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레트랑제
1
달이 하늘 높이 뜨고 자정이 점점 가까워지는 시간. 안나는 출근 준비에 들어갔다. 어느덧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도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생활습관은 원래 사람보다는 올빼미에 가까웠던 터라 낮밤이 바뀌는 건 그녀한테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게다가 출근 자체도 의외로 간단했다. 11시가 넘어가면 문 앞에서 삼색이의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카페로 이어지는 문이 준비됐다는 뜻이었다. 안나는 문만 열면 바로 카페로 출근할 수 있었다.
"먀!"
안나가 문을 열자 삼색이가 기지개를 피며 그녀를 반겼다.
"삼색아 잘 지냈어?"
안나는 카페에서 청소와 설거지를 담당했다. 창고에 있는 자재 관리도 포함이었지만 그곳에 들어갈 일은 거의 없었다. 삼색이를 돌봐주는 것도 안나의 업무에 포함됐지만 그녀는 그걸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백사장은 안나한테 커피를 만드는 법도 알려줬다. 커피를 만드는 건 사장님의 역할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혹시 몰라 남는 시간에 틈틈이 일반 원두로 연습을 했다.
안나는 유리병에 담긴 원두에 각각 어떤 마법이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안나가 마셨던 '뤼미에르'는 사람 안에 잠재된 영감을 개화시켜주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없는 영감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영감이 메마른 사람한테는 그저 캐러멀향이 나는 커피에 불과했다. 프랑스로 떠나는 손님한테 처음 건넸던 '로마니'는 마신 사람의 미래를 보여주는 원두였지만 항상 좋은 미래를 보여주는 건 아니었다. 안나는 자신이 그때 그 커피를 마시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자신의 미래가 상상하던 것과 다르거나 비극적이라면 안나는 마음이 꺽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사장님은 아직 안 왔니?"
안나가 삼색이한테 물었다. 삼색이는 그녀의 품에서 그저 골골송을 부를 뿐이었다. 백사장은 대부분 경우 카페가 오픈되는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그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 지 안나는 잘 알지 못했지만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에서 사장님의 늦은 출근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이건 좀 채워야겠네..."
유리병들 사이에서 거의 비어진 병을 하나 발견했다. 부족한 원두는 창고 서랍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창고에는 카운터에 놓인 것보다 훨씬 다양한 원두들이 있었다. 안나는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들이 더 많은 상태였다.
백사장의 말에 따르면 그는 세계 곳곳에 커피 나무를 심어뒀다고 했다. 열매에 마법이 새겨지기 위해서는 해당 마법이 기원된 곳에서 오랫동안 기운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간혹 지나가다 마주친 다른 마법사와 원두를 교환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찾았다!"
안나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서랍장을 열고 안에 있는 원두를 유리병에 담았다.
일을 마치고 창고를 나오려던 순간 안나는 창고 벽에서 낯선 기운을 느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 비어있는 벽에 손을 대자 숨겨진 문이 나타났다. 마법으로 숨겨진 문이었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문 너머로부터 안나는 알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 그녀가 문을 열자 지하로 향하는 원형 계단이 나타났다.
2
체감상으로는 아파트 하나를 꼭대기층에서부터 내려온 기분이었다. 지하의 끝에 도착하자 멀리서 입구가 보였다. 입구로 들어서자 안나는 드넓은 정원을 발견했다. 지하였음에도 그곳은 해가 떠있는 것처럼 하늘이 쨍쨍했고 무수히 많은 꽃들과 나무들이 있었다. 곳곳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벌과 나무들이 꽃가루를 옮기고 있었다.
"여긴 대체..."
정원 안으로 걸어가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중앙에 세워져있는 걸 발견했다. 안나는 살면서 이렇게 크고 울창한 나무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무 주변에 여러 줄기의 빛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안나는 그 빛줄기들이 전부 마법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같은 공간 안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자신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안나는 나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나무에 담겨있던 기운들이 손을 타고 조금씩 그녀에게 흘러들어왔다.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감정들이 공존했다. 기쁨, 슬픔, 분노, 역겨움, 불안, 우울, 공허, 행복, 성취, 질투, 수치, 후회, 연민, 설렘, 안도, 외로움, 그리움, 사랑, 경외. 지금까지 이 카페를 방문했던 모든 손님들이 남기고 간 감정들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의 끝에는 한 사람이 서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그 사람의 정체를 보려던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고 나무에서 살포시 떼어냈다.
백사장이었다.
"사장님?"
"함부로 만지면 위험할 수 있어요."
"이 나무는 뭐예요?"
"이건 제 마법이에요. 아직 미완성이지만요."
안나는 모든 마법사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대한 마법을 만드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던 걸 떠올렸다. 안나가 더 질문을 던지기 전에 백사장이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죠. 곧 손님 올 시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