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이름의 따뜻한 자리

다문화 아이들의 마음에 씨앗을 심다

by 김현

명우를 처음 만난 건 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때였다.

서툰 한국어로 전화를 걸어온 명우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아이… 국어 할 거예요. 수업 부탁해요.”

더듬거리는 말투 속에 자식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묻어났다.

그날 저녁, 명우의 부모님은 직접 학원으로 찾아오셨다.
중국에서 이주한 두 분은 한국어가 서툴렀지만,
아이를 향한 마음만큼은 말보다 더 분명하게 전해졌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그 눈빛은 오히려 어떤 말보다도 깊고 또렷했다.


*


명우는 또래보다 빠르고 영특한 아이였다.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싶어 부지런히 책을 읽어오던,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아이.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빛이 흐려졌다.
명우가 책 읽기를 멈춘 순간, 나는 알았다.
그건 명우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가 혼자 책을 읽고, 수업을 준비한다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
수업은 점점 어려워졌고, 명우는 점점 더 책과 멀어졌다.
나는 안타까움에 숙제와 독서를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건 악순환일 뿐이었다.
책에 대한 흥미는 점점 더 줄어들었고,

결국 명우는 조용히 학원을 떠났다.


*


4년 뒤, 명우가 다시 학원 문을 두드렸다.

6학년이 된 명우와 다시 마주한 순간, 내 마음엔 씁쓸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명우 안에 자리한 ‘공백’은,
우리 사이에 비어 있었던 시간만큼 깊고 컸다.

2학년 때의 그 반짝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명우는 이제 학교에서 ‘부진아’로 낙인찍혀 방과후 보충수업을 듣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다문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종종 한국어와 국어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다. 국어가 어려우니 다른 과목도 버거워지고, 그 무게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어깨 위로 쌓인다.

‘조금 더 일찍,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있었다면…’
그 생각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


지난 10년 동안 수업을 하며 다양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만나왔다.

그중에서도 유나는 내 마음에 가장 오래, 가장 깊이 남은 아이였다.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유나.

유나는 국어 공부뿐 아니라 역사 수업에서도 상처를 받았다.
5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의 아픈 과거를 마주하며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특히 한일 월드컵처럼 두 나라가 맞붙는 순간이면,
서로를 향한 라이벌 의식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 열기는 단순한 스포츠 경쟁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역사와 감정이 켜켜이 쌓인 무거운 정서가 깔려 있다.

“한일전에서 누구 응원할 거야?”라는 친구들의 질문에
“난 둘 다 응원할 거야.”라고 대답하던 유나의 목소리는
어쩐지 지쳐 있었고, 그 눈빛엔 알 수 없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


최근 6학년 아이들과 함께 역사 소설을 읽으며
역사 속 장면들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6.25 전쟁의 발발부터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중공군의 개입까지—

책 속 이야기를 따라가며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비극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었다.

“중국 진짜 짜증나! 걔들 없었으면 통일했을 텐데!”

감정이 고조된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수업 전에 특정 국가에 대한 무례한 발언을 삼가달라고 당부했지만, 복잡하고 아픈 역사를 마주한 아이들의 마음은 쉽게 조절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조용히 손을 든 명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중국은 누구 편이에요? 지금은 ‘우리 편’ 아니에요?”

나는 그 질문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명우의 ‘우리’ 안에 자신이 들어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나는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명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명우야,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어.
너는 언제나 우리의 편이야.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너의 편이야.”

*

그날 이후, 나는 다짐했다.
아이들에게 지식만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우리’ 안에 따뜻한 자리를 만들어주는 어른이 되겠다고.

명우와 같은 아이들이 ‘우리’라는 말을 망설이지 않도록, 언제나 그들의 편에 서서 손을 내밀겠다고.

어쩌면 교육이란, 누군가의 마음에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작은 씨앗을 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씨앗이 명우의 마음에서, 그리고 수많은 아이들의 마음에서 따스한 봄날을 맞이하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교실 문을 연다.







#교육이란무엇인가 #포용의교육 #우리라는말
#다문화가정아이들 #공감하는수업 #교실이야기 #아이들과함께한시간 #교사에세이 #따뜻한교육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