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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현 Nov 01. 2018

그를 생각하며 불어터진 라면을 욱여넣었다

[구급출동] 주취자

  SNS에서 직장인 3대 소울푸드를 소개하는 글을 보았다. 제육볶음, 돈가스, 김치찌개.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완벽한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소방관의 소울푸드는 무엇일까? 3대까지 갈 필요 없이 단 하나의 음식만이 떠오른다. 라면. 일단 근무가 시작되면 다음 팀과 교대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황이든 출동해야 한다. 밥을 먹다가도, 애인과 통화를 하다가도, 심지어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다가도 뛰어나가야 한다. 출동으로 인해 구내식당 식사시간을 놓친 소방관을 가장 잘 위로해주는 음식이 라면이다.


  다 끓여 식탁에 올린 직후에, 출동벨이 울리는 야속한 경우도 있다. 배 채운다는 심정으로 불어 터진 면을 먹을 때는 약간 서럽기도 하다. 도저히 못 먹겠다 싶을 때엔, 면을 버리고 국물만 먹는다. ‘아, 이래서 중국집 가면 선배들이 짬뽕 안 시키고 볶음밥을 시키는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는다. 밥때를 놓쳐 어김없이 라면을 끓이던 중 또 출동벨이 울렸다. 머피의 법칙인가, 왜 면을 넣은 직후에만 벨이 울리는지 모르겠다. 야간 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취자(drunken) 신고이다. 길을 지나던 사람이 추운 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신고해준 마음 따뜻한 경우이지만, 구급대원들에겐 영 성가신 신고가 아닐 수 없다.


  이유가 여럿 있다. 우선 주취자의 상태가 양호한 경우가 많아, 병원으로 이송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급대는 더 응급한 환자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병원이나 자택으로의 단순 이송은 법에 근거해 거부할 권

리가 있다. 둘째, 주취자는 구급대에게 위협적인 존재이다. ‘진정한 구급대 생활은 주취자에게 얻어맞은 후에 시작된다’라는 웃픈 얘기가 있다. 주취자를 대할 때엔 영상녹화장치가 달린 헬멧을 항시 착용하지만, 맞더라도

신고를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법적으로 보상을 요구하더라도 인사기록에 남아 진급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냥 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취자 신고가 꺼려지는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다. 현장에 나가보면 전에 봤던 주취자를 또 만나는 경우가 있다. 병원 이송이 불필요한 주취자의 경우, 보통 경찰에 인계하고 구급대는 복귀하게 된다. 경찰서로 이송된 후엔 신원 조회를 받고, 자택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또 만나는 주취자들의 대부분은 자택 없이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구급차가 매번 라면을 사던 마트 앞에 멈춰 섰다. 허름한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멋진 붉은색 운동화를 신고 있어 ‘빨간 신발 할아버지’라고 불러왔다. 정상일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장비를 꺼내 활력징후(vital sign)를 체크하며 말을 붙여본다.


  “어르신, 또 뵙네요.”


  처음 만났을 때, 할아버지는 아파트의 방음벽 아래에 누워있었다.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검은색의 바지에, 청색 재킷 하나 걸친 상태였다. 그때도 운동화는 여전히 붉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주워온 듯한 소파 매트에 의존해 보도블록의 냉기를 참아내고 있었다. 어디서 구해 드셨는지, 머리맡엔 소주 두 병이 놓여있었다. 식사는 하셨냐고 묻자 오늘은 한 끼 먹었다고 답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나에 몇 마디의 대답이 더 돌아왔다.


  “쓰레기통 뒤져서, 박스 안에 닭 조금 주워 먹었어.”


  집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도 없다고 했다. 머피의 법칙인가, 아픈 일은 왜 아픈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걸까. 술 그만 드시라는 꾸중을 하면 여느 주취자와 똑같이, 하던 말만 계속 되풀이하셨다. 멍한 내 기분 탓인지, 할아버지의 술주정은 점점 잦아들고 마트 계산대 소리만 들렸다.소방서에 복귀하는 길에도 할아버지의 대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식당은 어두웠지만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TV 조명에 비친 라면은 기세 좋게 불어, 흉측할 정도였다. 평상시였으면 엄두도 못 낼 굵기였지만, 그날은 크게 한입 집었다. 억지로 욱여넣었다. TV에선 매번 나오던 유니세프 광고가 나왔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지구 반대편의 아이들이지만, 그들의 눈은 익숙했다. 바보같이 눈물이 났다. 날이 추워서 그런 건지, 불어 터진 라면을 먹는 생활에 싫증이 난 건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그냥 돌아온 나 자신이 무기력해서 인지. 이유도 모른 채 어두운 식당에 앉아 그 아이들과 같이 울었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다. 새벽 출동을 나갈 때엔 외투를 꼭 챙긴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따뜻한 지역이지만, 바닷바람은 사람 하나 얼리기엔 충분히 차다. 전에는 귀찮았던 주취자 출동도 이젠 슬슬 신경이 쓰인다. 현장 주소를 두세 번 확인하고, 환자가 어떤 신발을 신고 있나부터 확인하게 된다. 다음번에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물어볼 질문이 생겼다. ‘어르신,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그 음식을, 할아버지의 소울푸드를 생전에 같이 먹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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