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 털 한 올

by 지누

"절대 안 돼."

지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왜 안되는 건데?"

하린의 물음에 지한은 말없이 앞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의 오른쪽 눈썹 위로 일자 모양의 상처가 나있었다. 그건 그가 어릴 적에 고양이한테 다쳤던 상처다.

"제발 한 번만 부탁할게! 잠깐 여행 다녀올 동안만 봐주면 돼!"

하린은 정수리를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온순한 성격이라…. 너랑도 잘 맞을 거야!"

지한은 하린이 말끝을 흐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건 그녀가 거짓말을 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차라리 부모님한테 맡겨."

"그건 안 돼."

"왜?"

"부모님이 동물을 별로 안 좋아하셔…."

하린은 또 말끝을 흐렸다. 지한은 아마 그녀의 부모님은 하린이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부탁할 다른 사람이 너 말고는 없단 말야."

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자신의 마음이 약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자신이 하린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여행 언제 가는데?"




며칠 후 하린은 고양이가 담긴 이동장을 들고 지한의 집을 찾아왔다. 이동장 외에도 그녀는 고양이 물품으로 가득한 상자도 하나 같이 들고 왔다. 지한은 어떻게 이 많은 짐을 그녀가 혼자 들고 왔는지가 의문이었다.


"둘이 인사해야지."

하린이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지한은 이동장 안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고양이는 지한과 눈을 마주치자 하악질을 했다.


"얘 MBTI가 I라서 그래."

"고양이도 MBTI가 있어?"

지한은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망고야…. 엄마 금방 다녀올 테니까 너무 많이 울면 안 돼."

하린이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동장 안을 향해 말했다.

"이름이 왜 망고야?"

"얘 털색이 망고색이잖아?"

그런 간단한 논리였냐고.


하린이 눈물겨운 이별을 마치고 사라지자 집에는 지한과 망고 둘만이 남게 됐다. 이동장문은 열려 있었지만, 망고는 도통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화가 났는지 등을 돌린 채 이동장 안에 틀어박혀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동장 앞에 하린이 주고 간 사료와 물을 놔두고 망고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평소라면 카페에 가서 글을 쓰고 있을 시간이지만, 이 예측 불가능한 생명체를 집에 혼자 두고 나갈 수는 없었다.


"너 알아서 해라."

지한은 이동장을 뒤로 한 채 책상에 앉아 할 일을 했다. 하린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맡게 됐지만, 자신의 역할을 밥담당 정도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동장 밖으로 나온 망고가 집안을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있었다. 지한은 혹시라도 녀석이 발톱을 들고 자신한테 달려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서둘러 오븐용 장갑을 착용했다. 망고는 지한과 눈을 한 번 마주치더니 부엌 바닥에 놓인 쌀통 안으로 뛰어들어가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망고는 오늘부터 '망할 고양이'의 줄임말이다.




망고를 돌보는 동안 지한은 어쩌면 자신이 고양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고양이가 자신을 조련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망고는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옆을 지나치기만 해도 하악질을 했지만, 막상 필요한 게 있으면 울음소리를 내며 지한을 부르곤 했다. 지한은 망고의 울음소리를 멈추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곧장 망고한테 다가가 원하는 걸 물어봐야 했다.


간혹 정말로 큰 사고를 쳤을 때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지한 앞에 다가와 배를 까고 드러누웠다. 고양이 주제에 미인계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지한은 친구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며 신세한탄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고양이는 원래 그래'라는 말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망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 위에서 낮잠을 자는 걸로 보낸다는 거였다. 가끔씩 잠에서 깨고 지한과 눈을 마주치면, 그는 눈을 피하고는 서둘러 그루밍을 했다. 지한은 그런 모습을 보며 망고와의 생활이 마치 친하지 않은 두 형제가 같이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하린은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풀숲에서 혼자 울고 있는 망고를 처음 발견했다고 했다. 혹시라도 울음소리를 듣고 주변에서 어미가 돌아오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어미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린은 그대로 망고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 결국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게 됐다고 했다.


지한은 창밖을 내다보는 망고를 보며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망고는 곧바로 하악질을 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그 모습에 지한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하린이 귀국하는 날이 다가왔다.


지한이 망고의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상자를 가져와 바닥에 놔두자 망고가 그 안에 쏙 들어갔다. 간신히 녀석을 밖으로 빼낸 다음, 지한은 곳곳에 흩어졌던 망고의 물건들을 하나씩 넣어뒀다. 망고는 침대 한 가운데에 앉아 지한이 물건을 정리하는 걸 조용히 지켜봤다.


"이제 곧 돌아갈 시간이야."

지한이 말했다. 망고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야옹."


망고가 갑자기 지한에게 다가오더니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듯이 지한의 다리를 살살 긁었다. 지한이 자세를 낮추고 앉자, 망고는 그의 무릎 위로 살포시 올라와 앉았다. 늘 자신만 보면 하악질을 하던 녀석이 이렇게 먼저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지한은 조심스럽게 망고의 등에 손을 올렸다. 녀석의 털은 몹시 부드러웠다. 지한이 망고의 등을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어색하게 쓰다듬자 망고가 골골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지한은 옛날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하늘에서 비가 몹시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편의점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한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차장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 고양이는 비에 홀딱 젖은 상태였고, 많이 지쳐보였다. 평소라면 지나쳤겠지만, 볼록 튀어나온 배를 보자 지한은 고양이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한이 참치캔을 하나 따서 그의 앞에 내려놓자 고양이는 천천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후, 녀석은 감사의 인사로 지한에게 다가와 몸을 부비적거리며 골골거렸다. 그리고 이내 체력을 다 회복했는지 다시 거리로 홀연히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고양이도 망고처럼 주황 빛깔 털을 가지고 있었다.




여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하린은 망고를 부모님에게 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한이 망고를 돌보는 동안 하린도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처럼 보였다.


"고양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은데 맡아줘서 고마워."

하린이 말했다. 이번에 말을 흐리지 않았다.

"성격이 온순해서 생각보다 나랑 잘 맞더라."

지한은 망고가 들어있는 이동장을 하린한테 건넸다.


지한은 망고한테 별다른 작별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대신에 이동장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녀석도 이제는 하악질을 하지 않았다.


돌아온 집은 몹시 한적했다. 잠시나마 이 공간에 자신 말고 다른 생명체가 있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한은 의자에 앉아 침대 쪽을 바라봤다. 침대 위에서 늘 잠을 자던 망고가 떠올렸다.


'거기서는 잘 지내라.'

지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랜만에 카페에 가서 글을 쓸 계획이었다.


그때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망고가 남기고 간 주황색 털 한 가닥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청소를 했는데도 망고의 흔적은 여전히 이 집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 한동안은 그런 흔적들이 계속 나올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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