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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ul 06. 2021

나의 걱정 인형에게

걱정에 물들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내 머리맡에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 잠자는 동안 나를 대신해 걱정을 떠맡아 줄 이른바 ‘걱정 인형’이다. 실제로 걱정 인형 덕에 걱정에서 벗어났다거나 불안이 잠재워져 잠을 푹 잘 수 있었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그저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많은 걱정의 쓰나미 속에 있었는지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걱정 인형’은 한 보험회사 광고로 유명해졌지만, 실은 중부 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져온 인형이다. 공포나 걱정으로 잠 못 자는 아이에게 작은 천 가방에 넣은 6개의 인형을 선물하고 매일 밤 하나씩 꺼내 걱정을 인형에게 말하게 한다. 그렇게 걱정을 가득 전달받은 인형을 아이가 베게 밑에 넣어두면 아침에 부모가 치워버린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걱정은 인형이 가져갔단다.”

아이들에게는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부모에게 말하기 어려운 일들과 걱정을 인형에게 털어놓는 순간부터 이미 아이의 걱정은 조금씩 사라지게 될 것이다. 걱정이 사라진다는 믿음이 진짜로 걱정을 없애주기도 한다.     


 내가 걱정 인형에게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것은 인형이 진짜 걱정을 가져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었다. 그 시절 인생 최대의 위기라 생각될 만큼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설상가상 남편의 사업실패로 경제적 어려움마저 보태져, ‘이번 인생은 망했다.’라는 혼잣말을 달고 살았던 그야말로 암흑의 시절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상처와 걱정과 불안을 다른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기였다. 세상과 단절된 상태로 친구도 지인도 심지어 가족과도 연락하지 않았다. 완전히 고립된 나만의 세상으로 들어가 자책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끊임없는 걱정은 불안을 불러오고 불안은 우울감을, 우울은 무기력을 친구로 데려왔다. 수많은 상처를 남긴 외부의 상황들을 비난하고 탓하며 대체 왜 내게만 이러는 거냐며 따졌지만 정작 더 깊은 지하로 숨어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걱정’은 자신에게 주는 상처였고 ‘벌’이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지난 과거의 사건들이 지금 이 현실을 만들었다며 원망하고, 아직 생기지도 않은 일에 전전긍긍하느라 매일 밤 불면의 시간을 보낸다.      


 걱정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새로운 걱정은 생기기 마련이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걱정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심각하게 불안을 초래하는 걱정거리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옷자락에 먼지처럼 툴툴 털어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반면 어떤 이는 마치 이번 생이 끝난 것처럼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그 시절의 나처럼 말이다. 물론 그때의 나를 걱정과 불안 속에 잠식시킨 사건들은 분명 작은 일은 아니었다. 힘들었고 불행했다. 중요한 것은 이미 벌어진 사건이고 지나간 일이라는 점이다.


 걱정은 우리가 위기상황을 감지하고 이를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판단력과 행동력, 추진력을 갖게 한다. 문제는 걱정만 하는 것이다. 머릿속에서의 생각만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군다나 그 생각이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보고 해결하기 위한 고민이 아닌 원망과 분노의 표출이라면 상황은 더욱더 악화할 수밖에 없다.      

 나를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고 ‘걱정 인형’에게 질문했다. 그것은 나를 위한 일종의 위로 의식이었다.

“난 왜 힘든 거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내 마음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마음을 들여다보고 상처를 열어보고 질문을 던져 보는 일을 ‘걱정 인형’과 함께 했다. 인형은 ‘걱정 인형’이라기 보다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나’였다. 


 나와 만나는 시간을 정해 매일 질문과 답변을 하면서 조금씩 평온해졌다. ‘걱정이 사라졌다’가 아니다. 걱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설사 오늘 걱정이 사라졌다 해도 내일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다만 초대하지 않아도 불청객처럼 불쑥불쑥 찾아오는 ‘걱정’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걱정은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하고 불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면 ‘기대’와 ‘걱정’이 함께 찾아온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기대로 가득 찬 순간엔 걱정은 사라지고 걱정과 함께 하는 시간엔 기대감은 자취를 감춘다. 오늘 승진시험에서 떨어졌다면 걱정이 태산일 것이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가족들이 실망할까 걱정이고 나보다 먼저 승진한 사람에게 뒤처지는 것도 걱정이다. 나는 왜 이리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다음번 승진에서 또 밀리면 어쩌지라는 생각으로 이미 마음은 지옥에 있다. 다시 기회를 봐서 승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사라져 버린다. 어쩌면 그 둘은 하나이면서 둘인 이란성 쌍둥이처럼 우리를 헷갈리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둘이 가진 양면성을 조금은 이용해도 되지 않을까? ‘걱정’을 조금만 틀어 ‘기대’로 바꿔보는 것이다. 


 걱정은 태생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게끔 생겨 먹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대 역시 마찬가지다. 승진시험에 떨어진 것은 이미 지나간 사건이 되었다. 우리는 그때 새로운 기대감으로 걱정을 몰아내야 한다. 퇴근길에 꽃을 사보는 것이다. 꽃을 보고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이 기대된다. 꽃으로 장식된 식탁 위를 상상하며 벌써 저녁 식사 분위기가 좋아질 것이 상상된다. 꽃 하나로 집안 분위기가 달라지길 기대하고 다음엔 어떤 변화를 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걱정을 바로 기대로 바꾸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지나가 버린 일에 대한 걱정을 접으려면 우리에겐 새로운 기대가 필요하다. 그러니 행동해야 한다. 나에게서 걱정을 몰아낼 수 있도록 새로운 ‘기대’를 찾아보자.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걱정한다고 걱정이 없어지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는다는 바퀴벌레처럼 걱정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걱정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걱정에 잠식되지 않으면 된다.     

 어느 순간 나는 걱정 인형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내 인생은 망하지도 않았으며 더는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천천히 올라가서 만나게 될 새로운 삶을 기대하게 됐다. 아울러 다시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와도 잘 견뎌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보너스로 얻었다. 걱정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불안의 늪에 빠지고 절망 가득한 사막을 건너고 우울감의 우물 속에 숨어 있던 나는, 상처와 감정과 마음을 보는 시간을 통해 한 층 더 성장했다.

치유된 상처는 우리를 성장시킨다.     


“걱정 인형아, 고마웠어!

여전히 걱정이 많지만, 그보다 더 행복한 기대감을 안고 산다. 

나는 지금 괜찮으니 걱정 많아 힘든 사람들을 부탁해”          


 “걱정 없는 인생을 바라지 말고 걱정에 물들지 않는 연습을 해라.”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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