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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May 27. 2022

어렵게 쓰는 시를 환영할 따름이오

< 작당모의(作黨謨議) 16차 문제(文題) : 시 쓰는 밤  >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믿던 올빼미 띠 후예가 살았었다. 그녀의 하루는 술시(戌時: 저녁 7시부터 9시까지)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었는데 접혔던 날개를 펴고 창공을 향해 바람같이 날아오르는 올빼미처럼 밤이 깊어갈수록 까만 눈동자에 형형한 빛을 더해 가는 것이었다. 그녀의 넓디 너른 창공은 하얀 종이 위였고 자유를 구가하며 반복하는 날갯짓은 하얀 종이 위에 써 내려가는 시였다.


  역사를 이룬다손 ‘베갯머리송사’를 벌일 것은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바꿀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으니 두 가지 밤의 역사를 생각지는 마시라. 술시라 하니 술, 술, 술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려나 귀를 쫑긋 세우지도 마시라. 자신에게 요긴한 것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피하고 버리는 속물적 인간의 시간이 아닌 음악에 젖어, 감성에 젖어, 시에 젖어 그녀 개인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숭고한 시간이었으니.


  그녀의 역사는 그렇게 밤을 도와 기술되었고 밤은 그녀의 감수성을 끌어내고 그녀와 세상과 관계를 맺게 해주는 선생이었다. 읽기 시작한 책은 자정이 넘도록 덮는 일이 없었고 시 100편 정도는 외워 읊조릴 수 있었다. 마치 독서왕이었던 소년 충녕대군처럼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 기쁨을 으뜸으로 쳤으며 3살 때부터 사서삼경을 읽고 한시를 지었다는 매월당 김시습처럼 영민하기까지 하였다. 혹은 '다섯 살 때부터 나는 피아노를 쳤어 영재였지, 베토벤부터 모차르트 바흐 쇼팽 선배였지...(창모 <마에스트로> 중에서)'라고 랩을 하는 창모처럼 감각적이기까지 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노천명의 <사슴> 중에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윌리엄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 중에서)...'를 줄줄 외워 국어선생을 놀라게 하였으며 2학년 때, '님의 얼굴이 그리워지는 시각/ 어둠을 깎는 시계의 외침뿐/ 님의 음성은 들리지 아니합니다/ 저녁놀이 짙어져 가는 언덕/ 님의 그림자 발아래 서성이면/ 부르고픈 님을 쫓아 창가에 앉아/ 아름다운 시와 노래를 지어 뿌리고...' 자작시로 "이 시를 진정 네가 쓴 것이 맞으렷다?" 지금부터 너를 '김 시인'으로 임명 하노라, 시인 작위를 받았고 3학년 때는 노래 가사를 지어 불렀다. 고등학생 때는 밤 선생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은 고로, 한 번은 교내 시 백일장에서 문이과를 통틀어 네댓 개의 상을 휩쓸었는데, 숙제를 해오지 않은 친구들이 그녀의 공책에서 하나씩 시를 얻어간 것이라, 상장에 새겨진 이름은 달랐으나 모두 그녀의 시였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밤 선생'을 버리고 변절을 한 것은 아니었다. 밤 선생은 그녀에게는 흠모의 대상이었고 그리움의 언어였다. 다만 시 쓰는 밤이 시시한 밤, 시무룩한 밤, 시들시들한 밤, 시원찮은 밤, 시큰둥한 밤, 밤을 잊은 그대가 된 것은 주위의 수많은 잡것들이 몰려와 정신줄을 놓게 만든 탓인데, 그 꼬락서니가 해괴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앞서 '올빼미 띠의 후예가 살았었다'라고 한 것이다. 지금은 화석화되었다 혹은 사라졌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 쓴던 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시 쓰던 그녀는 무엇으로 긴긴밤을 보내게 되었던 것일까?


  그 적들을 일일이 나열하기에는 지면의 모자람이 있을 뿐이다. 청춘은 언제나 제멋 대로였다. 청춘의 덫에 단단히 걸려든 게 분명해 보였다. 얄팍한 공부를 집어치운 순간, 언제나 갈망하고 애쓰던 현실을 부정하며 펜을 집어던졌다. 펜은 공부 펜, 글 펜 모두였다.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을 외면하고 회피하였다. 대신 술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술 선생'이었다. 술 선생은 밤을 쥐락펴락 했고 쾌락과 욕망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칠흑 같은 밤, 올빼미는 깊은 산속 골짜기에서 울었어야 했건만 도시의 빌딩 숲에서 기쁨의 환호성을 질러댔다. 나태와 권태, 이른 도피와 빠른 회피,  값싼 위로 등등이 따라다닌 것은 물론이었다. 오적(五賊)을 넘어 육적 칠적 십적은 되었으리라. 인생에 있어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은 많지 않으나 해가 되는 것들은 많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책임져야 할 숨 가쁜 현실은 곧 들이닥쳤다. 그녀가 책임져야 할 삶의 무게가 더해지고 더해지며 허우적댔다.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닐까. 뒤를 돌아보면 절벽이라, 시 쓰는 밤을 잊은 지도 오래. 어쩌다 오롯이 혼자인 밤이 찾아올 때면 시를 쓰되 딱 이 따위로 갈겨썼다.

갈망하며 애쓰던 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희생은 누구의 발 밑에 버려졌는가.

이 놈 때문이다. 대낮에 흘린 땀방울, 바람에 마르지도 않고 삭신을 녹인다

또 한 놈이다. 살면서 흘린 눈물, 하하스러운 감정까지 땅에 떨어지게 한다

어느 순간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구원의 탄식은 부끄러운 고백이니,  

자백하라,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나를 묶으라, 소리라도 질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핑계만 남았다지. 핑계는 김건모가 노래한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바로 그 얘기'였다. 핑계라도 적어볼 심산이었다. 다정한 위로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숨을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민낯이 궁금하였다. 어쩌자고 이 모양새로 하늘 아래 서 있을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너무도 쉽게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녀의 역사를 쓰노라 큰소리치면서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윤동주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시를 쉽게 쓰려 발칙하게 덤볐던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썼던 밤에 있었던 일들을 복기하며 다시금 시를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는 그녀를, 어제 목격했다. 분투 중이었다. 아침이 밝아올수록 그녀의 휑한 눈은 안쓰러웠다. 분투 중인 그녀의 방황을 진심으로 환영할 . 부디 그동안의 침묵을 향해 덮고 있던 이불을 팡팡 털어버리고 햇볕에 바짝 말리시기를 바랄 따름이오.





백지


어제 두었던 종이를 오늘도 꺼내네

마침표 없는 사랑이라는 글자

남은 있던가, 한참을 들여다보네


어둠은 언어와 하나 되어 절로 깊어가는데

하얀 종이는 아직 하얘서

문장 하나 섣불리 담지 못한 

감아버린  위에서 어른거린다

 

밤안개는 흩어지고 새벽은 오고

정신은 새벽 강물처럼 말이 없는데

최초의 문장에서 답을 구하고자

백지가 밤을 지켰던 침묵을 향해 이불을 턴다




진샤 님 개인 사정으로 목요일 발행을 하루 늦췄습니다. 목요일 발행 기다려주신 분들께 뒤늦게 사과의 말씀 전합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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