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도우복싱

by 지누

#1


라운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강력한 라이트훅이 우석의 머리를 맞췄다. 왼팔로 단단하게 가드를 하고 있었음에도 그 충격은 방어를 뚫고 그대로 목 아래까지 전해지는 게 느껴졌다. 대회를 대비한 풀스파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대가 이 정도로 세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석이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상대의 라이트훅이 다시 한번 머리를 맞췄다. 이번에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질 뻔했다.


"맞고만 있으면 안 돼요. 반격하세요."

링 밖에서 스파링을 지켜보던 관장님이 말했다.


우석은 마음 같아서는 그걸 누가 모르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상대의 공격을 최대한 피하며 조금이라도 덜 맞는 것뿐이었다.



#2


자정을 넘기기기 직전, 우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람을 확인해 보니 수고했다는 관장님의 짧은 메시지와 함께 오늘 했던 스파링 영상이 보내져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영상을 재생시켰다.


영상 속에 담긴 자신은 움직이는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전부 맞아주며 그저 몸을 휘청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반격을 시도하는 모습도 몇 번 나왔지만, 거의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우석은 영상을 중간까지만 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꺼버렸다.


처음 생활체육대회를 나가볼 생각이 있냐는 관장님의 물음에 우석은 그저 가볍게만 생각했다. 체육관을 다닌 지도 벌써 1년이 넘었으니 한 번 나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정작 대회 날짜가 다가올수록 우석은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를 점차 깨달았다.


체력은 너무나도 쉽게 바닥났고, 호흡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라운드 중반을 넘어가면 그는 숨을 헐떡였다. 거울을 보며 했던 쉐도우 복싱이나 샌드백을 상대로 화려하게 날렸던 콤보들은 링 위에서는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머리로는 메이웨더와 파퀴아오 부럽지 않은 실력이었지만, 원투 펀치도 겨우 날리는 게 현실이었다. 앞으로 대회까지는 이틀 밖에 남지 않았고, 그는 전혀 준비가 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냥 도망칠까."

우석은 자신의 마음속의 그늘은 점점 커져만 가는 게 느껴졌다.



#3


대회를 하루 앞두고 우석은 체육관을 나오기로 했다. 집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 체육관을 나와 가볍게 운동이라도 하는 게 아무래도 나아 보였다. 평소처럼 몸을 풀고 줄넘기를 하던 중 우석의 시선은 링으로 향했다.


링 위에는 어림잡아 쉰은 넘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관장님과 미트를 치며 합을 맞추고 있었다. 우석은 여성의 동작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녀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깔끔했다. 주먹은 팔힘이 아닌 다리와 허리의 힘을 이용해 내고 있었다. 그래서 가볍게 던지는 것처럼 보여도 들리는 소리는 훨씬 묵직했다. 우석은 지금 당장 자신이 이 여성과 스파링을 한다면 1라운드도 버티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회 준비는 잘 돼 가요?"


낯선 목소리에 우석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 링에서 봤던 여성이었다. 순간 우석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는 게 좋을지 망설여졌다. 그런 우석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많이 떨리죠?"

"네…. 제가 대회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괜찮아요. 저도 처음에 대회 나갔을 때 기억나요. 대회까지 일주일 남았을 때는 정말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밤에 잠도 못 잤다니까요. 그런데 막상 나가보니까 무슨 생각이 들은 줄 알아요? 이야… 진짜 별 거 없구나! 오히려 그동안 마음고생한 게 오히려 아까울 정도였죠."

“경기는 이기셨어요?"

우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여성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뇨. 졌어요. 상대가 저보다 키도 크고, 팔도 길어서 쫓아만 다니다가 싱겁게 끝났아요.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링에 올라가서 상대랑 눈이 마주쳤는데 상대도 눈이 퀭한 게 보이더라고요. 그거 보면서 '아 이 사람도 밤잠 좀 설쳤겠구나!' 싶더라고요."

여성은 할 말을 전부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부터 겁먹을 필요 없어요. 가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그럼 파이팅!"


운동을 마무리하고 신발을 갈아신던 중 우석은 신발장에 붙은 이름표 덕분에 여성의 이름이 '임성희'라는 걸 알게 됐다.


"임성희."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익숙한 이름이었다.


우석은 운동을 다 마치고 체육관을 나서기 직전에 그가 어디에서 그 이름을 봤는지 알게 됐다. 그 이름은 체육관 입구 옆에 걸린 액자에 적힌 이름 중 하나였다. 액자는 합격증이라는 커다란 글씨 아래에 프로테스트 합격하여 이 증서를 수여한다고 적혀있었다.



#4


생활체육대회가 개최되는 체육관은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대회 참가하러 온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체육관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링이 놓여있었는데 그 크기가 우석의 체육관에 있는 것보다 배는 커 보였다. 링을 주위로 관중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도 설치되어 있었다.


우석의 경기는 마지막 경기라 그는 남는 시간 동안 천천히 몸을 풀며 대회 준비를 했다. 긴장은 됐지만, 전날의 대화 덕분인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챌린지 체육관, 김우석 선수 준비해 주세요."

장내에 울려 퍼진 안내에 우석은 관장님을 따라 링 앞으로 다가갔다. 관장님은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바로 앞의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링 위에 올라가기 직전 우석이 물었다.

"관장님. 제가 때리면 상대도 아프겠죠?"

관장님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우석 님 주먹 세요."


링 위에 올라오자 상대가 보였다. 상대는 자신과 엇비슷한 키와 체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석은 헤드기어 틈새로 보이는 상대와 눈을 마주쳤다. 상대방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긴장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우석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상상 속의 괴물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순간 경기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우석은 링 가운데로 다가와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상대와 서로 글러브를 맞댔다. 둘은 서로 자세를 잡았고, 우석은 먼저 주먹을 날렸다. 이길 거라는 자신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석은 이전처럼 맞고만 있지는 않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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