인 부분으로 공감을 얻고 극적인 부분으로 기대를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결말은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 같다. 이번에 나는 희망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