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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표 Oct 02. 2023

너도 아빠랑 똑같아

보름달(下)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주위를 희미하게 감돌던 공기의 밀도는 옅어져 갔고, 그 사이로 샛바람이 들어 새로운 자리를 텄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날들이었다. 24시간 긴장감의 연속이던 삶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난생처음 맛보는 자유에 감격한 것도 잠시 이마저도 금세 익숙해졌다. 가끔씩 걸려오는 전화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긴 해도, 거리감이 주는 안도감에 '안정'이라는 단어가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일상의 문을 두드렸다.


동생마저 떠나간 빈 둥지에는 아군 없이 엄마만이 홀로 남았다. 그녀가 걱정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적진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그녀가 걱정되어 무거운 발걸음을 아주 가끔씩 집으로 옮길 뿐.


남자는 그대로였다. 조금만 속이 상해도 속된 말들을 내뱉어버리는 솥뚜껑 같은 성질머리는. 가뭄에 콩 나듯이 보여주던 다정한 면모들도 분명 있었지만 언제 마주할 수 있을지 감히 예상할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그저 집에 잘 들르지 않는다며 여러 차례 손찌검하며 욕을 퍼붓는 그는, 언제나 그 다운 모습으로 환영을 해주었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손에 힘이 들지 않는지 약해지는 그 강도가 참으로 우스웠다.


너는 집을 찾지 않았다. 이유는 필요 없다. 그 마음이 이해 갔다. 나 또한 그랬으므로. 멍청하게도 부질없는 동정심에 직접 무덤으로 걸어가는 실수를 범하긴 했지만.


시간은 사람을 무디게 만든다. 끝끝내 나를 무시하며 집을 떠난 너도 시간이 흐르며, 그리고 나이를 먹으며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전화가 오는 횟수가 잦아졌다. 연락을 이어가며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전문대를 졸업해 남들보다 일찍 취업한 네가 아빠의 등쌀에 못 이겨 힘들게 번 돈을 반 넘게 꼬박꼬박 주고 있었다는 것. 불같은 성질에 네가 집에 찾아오지 않는 것에 화내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왜 몰랐을까. 불평불만을 해도 욕은 하지 않던 그. 그래서 그랬던 거였구나.


참 징글징글하다. 화가 난다. 자식의 울타리는 되어주지 못해도 해충처럼 피해 주지는 말아야지. 그래 말 그대로 해충 같은 존재였다. 화가 거기서 멈추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아빠를 욕하고 미워하면서도 바보같이 돈을 갖다 바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아빠에게 연락하는 네가 바보 같았다.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이 모든 상황이 답답해 소리를 질렀다. 웃겼다. 나조차도 모순적인 주제에 누가 누구에게 소리를 지르는지. 왠지 모르게 나를 보는 듯해 속마음과 다르게 생각 없이 터져 나온 뾰족한 말들은 소리 없는 총성이 되어 너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도대체 너와 나는 이 나이 먹어서도 왜 과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아직도 어린 날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조아리는 우리는 한심한 겁쟁이다. 너와 나는 바보다. 멍청이다. 실은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 듯하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인 그 순간부터 또다시 서로에게 죄를 짓고 있음이 분명하니까.


안타까움과 애증이 섞인 그날의 말들. 비수가 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냈던 그날, 연락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어느 깊은 밤 엄마에게서 너와 연락이 닿느냐며 다급한 전화가 왔다. 막 잠에서 깨어 정신이 없던 나는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가지 않았다. "-남자친구한테서.... 돈을 못 갚았다는데... &&전화해서...@$#" 머리가 띵했다. 도저히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여기며 지내왔다. 집을 떠날 때 당신처럼 살지 않을 거라며 원망의 화살을 엄마에게 돌리고 나갔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집을 떠난 새 네가 그토록 싫어해 마지않던 아빠의 모습으로 일탈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이모를 통해 들었던 터라 더 이상 너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연약하게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미운 너 따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야심한 밤, 동생의 전 남자친구라고 불리는 어떤 이가 아빠와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지인이 아프다고 해서 동생에게 500만 원을 빌려줬는데 지금까지 갚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아빠조차 놀래 네가 일하고 있다는 곳으로 갈 채비를 한다고 했다. 나 역시도 겹지인들에게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며 너의 최근 근황에 대해서 수소문했다. 그 결과 알게 된 건 3년 사귄 남자친구가 동생과 싸운 후 그동안 주었던 선물들과 차로 태워줬던 기름값을 어떻게든 받아내기 위해 거짓말로 연락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너는 남자친구가 설마 진짜 연락하겠어라는 마음으로 홧김에 부모님 연락처를 주었고.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보란 듯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건너 건너 지인을 통해 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은 익히 들었던 차였다. 남자라면 학을 떼던 너였기에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먹먹했다. 마냥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네가 혼자서 훌쩍 어른이 되려고 하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멀리서 축하해주지는 못할 망정 이 무슨 못된 생각인지. 어릴 때 그 고약한 심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려고 했다. 그것도 잠시, 이름 모를 누군가가 너에게 주는 안정감과 행복을 가족이자 단짝친구였던 내가 주지 못했다는 현실이 야속했다. 절망스러운 마음이 낳은 상념에 사로잡히길 여러 밤, 오랜 날을 괴로워했다.


