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레트랑제
1
"당신이 저승사자요?"
춘섭이 백사장에게 향해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안나는 옆에서 풉하고 웃었다.
"대충 비슷하긴 하네요. 할아버지 커피 한 잔 타 드릴까요?"
"그럼 다방 커피도 혹시 가능한가?"
"더 맛있게 만들어드릴게요."
안나는 선반에서 설탕과 프림을 꺼내서 가져왔다.
"저승사자가 만들어주는 커피라니 벌써 맛이 기대되구먼."
"아직 이렇게 팔팔하신데 벌써 가시게요?"
"오늘 내일하는 사람들인데 팔팔하기는... 우리한테는 그것도 저주여."
"저주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잖혀. 마지막까지 남아서 친구놈들 가는 거 다 보는 사람이 제일 고생이야. 어렸을 때는 100살까지 살고 싶다고 그렇게 빌었는데... 지금은 그냥 친구놈보다 딱 하루 빨리 죽는 게 내 소원이야. 저승사자 양반 잘 들었제?"
춘섭이 백사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백사장은 얕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없이 원두를 하나 골라 조용히 갈기 시작했다. 안나가 처음 보는 원두였다.
"'바르도'라는 원두에요. 티베트에서만 만들어지는 원두인데 이번에 돌아오는 길에 다른 마법사한테서 받아왔어요."
백사장은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넣고 잘 섞이도록 수저로 저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춘섭은 커피를 한 모금 했다. 커피에서 볶은 보리향이 났다.
2
춘섭은 정자에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의 건너편에는 덕수가 앉아있었다. 그 옆으로 남일, 수영, 진철이 나란히 서서 둘의 경기를 보며 훈수를 두고 있었다.
"춘섭아 어여 저기 둬야지 안 두고 뭐하냐?"
"그냥 답답스런 놈이여."
"너무 뭐라 하지는 마. 춘섭이가 원래 계산이 좀 느렸어."
춘섭은 오래전 헤어졌던 친구들의 모습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건강하게 잘 있었냐? 꿈에라도 찾아가려 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
"야가 밤잠이 너무 없어. 가려고 하면 깨어나불고... 잠 좀 자, 임마!"
"원래 나이 먹으면 그런 겨. 우리도 그랬어."
춘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희들은 다들 괜찮냐?"
"우리야 아주 팔팔하지! 살아있을 때보다 건강혀."
"고럼. 말도 말아. 병원에 있을 때는 그냥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
"지금은 물구나무도 바로 설 수 있어!"
쾌활한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춘섭은 그동안 가슴에 묵혀뒀던 짐 하나가 내려간 느낌이었다. 그때 뒤에 서있던 진철이 물었다.
"야 근데 춘섭아. 왜 병길이 사진을 안 찍어주려고 그러냐."
"무르기 없기로 해놓고 말 바꾸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사내놈이 왜 한 입으로 두 말을 혀?"
그 소리에 춘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니들 때문이잖아!"
춘섭의 외침에 친구들은 모두 동시에 입을 꾹 닫았다.
"니들이 다 먼저 가버렸잖아! 맨날 나한테 찾아와서 지들 영정 사진이나 찍어달라하고. 내가 니들 사진 찍어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니들은 모를 것이여? 너희들은 진짜 나쁜놈들이여. 병길이 그놈도 마찬가지야. 내가 담배 그렇게 피지 말라고 옆에서 그랬는데. 예전 같이 젊지도 않다고. 그놈은 비겁한 놈이야. 먼저 그렇게 가버릴 거라고 말하면 나는 어떡하라고..."
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춘섭아, 우리가 미안하다. 우리들 중에 가장 정이 많은 사람이 너인 거 잘 알아. 그래서 우리가 많이 미안하다. 그래도 우리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너네 오는 거 기다리느라 아직도 안 넘어가고 여기 있는 거야."
그 말에 춘섭은 고개를 돌렸다. 정자 옆으로 커다란 강이 하나 나있었다. 강 위로 사람을 태운 배들이 넘어가는 게 보였다.
"우리 다들 여기서 너랑 병길이 오는 거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리 몫까지 천천히 좋은 구경 많이 하고 와. 우리 보고 싶다고 먼저 와버리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바로 절교야. 알았지?"
춘섭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가 그한테 손수건을 건넸다. 춘섭이 눈물을 닦고는 백사장과 안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부탁이 하나 좀 있는데.”
3
춘섭이 가게 문을 열자 바깥에 병길이 서있었다. 그는 깔끔하게 정장을 입고 서있었다. 그가 가진 옷 중에 가장 좋은 옷이었다.
"어여 들어와. 아픈 몸인데 밖에서 기다리면 안 되지."
"그럼 네가 문을 빨리 열었어야지."
둘은 서로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병길은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봤다.
"여기 보면서 좀 웃어봐. 왜 이렇게 굳어있냐?"
춘섭은 다가가서 병길의 자세를 잡아줬다.
"찍는다."
플래시가 터지며 카메라 셔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잘 나왔어?"
"인물이 워낙 별로라 모르겠네."
"그놈 말하는 것 하고는..."
병길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춘섭이 다시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
"기다려봐."
춘섭은 의자를 들고 병길 옆으로 다가왔다.
"옆으로 좀 가봐 이 썩을 놈아."
둘은 나란히 카메라를 바라보며 앉았다. 그때 가게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나가 나타났다.
"할아버지 이 버튼 누르면 될까요?"
"예쁘게 잘 찍어주소."
"저 아가씨는 누구여?"
"저승사자여."
"뭣이여!"
안나가 버튼에 손가락을 올리고 말했다.
"할아버지들 찍을게요... 김치!"
춘섭과 병길은 사진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