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곳에 뼈를 묻겠습니다!

카페 레트랑제

by 지누

1


안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 그녀는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아 자신이 새롭게 쓴 이야기를 신중하게 살펴봤다. 워낙 급하게 썼던 터라 비문도 많았고, 다듬는 작업도 많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새로 쓴 이야기는 확실히 재밌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기분이었다.


"그 카페를 다시 찾아야 해!"


안나는 전날의 기억을 되살리며 카페가 있던 골목을 다시 들어갔다. 하지만 길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안나는 자신이 길을 착각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지도앱에 들어가 동네에 위치한 모든 카페를 찾아 하나씩 돌아다녀 봤다. 열 곳은 넘게 가봤지만 전날에 그녀가 갔던 곳과 일치하는 카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좌절에 잠겨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던 순간 안나의 귓가에 낯익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먀 - 아!"


삼색 고양이가 한 마리가 풀숲 사이에서 나타나 그녀한테 다가왔다. 고양이는 안나를 보고는 반갑다며 기지개를 폈다.


"삼색아! 너 진짜였구나!"


삼색이는 안나한테 다가와 전날처럼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안나는 미리 준비해둔 츄르를 주머니에서 꺼내 삼색이한테 내밀었다. 어제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삼색이는 옴뇸뇸 소리를 내며 안나가 준 츄르를 맛있게 먹었다.


"그 카페에 나를 다시 데려다줄 수 있을까?"


안나의 부탁을 이해했는지 삼색이는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안나는 삼색이의 뒤를 서둘러 쫓아갔다. 삼색이는 오르막길 아래까지 내려온 다음 천변을 따라 걸어갔다. 전날에 들어갔던 골목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안나의 물음에도 삼색이는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그들은 커다란 공사용 천막으로 막혀있는 곳에 도달했다. 천막 한가운데에는 '공사 중'이라는 글자가 경고문처럼 크게 적혀있었다. 삼색이는 천막 아래에 난 좁은 개구멍으로 들어갔다.


"여기로 들어가라고?"


안나는 주변을 살피고는 재빠르게 개구멍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2


천막 안의 세상은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건물들은 대부분 창문이 깨진 상태였고, 문은 전부 뜯긴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곳곳에 빨간색 페인트로 X 표시가 되어있었고 바닥에는 콘크리트의 잔해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동네 전체가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느껴졌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너무나도 낯설게 다가왔다.


"먀!"


언덕길 위에서 삼색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빠르게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자 넓은 공터가 같은 곳이 나왔다. 공터 한 가운데에는 작은 집처럼 생긴 건물이 있었다. 안나는 그 건물이 자신이 어제 방문했던 카페였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안나는 하얀 머리의 남자를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는 카운터 뒤에서 커피잔들을 천으로 닦고 있었다. 삼색이는 남자한테 다가가 인사를 건네듯이 머리를 부딪혔다.


"또 오셨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안나는 남자를 보자 무수히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당신 정체가 뭐야?'

'내가 어제 마신 커피에 무슨 약을 탄 거야?'

'이 카페는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안나가 생각을 정리하고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으실 건가요?"


남자가 의미심장한 물음에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3


남자는 카운터에 놓인 유리병을 하나 집어 들고 안나에게 건넸다. 유리병은 비어있었고 겉에는 '뤼미에르'라고 적혀있었다.


"100년도 더 된 이야기예요. 그때 젊은 마법사가 한 명 있었어요. 여느 마법사들처럼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대한 마법을 만들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었죠. 그는 '부름'이란 걸 쫓고 있었어요. 마법사한테 살면서 딱 한 번 일어난다는 일종의 계시 같은 거죠."


남자는 안나로부터 병을 돌려받고 말을 이었다.


"어느 하루 그 마법사는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지하 카페를 방문했어요. 그는 그날 벽에서 기차가 튀어나오는 걸 목격했죠. 그건 오늘날 사람들이 '영화'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었아요. 그걸 본 마법사는 자신이 그날 보고 느꼈던 것을 토대로 마법을 만들었죠. 그 마법은 사람 안에 잠재된 영감을 개화시키는 마법이었어요. 어제 손님이 마신 커피에는 그 마법이 담겨있었어요."

"그 말은... 당신도 마법사라는 말인가요?"

"네."


안나는 남자한테 돌려준 유리병을 가리켰다.


"그 커피 한 잔만 더 만들어 주세요. 그럼 정말로 믿을게요."

"죄송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어려워요. 보시다시피 그 원두는 어제 손님이 마신 게 마지막이었어요. 파리에 심어둔 커피 나무가 있지만 열매가 익을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요. 더 큰 이유는 마법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 같은 게 아니에요. 오히려 양날의 검에 가깝죠. 잘못 사용하거나 너무 많이 사용하면 돌이키기 힘든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어요."


남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어제 저한테 그 커피는 왜 주신 거죠?"

"그야 손님이 저를 찾아왔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저는 그 커피가 더 필요해요. 저한테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안나의 단호한 목소리에 남자는 잠시 고민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때 삼색이가 남자의 옆으로 다가와 배를 까고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보며 남자는 피식 웃었다.


"이것도 '당신'이 원하는 건가..."


이내 그는 무언가를 결정을 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제와 같은 커피를 드리는 건 당장은 어려워요. 다른 원두가 있긴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이미 한 번 마법에 걸린 사람한테 또 마법을 거는 건 부작용 때문에 너무 위험해요.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뭐든 좋아요."

"일반인이라도 마법에 자주 노출되면 그에 대한 적응력을 자연스럽게 높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손님만 괜찮다면 저희 가게에서 일해보는 건 어떨까요? 여긴 작은 카페라 일손이 많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저도 가게를 비울 일이 생기면 맡길 사람이 필요해서요."


안나는 더 물어볼 것도 없이 바로 90도로 몸을 숙이며 소리쳤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이곳에 뼈를 묻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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