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퇴사하면 파리에 갈 거예요."
회사에서 현정이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딱히 진심이 담겨있던 건 아니다. 이 말은 일종의 자기암시에 가까웠다. '하쿠나 마타타'처럼 직장 상사의 짜증을 견뎌야 하거나, 회사 동료들이 업무 기한을 지키지 않아 자신의 일정이 연기될 때마다 현정은 저 말을 마법 주문처럼 나지막이 외웠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이 회사를 나가더라도 어딘가 갈 곳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현정이 파리를 그녀의 목적지로 고른 이유도 단순했다. 현정이 막 취직했을 무렵, 그녀는 옛 친구와 연락이 닿아 회사 주변에서 점심을 한 번 먹은 적 있었다. 현정의 친구는 파리 여행에서 막 돌아온 상태였다. 밥을 먹는 동안 친구는 그녀에게 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쉬지도 않고 계속 이야기했다.
"너도 꼭 가봤으면 좋겠어!"
친구는 헤어지기 직전, 현정에게 기념 선물이라며 에펠탑 키링을 하나 건넸다. 현정은 그 키링을 사무실 모니터 아래에 관상용으로 놔뒀다.
그날 밤 현정은 자기 전에 유튜브에 들어가 파리 여행 브이로그 영상을 찾아봤다. 그녀는 영상을 보며 파리에 가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상상 속의 그녀는 샹젤리제 거리를 돌아다니며 명품 쇼핑을 했고, 화이트 에펠을 보며 와인을 마셨다. 상상만으로도 즐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현정은 퇴사하지 않았고, 파리 여행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늘 그랬듯이 회사를 다녔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현정 씨는 우리 회사랑 핏이 안 맞는 것 같아요. 이번 달까지만 하고 서로 갈 길 가는 게 어떨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새로 들어온 팀장은 혁신과 쇄신을 외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기업에서 스카우트해서 데려온 엘리트로 팀원들의 업무량과 성과를 세세하게 체크하며 관리했다. 자신의 기준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은 따로 불러내서 핀잔을 줬다. 현정은 이미 그한테서 몇 번의 경고를 들은 상태였다. 어쩌면 그녀가 회사를 떠나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 시간이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다가왔다는 게 현정의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마지막 출근 날, 현정은 평소에 친했던 팀원들과 함께 회사 주변에 위치한 작은 와인바에서 술을 마셨다. 팀원들은 현정의 몫까지 화를 내줬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현정은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었다. 한 팀원은 현정에게 퇴사 이후 계획을 물었다. 그러자 현정이 답하기도 전에 다른 팀원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현정 언니는 이제 파리 가야지."
"내가?"
"언니가 늘 그랬잖아? 퇴사하면 파리 갈 거라고.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언니 파리 간다고 알고 있던데?"
현정은 아차 싶었다. 자신조차 몰랐던 퇴사 이후 계획을 동료들은 알고 있었다니.
집으로 돌아온 현정은 회사에서 가져온 짐들을 정리했다. 물건을 하나씩 꺼내서 살펴보던 중 작은 에펠탑 키링이 눈에 들어왔다. 현정은 손바닥 위에 키링을 올려두고는 한동안 말없이 그것을 지켜봤다. 그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안에서부터 솟구치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현정은 곧바로 노트북을 켠 다음, 파리행 비행기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한 달 후에 출발하는 티켓을 결제했다. 구매 내역을 보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미뤄왔던 소일거리를 해치운 느낌이었다.
"그래…. 진작에 이렇게 할걸."
현정은 취기를 빌려 깊은 잠에 들었다.
출국날 당일 이른 새벽. 현정은 집을 나와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녀의 짐은 캐리어 가방 하나와 백팩 하나였다. 공항으로 향하는 직행 열차의 짐칸에 짐을 싣고,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공항까지 가는 동안 현정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파리에 대해 철저하게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수백 개의 블로그글을 읽고, 수십 개의 여행 브이로그를 보며 파리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봤다. 얼마나 공을 들여 준비를 했는지 눈을 감아도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을 외울 정도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마음은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분명 설렘으로 가득해야 하는 여행인데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직 여행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탑승 게이트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현정은 스스로한테 되물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애당초 자신은 정말로 파리에 가고 싶었던 걸까? 비행기에 올라타면 그녀는 한 달 후에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과연 자신이 그 한 달을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차라리 파리가 아니라 도쿄를 간다고 말할걸.'
현정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아침 대용으로 사 온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여행 가세요?"
현정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어디로 가세요?"
"파리요."
"오 좋으시겠어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네요."
현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자는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저도 똑같아요. 그냥 집에서 잠이나 더 잘 걸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건지."
여자가 덧붙였다.
"그래도 가기 전이 무서운 거지. 막상 가면 다 괜찮아요. 여행이 뭐 별거 있나요. 가서 재밌으면 그만이지. 중요한 건 내가 즐겁냐는 거예요."
"만약에 즐겁지 않다면요?"
"그럼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죠."
그때 건너편에서 탑승을 안내하는 방송이 울렸다. 의자에 앉아 대기를 하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탑승 게이트 앞으로 모여 줄을 서기 시작했다.
"먼저 가봐야겠네요. 그럼 좋은 여행 되세요."
여자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건너편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먼저 떠나는 여자의 뒤를 보며 현정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파리 여행은 그녀가 정말로 원하던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이 이 여행을 무사히 잘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녀한테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여행을 즐겁게 만들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현정은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잠시 후 현정이 있던 탑승 게이트에서도 탑승 안내를 알려주는 방송이 울렸다. 현정은 짐을 챙기고 사람들의 뒤를 따라 줄을 섰다.
이제야 조금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