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레트랑제
1
"외통수다!"
춘섭이 왕 앞에 차를 두며 소리쳤다.
"니는 나의 상대가 안 돼."
병길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를 한 장 꺼내 건넸다.
"너랑은 더러워서 더 안 해."
"장기 어려우면 바둑으로 해도 뎌. 바둑은 네가 나보다 쬐외외에에에끔 더 잘하잖아?"
그때 문이 열리며 사진관 안으로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잠만 기다려봐."
춘섭이 카운터로 나가자 늙은 여자 손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어서오세요. 뭐 도와드릴까요?"
"저... 사진 한 장만 찍을 수 있을까 해서요."
여자가 조심스레 말했다.
"물론이죠. 뭣땜시 필요한데요?"
"그냥 개인 소장용으로 쓰려고요..."
여자 손님은 말끝을 흐리며 들고 있던 가방의 손잡이를 꼭 잡았다. 춘섭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리 가게는 영정 사진 안 찍응께 다른 곳 가셔유."
"이 동네에 사진관은 여기 한 곳 밖에 없는데 제가 언제 옆동네까지 가요... 그냥 한 번만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안 찍는 다니깐! 어서 나가쇼!"
여자 손님은 결국 한숨을 푹 쉬고는 사진관을 나갔다. 춘섭은 곧바로 가게 뒷쪽으로 들어가 소금을 꺼내왔다.
"뭘 그렇게까지 해?"
병길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춘섭은 문을 향해 소금을 한 움큼 뿌렸다.
"저 놈의 고집하고는..."
병길은 옆에 놔둔 모자와 겉옷을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가게? 더 둬야지?"
"오늘 갈 곳이 있어가지고... 내일 또 올게."
"그려. 조심히 가고."
2
"또 외통수다!"
춘섭이 소리내어 깔깔 웃으며 병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휴... 병길이 이 모자란 놈아! 니는 내 상대가 안 된다니까. 가서 공부 좀 더 하고 와 임마."
병길은 콧웃음을 한 번 치고는 천 원 짜리 한 장을 꺼내 춘섭에게 건넸다.
"야 우리 한 판만 더 할래?"
"됐어. 니한테는 이제 더 뜯어먹을 돈도 없다."
"이번에 네가 이기면 내가 만 원 줄게."
춘섭이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니 진심이냐?"
"대신에 내가 이기면 나 소원 하나만 들어주라."
소원이라는 말에 춘섭은 고개를 돌렸다.
"에이 안 해! 불안하게시리..."
"그럼 오만 원."
병길은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를 한 장을 꺼내 장기판 위에 올려뒀다. 노란 빛깔의 지폐를 보자 춘섭은 입맛을 다셨다.
"바둑으로?"
"아니. 장기로."
"네가 고른 거다. 나중에 무르기 없기다?"
병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기말들을 다시 판 위에 깔기 시작했다.
둘의 경기는 침묵 속에 진행이 됐다. 평소 같았으면 수를 둘 때마다 서로 고성이 오갔을 텐데 워낙 큰 돈이 걸려있어서 그런지 서로 주고받는 말이 일절 없었다. 무엇보다 춘섭은 수를 둘 때마다 병길의 눈빛이 신경 쓰였다. 지금 그의 앞에는 평생을 봐온 친구가 아닌 처음보는 낯선 사람이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그 낯선 분위기에 휩쓸려 춘섭은 결국 평소라면 두지 않을 수를 두고 말았다.
"외통수야. 드디어 한 번 이겨보네."
병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소원 들어주는 거다?"
"지금까지 딴 돈 돌려주라 그런 건 안 된다. 이미 다 써불었으니까..."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춘섭은 입이 댓발 나왔다.
"내가 돈 때문에 그런 것 같냐?"
병길은 춘섭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입을 땠다.
"나 영정 사진 좀 찍어주라."
춘섭은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네 방금 뭐라했냐?"
"나 영정 사진 좀 찍어주라고."
"니는 나 모르냐? 어제 그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을..."
"나 어제 병원 다녀왔어 임마. 의사가 나보고 폐암이란다. 말기."
병길이 더 이상의 설명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 말을 마쳤다. 그 말에 춘섭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병길은 너무나도 초연해보였다.
"얼마나 남았다는데?"
"몰라. 한 반 년인가... 그것도 오래 본다고 한다더라."
그 말을 듣자 춘섭은 안에서 터져 나오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장기판을 엎어버렸다. 장기알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야 이 썩을 놈아. 내가 니 담배 좀 그만 피라고 그렇게 말을 했지! 왜 말을 안 들어! 말을!"
병길은 바닥에 떨어진 장기알을 하나씩 주워 책상 위에 올려뒀다.
"자식놈들은?"
"말 안 했어."
"왜 말을 안 해?"
"내가 말하면 뭐라할지 뻔히 아는데 내가 어케 하냐? 나는 걍 남은 시간 보내다 조용히 가련다."
춘섭이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 나가! 당장 나가!"
병길은 겉옷과 모자를 챙기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미안하다. 내일 다시 올게."
"그냥 오지마. 이 썩어문드러먹을 자식아! 소원이고 뭐고 나발이고 말할 때부터 내가 알아봤어.”"
병길이 사진관을 나오자 춘섭은 문을 잠궈버리고는 안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소금을 한 움큼 쥐고는 문에 뿌리려던 찰나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소금통을 그대로 바닥에 집어던져버렸다.
3
이른 새벽이었다. 잠에서 깬 춘섭은 침대를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부인과 사별한 후에 그는 사진관 2층을 자신의 주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보리차를 마시고 그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병길과 매일 장기를 두던 자리였다. 춘섭은 옆 선반으로 손을 뻗어 졸업 앨범을 하나 꺼냈다. 앨범 겉에는 '애월고등학교 1기'라고 적혀있었다.
먼지가 묻은 앨범을 열자 소년 시절의 자신을 포함해 낯익은 얼굴들이 나왔다. 자신한테도 한때 이렇게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우면서도 신기했다. 마음만큼은 아직도 그 시절의 철없는 소년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손은 이미 주름살로 가득했다.
혼자 바닥이 떨어진 장기알 하나가 춘섭의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서 떨어진 장기알을 주우러 몸을 기울이던 순간 가게 안쪽에서 낯선 빛이 새어나오는 게 보였다. 그는 떨어진 장기알을 주머니에 넣고는 가게 안쪽으로 걸어갔다. 창고로 쓰이는 문을 천천히 열자 안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벌써 내 차롄가?"
춘섭은 콧웃음을 치고는 빛 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