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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un 30. 2021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어

친구의 가면을 쓴 프레너미

 친구가 친구가 아닌 적이 될 때가 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훅하고 공격을 가해 대비도 못 한 채 꼼짝없이 당하고 있었던 때가 혹시 있었다면, 그런 순간이 반복되고 있다면 그 친구는 ‘프레너미’일 확률이 높다.

‘프레너미’란 ‘프렌드’(friend)와 ‘적(’enermy)의 합성어로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친구인지 적인지 모호한 상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프레너미라는 말은 1970년대에 처음 등장했고 2009년엔 정식단어로 영어사전에 등재되었다 하니 단순히 어제오늘 생겨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 적잖은 충격이었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이 무례하게 굴거나 공격하는 것은 순간엔 기분 나쁠 수는 있지만, 생활 전반을 좌우하는 큰일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냥 쿨하게 “재수 없어” 한 마디로 털어 버릴 수 있다. 혹은 받은 만큼 바로바로 반박해 상대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도 있겠다. 어차피 다시 안 볼 사람이거나 안 봐도 그만인 사람이니까. 하지만 절친한 친구로 믿었던 이에게 같은 공격을 당하면 그리 쉽게 넘어가기 힘들다.     



 오래전 모임에서 한 친구가 직접 구운 쿠키를 나눠준 적이 있다. 

“ 얘는 줄 필요 없어. 쿠키 안 좋아해”

이제 막 쿠키를 받기 위해 손을 뻗으며 한껏 미소를 담고 감사 인사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친구 P가 한 말이다. 

“아 그렇구나. 몰랐네.”

단 것을 즐기지 않는 것은 맞지만 친구가 정성껏 구운 쿠키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간혹 단 것이 당길 때도 있고 어떤 맛일지 궁금하기도 했는데, P가 훅하고 들어오더니 나를 ‘쿠키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뻘쭘해진 손을 수습해야 했고 당황한 표정을 지우기 위한 억지웃음을 짓느라 진땀을 뺐다. P의 말에 반박하자니 무안해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P의 말을 뭉개고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아니, 나 그 쿠키 먹어보고 싶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인제 와서 후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적어도 친구 P가 ‘프레너미’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프레너미’라면 그 순간 “그래? 너 예전부터 안 좋아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취향이 그새 바뀐 거야?”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거나 “그럼 받으면 되지 뭘 그렇게 예민하게 따지냐”며 오히려 면박을 줄 수도 있다. 분명 속 좁은 밴댕이로 만들 것이다. 그래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생각으로 한번 두번 넘어가다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자존감을 흔들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프레너미는 감정을 좀먹는 감정 좀비다.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상대를 희생시킨다. 단순히 감정을 상하게 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반박하기 어려운 상황을 즐기고 어리둥절해서 당황하는 모습에 자신감을 얻는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려 한다.     



 미란은 제빵을 배우면서 A를 처음 만났다. A는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요리선생으로 많은 회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미란은 A의 수업을 들으면서 가까워졌고 둘은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자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여행도 가면서 타지에 다른 친구들과 떨어져 지냈던 미란에게 A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A가 카페테리아를 오픈하게 됐는데 평소 커피에 관심이 많았던 미란은 오픈을 돕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바리스타 자격도 있고 하니 당분간 커피를 맡아주겠다고 했다.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던 A로서는 미란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다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미란 또한 조만간 카페를 오픈할 터라 좋은 경험이 될 거로 생각했다.      


 고마워하던 A의 태도가 돌변한 건 미란의 출근 첫날부터였다. 커피 내리는 일을 도와주러 간 미란을 직원처럼 부리고 설거지며 잡일을 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A의 가족까지 미란에게 잔심부름을 지시하기도 했다. 평소 싫은 소리를 잘 못 하는 미란의 성격을 A는 교묘히 이용했다. 마치 당연한 듯 미란을 부렸다. 미란의 자존감은 추락했고 뭔지 모를 억울함과 우울감이 밀려왔다.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한 달간 도와주기로 한 약속이 미란의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한 달 내내 A는 미란의 감정을 갉아 먹고 자존감까지 파괴했다.  

   

 단순히 ‘배려 없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배려 없는 행동이 반복되는 것 역시 더는 친구로 보기 어렵다. 프레너미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둘도 없이 친한 척 다가왔다가도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상대방의 감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지우려 하고 상대방 위로 올라서려 한다. 본인이 없는 틈을 노려, 주변 사람에게 뒷말을 일삼으면서 ‘걱정돼서 하는 말’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로 프레너미에겐 오랜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이득만을 위해 움직이는 프레너미에게 오래 남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간혹 친구의 갑작스러운 성공에 한껏 기쁘다가도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시기와 질투를 하기도 한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우리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의 성공”이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성공과 행복은 우리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불행을 모면하기 위해 가장 친한 친구의 불행을 조장하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친구의 등을 짓밟아 채워지는 만족감을 자존감으로 착각하며 감정을 착취하는 프레너미의 행위가 지탄받는 이유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받고 배신당한 마음은 회복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미란 역시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느라 힘들어했다. 한동안은 A의 얼굴 보는 일 따위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하겠지만 A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친절한 몸짓으로 다시 우정을 논하며 미란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때 미란은 결정해야 한다. 끊어낼 것인지 거리를 둘 것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끊어낼 관계가 아니라면 조금씩 거리를 두면서 손을 놓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었어. 그땐 내가 뭔가 오해했던 거야. 그래도 친군데 안 보고 살 순 없지.’라며 다시 한 발자국 다가가는 순간, 다시 감정 좀비의 손아귀에 갇히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프레너미는 친구가 아니다. 그들은 웃으면서 갑작스러운 순간에 반박할 수 없게 우리를 깎아내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네가 좋아 보이는 건 참을 수 없어. 네가 행복한 건 견딜 수 없어.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어’라고 말이다.   

  

 주변에 좋은 사람도 많은데 굳이 프레너미를 가까이 둘 필요는 없다. 좋은 사람들을 챙기기에도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고 적어도 프레너미의 먹잇감을 자처해선 안 된다. 만만한 상대로 보여 공격이 대상이 되고 뻔히 범의 아가리인 줄 알면서도 자신을 내어주는 행동은 착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언젠가 또다시 당신을 향해 급작스러운 감정공격을 가해 온다면 온 힘을 다해 한마디만 하자. 

“그건 네 생각이고. 난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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