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동화 속 왕비는 끊임없이 거울 앞에서 묻는다. 이미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데 무엇이 그토록 왕비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왕비는 타인의 시선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 그리도 안절부절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칭찬받길 원하고 이왕이면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라는 것이 문제가 되진 않는다.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쿨리는 거울 속 자신을 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 혹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대한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모습을 일부러 흡수해 자아상으로 형성해 가는 것을 ‘거울 자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지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외모, 태도, 성격 등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인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무거운 물건을 들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 드렸을 땐 ‘착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반면, 약속 시각에 쫓기느라 할머니를 외면하고 지나왔다면 ‘나쁜 사람’으로 생각될 것이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이 실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볼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을 말한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지 않는 이상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다만 그런 타인의 눈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자신의 주관이나 자존감에 금이 가게 해서는 안 된다. 남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만 안심이 되고 자신의 언행을 곱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면 인정 중독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타인의 인정이 삶의 전부가 되어 거절이나 비난에도 생활 전반이 흔들린다면 인생 자체가 억울하고 불행한 삶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기리에 방송된 넷플릭스 시리즈 ‘퀸즈 갬빗’을 보면 인정욕구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드라마는 체스 천재 ‘베스 하먼’이 보육원 소녀에서 세계 체스 챔피언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체스는 베스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고 계속되는 승리로 그녀의 자존감은 높아만 간다. 체스는 베스가 타인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대부분 인생사가 그렇듯 승리의 여신이 늘 그녀의 편에만 서진 않았다. 패배 앞에서 베스는 한없이 약해지고 술과 약물 없인 버티지 못하고, 힘겹게 쌓아 올린 자존감마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어쩌면 베스를 힘들게 하는 것은 체스 게임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타인의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베스의 두려움은 자신이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하면 버려질 수 있다는 과거의 상처에서 기인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그녀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어머니를 문 앞에서 쫓아냈다. 어머니는 결국 스스로 교통사고를 내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만다. 베스는 아버지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을 것이다. 버려졌다는 생각은 내면 깊숙한 상처로 자리 잡았고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목말라하며 무섭도록 체스에 매달리게 했다.
존재의 거부는 누구에게나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사소한 거절도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어릴 적 기억 속엔 엄마와 손잡고 시장에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매번 데려가 달라고 졸랐지만 어린 나를 동반한 시장행이 쉬울 리 없었다.
엄마는 매달리는 내 손을 뿌리쳤기 일쑤였고 얌전히 “네.”라고 대답하고 기다려야 했다고 후회하곤 했다. 늘 사랑받기 위해 착한 아이로 보이려 발버둥 쳤고, 그것은 착한 아이여야 사랑받는다는 공식을 만들게 했다. 거절당하는 것이 사랑받지 못한 것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놓고 혼자 상처받았다.
엄마는 그저 장 보는 일이 버거워 함께 시장 가는 행위를 거절했을 뿐이다. 하지만 어린 나는 존재 자체를 외면당한 것처럼 무섭고 서러웠다. 그렇다. 그저 행위에 대한 거절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우리의 이러한 착각이 인정에 대한 중독을 만든다. 타인에게 받는 인정만 가치로 여기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지키는 일엔 소홀하다. 마치 거울 앞에서 끊임없이 나 예쁜 거 맞냐며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동화 속 여왕처럼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타인의 평가는 결국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만든다. 그렇지 못하면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그래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절망하며 스스로 병들게 하고 악순환을 반복한다.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타인의 인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미 내 안에 있다. 내가 선택하고 행동하고 요구하는 것이 진정 나의 욕구인지 들여다보자.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욕구에만 치중하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지름길이다.
실상 대부분 사람은 타인에게 특별한 관심이 없다. 사랑과 인정과 관심을 주는 사람은 오히려 내가 어떤 모습이든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기 정체성을 인정해 줄 뿐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응원해 준다. 그들은 사랑이나 인정을 볼모로 상대의 내면을 파괴하려 들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당신에게 힘이 되어 주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이 내가 원하는 욕구에 부합하는지가 중요하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애써왔던 일, 앞으로 거쳐 가야 할 인생의 수많은 장애물 앞에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울지 알아주는 이는 나로도 충분하다.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격려해 주었던 타인을 향한 손길을 이제 나에게로 돌려보자.
“난 지금도 괜찮아.”
“잘하고 있어”
이미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내가 먼저 인정해 주어야 한다.
굳이 남이 말해주길 바라며 매달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남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남들은 그렇게 당신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한, 이 세상 누구도 당신이 열등하다고 느끼게 할 수 없다.” - 엘리너 루스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