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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표 Oct 01. 2023

우리 역시 괴물이 되어간다

보름달(中)

추석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명절 중 하나이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지만 누군가에게는 피로와 설움이 쌓이는 날이니까.


하하 호호 웃으며 가족의 정을 나누는 행복한 날, 근데 왜 너와 나는 이 사소한 행복 하나 누리지 못하는 걸까? 엄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제사 음식들은 바닥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남자가 있다. 아빠다. 이 모든 일들의 원흉.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욕을 내뱉어야 직성이 풀리는 꼬인 성격의 대명사.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땀을 뚝뚝 흘리며 음식을 준비하는 그녀가 시끄럽다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던지며 화를 퍼붓는 인간. 리모컨에 맞아 이마가 찢어진 그녀를 보고도 행동이 굼떠서 피하지도 못하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 결국 자기 화에 못 이겨 제멋대로 음식을 던져버리는 독재자. 피가 뚝뚝 흐르는 이마를 짚으며 잘못을 지적하는 아내를 무참히 밟아버리는 폭력적인 쓰레기.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들이 어느새부턴가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분했다. 아무리 몸을 던져 엄마를 안아도 내 작은 몸으로는 그녀를 지킬 수 없다는 것도 슬펐다. 자식이고 뭐고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그에게 뜯긴 머리카락이 아려왔다. 손가락도, 팔도, 다리도 어디 하나 성하지 않았다. 비키지 않으면 너도 맞는다는 말을 무시한 결과였다.


제 풀에 지친 남자의 눈꺼풀이 느릿느릿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맨 정신이었다면 그의 위협이 더 오래도록 지속되었을 테니. 잠의 수렁에 빠져들면서도 그는 쉴 새 없이 욕설을 했다. 잠꼬대마저 그다웠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비속어에 귀가 썩을 것만 같던 나는 조심히 눈치를 보다 힘없이 누워 있는 엄마의 제발 방으로 들어가라는 처연한 손짓을 발견했다. 늘 그랬듯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동생과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도망쳐 몸을 숨겼지만 이 2평 남짓한 방도 결코 우리의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이따금씩 들리는 비속어가 섞인 잠꼬대는 닫힌 문틈 너머로 선명히 들려왔고, 언젠가는 그가 깰 것이 분명했으므로.


불안함과 긴장감. 365일 24시간을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쭈뼛쭈뼛 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우리 처지를 완벽히 설명해 주는 단어. 과연 이보다 우리 가족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일방적인 폭력극에 오들오들 떨던 이 작은 아이를 착잡한 마음으로 안고 토닥였다. 오늘 하루는 유난히 길었으며, 시간이 잘 가지 않는 듯하다. 여전히 창밖의 밤하늘은 모든 걸 집어삼킬 만큼 캄캄하다. 그러나 자신의 날이라는 듯 유난히 밝게 빛나는 달빛은 모든 걸 가린 빌딩 숲 사이에서도 실낱같은 빛 한 줄기를 창을 타고, 공기를 타고 우리에게로 선물했다. 한밤중에 비추는 보름달은 이토록이나 선명한데, 보름달 같은 기운을 뽐내던 너의 얼굴은 왜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기만 하는 건지.


참담한 마음으로 숨죽이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인지 못한 새 흐른 시간 속에서 어느새 남자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고, 야트막하게 들려오는 너의 울음소리만 남았다. 네가 우니 나도 울고 싶어졌다.


-있잖아.

-응..?

-어쩌면 너와 나는 전생에 아주 나쁜 짓을 저질렀을지도 몰라. 그래서 지금 우리가 벌을 받고 있는 거지.

-...

-근데...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다. 그게 덜 슬플 것 같아. 적어도 이유는 있는 거잖아.


식물을 키울 때 넘어지지 않고 무럭무럭 성장하라고 버팀목으로 지지해 준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었다. 버팀목이라는 존재가 옆에 있기에 씨앗에서 시작하는 작은 생명체는 결실을 맺는 고귀한 자연의 섭리를 무사히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인간세상에서도 부모님, 특히 아빠가 그런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는데,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다.


그게 바로 너와 나의 아빠이고.






메말라 썩어가는 뿌리끼리 엉켜있으면 서로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도 함께 죽어간다. 우리 가족이 그렇다. 한 사람으로부터 촉발된 긴장감은 종국엔 서로를 압박해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사소한 자극에도 쉽게 반응해 더 큰 자극을 불러올 만큼 여유를 잃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너와 내가 자라나는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울었고, 싸웠고, 다쳤고, 이렇게 멀어졌다.


가장 중요한 입시를 준비했던 당시, 남자에게서는 배려 하나 기대하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 구성원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과 고요함은 나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한창 예민한 시기였던 나에게 집은 한 없는 고통만이 남아있는 지옥이었다. 어느 대학에 합격하든 상관없었다. 최대한 멀리,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결국 버스로만 8시간이 걸리는 지역에 위치한 대학에 합격한 나는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한참 들떠있었다. 나를 비참하게만 하는 가족을 간절히 떠나고 싶었으니까. 우리 가족에게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다. 평생 안 볼 수는 없었다. 본인의 인생을 우리를 위해 던진 엄마를 볼 때면 마음 약한 나는 동정심을 한없이 느꼈고, 아직 동생이 남아있단 사실에 그토록 애틋해마지 않던 과거의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왔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깊게 고려할 시간은 없었다. 우선은 떠나야 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상경을 앞두고 남자의 온갖 히스테리가 엄마 다음으로 나에게 옮겨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은 그나마 막내라고 이뻐해 줬으니까, 잘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생긴 우리 사이의 거리가 너를 크게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멋대로 단정했다. 그러나 나의 착각이었나 보다. 두고 온 빈자리를 보며 네가 그토록 깊은 상실감에 빠졌을 줄이야.


집에 찾아가지 않은 이유를 말하려면 하루도 모자란다. 남자는 성인이 되어서도 나를 자기 맘대로 주무르려고 했고, 동기들과 함께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짜고짜 전화해서는 욕을 퍼부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동기들의 따뜻함이 한가득 서려있는 집안 분위기가 미치도록 부러워서 내 거지 같은 상황이 더 실감 났으므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나 가기 싫은 집이었는데, 이따금씩 달이 차오를 때면 둥그런 네가 떠올랐다. 그 어느 새벽날 한 가닥의 빛에 기대 서로에게 의지했던 날들이 기억나서일까? 느닷없이 들이닥친 그리움에 무작정 집에 갔다. 하지만 그 아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를 핑계로 완전히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간 내 상처를 보듬느라 살피지 못했던 너의 마음이 그렇게나 썩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그렇게 우리 집을 전염시켜 나갔다.


더 이상 남자만이 괴물이 아니었다. 비이성적인 집안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온 우리 역시 또다른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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