그랬던 나였는데 차라리 마음껏 힘들어할 수 있게 끝까지 행복하지 그랬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가 찼다. 알아서 살 테니, 내 인생에 신경 끄라던 네가 보여주는 결과가 겨우 이딴 식이라니. 아무리 우리 가족이 밉고 모든 게 엉망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감히 부모님의 연락을 넘긴 건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존재하겠느냐마는 너의 무지함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요즘같이 무서운 세상에 혹시나 너에게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는 아빠와 엄마의 말에 울분을 종잇장처럼 꾸기고 꾸겨 저 밑바닥에 잠시 떨어트려놓았다.


우리 가족이 똘똘 뭉쳐 누군가를 향한 한없는 걱정으로 한 마음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른 날 새벽 고속터미널에서 내려 착잡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저 멀리서 오랜만에 보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퉁퉁 부어 실핏줄이 터진 눈, 그리고 새빨개진 코. 얼마나 울었는지 너무 추워 잠시 옮겨 타는 아빠 차 조수석에는 엄마가 만들어낸 하얀 휴지꽃이 바닥에 만발해 있었다.


아빠는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중간중간 걱정과 화난 감정이 서린 낯빛을 숨기지는 못하였다. 그는 당뇨병으로 날이 갈수록 말라갔고, 힘이 쇠약해져 갔다. 아파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가여워 보이기는커녕 그동안 본인의 행동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어지러운지 운전대를 잡지도 못하고 손을 덜덜 떨며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심장의 덜컹거림이 가슴을 여러 번 쳤다. 심장이 망가졌다. 내가 망가졌다.


이대로 같이 갔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 택시를 불러 엄마에게 부탁해 차는 나중에 대리 부르면 되고, 이 일은 내가 해결할 테니 아빠부터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했다. 시간이 늦을까 봐 나 또한 급하게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가 표를 끊고 기찻길에 몸을 실었다.


너에게 가는 길. 기차 안은 고요했다. 차창 너머 아침 해가 눈을 뜨려는지 가는 빛줄기를 하나씩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너는 내가 찾아올까 봐 쪽팔렸는지 오랜 시간을 달려온 나에게 여기까지 왜 왔냐며 반갑지 않은 말과 함께 마중을 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이 마치 술 취한 지난날의 아빠를 연상케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한 채 남자친구와는 잘 풀었다고 신경 쓰지 말라는 말만 무한 반복하며, 무례한 그 남자를 방어해주고 있는 너의 모습이 한심했다. 더 이상 참았다가는 울화통이 터져 죽겠다 싶어 온 힘을 실어 너의 뺨을 때렸다. 제발 정신 차리라는 말과 함께.


-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그것밖에 없니?

- 뭔 상관이야,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알아서 해결해

- 그래서 엄마 아빠 전화번호도 주고, 돈 달라는 문자를 받게 만들었어?

- 어쩌라고, 아, 신경 쓰지 말라고!


우리의 대화는 겉돌았다. 암담했다. 눈앞의 네가 정말 싫었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어린 날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주며 씩씩하게 버티던 너와 나는 사라졌다. 마냥 너를 탓할 수도 없었다. 이 지경까지 우리를 떠민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 그리고 우리 스스로였으니까. 챗바퀴처럼 돌던 대화 그리고 지금 이 상황,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모습에서 그토록 싫어해마지 않던 아빠의 모습을 상대방을 통해 그리고 나 자신을 통해 보았다. 결국 경쟁하듯 내뱉은  "너도 아빠랑 똑같아"라는 말은 서로에게 큰 상처가 되어 이 대화를 끝냄과 동시에 너와 내 사이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포근한 햇빛이 떠올라 짙은 녹음이 빨갛게 무르익으려 하던 그 아침,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우리는 질긴 관계를 서툴게 끊어내었다. 더 이상 너를 볼 이유가 없었다. 해결된 것은 뭣도 없었지만 냉정하게 뒤돌아 황급히 돌아가는 기차표를 끊었고, 확 식어버린 심장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일 없다는 듯 평이한 삶을 이어나갔지만 애써 장착하고 있던 가면도 얼마 가지 못했다. 뒤늦게야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서로의 단단한 울타리라 여겼건만, 실상은 반쯤 땅에 묻힌 부위가 썩어 간신히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쓸모없는 울타리였다. 몇 십 년간 켜켜이 쌓여있던 복잡한 감정에 눈이 멀어 함께 추락하면서도 기어코 상처를 주었다.


낡고 녹슬었다 굳게 믿었던 지난날 우리에 대한 감정이 다시 살아나 큰 파도가 되어 사방을 덮쳐왔다. 수많은 쉼표만이 존재하던 우리의 관계 속에서 빛바래지 않은 애틋함이 누구도 돌보지 않던 그 어린 날, 우리들의 몸을 숨겼던 작은 방 한 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었나 보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지나간 시간들 속에 조용히 말이다.


난 그 아이가 여전히 참 밉다. 미운만큼 그립다. 일이 늦게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오늘같이 늦은 새벽, 길에서 우연히 만난 반쪽짜리 달 하나에도 그 아이가 생각날 만큼.


시야가 점점 흐려진다. 급히 얼굴을 치켜들었다. 부릅뜬 눈에 비친 반달이 춤추듯 일렁거린다. 너울거리는 시야 너머로 또 다른 반달이 밤하늘 속 우직하게 본인의 존재를 흐리게 드러내고 있다. 어느새 두 개의 반달이 하나가 되었다. 보름달이다, 네가  떠오른다. 반쪽짜리 보름달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불순물같이 끼어있는 미움이라는 사사로운 감정때문은 아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내가 없던 그 시절의 너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리고 때로는 물러나 가만히 지켜봄만이 너와 나를 위한 사랑이 될 것이라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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