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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Jul 21. 2022

문끼가 도도하기도 하지

< 작당모의(作黨謀議) 18차 문제: 꼬리물기, 소운-파우스트 >

  * 평론의 딱딱한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막걸리 질펀하게 마시며 사설 늘어놓는 어투로 썼습니다. 일명 '막걸리체'입니다.



   백조의 우아함은 수면 아래 바쁘게 움직이는 발에서 나오는 법이란 말이지. 물과 함께 유유히 흘러가고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번지르르해서 빛만 좋은 개살구려니 했는데 아, 글쎄, 백조의 눈물겨운 분투가 있더란 말이야. 백조 그 녀석을 다시 봤지 뭔가.

학이 한쪽 다리로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은 또 어떻고. 그 모습을 우리는 고고하다거나 단아하다고 표현을 하지. 한 치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모습 말이야. 한쪽 다리를 털 속에 묻고 한 다리로 있는데 휘청거리지도 않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말이야. 허, 참, 그게 서서 자는 모습이라니, 자면서까지 그렇게 멋있을 일인가, 현실감 완전 떨어지는 일이지 뭔가. 어째 말도 안 되는 '구라' 같지 않은가?


   그래서 백조를 이야기할 때는 숨은 노력을 칭찬하고 학을 논할 때는 멋지게 날아오르는 도약을 위한 내면의 시간, 축적의 시간을 얘기하는 것이라네. 이건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기도해. 노력 없이 이룰 수 있는 성과는 없고 아름다운 비상을 위해 내면을 닦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야. 이런 우아함과 고고함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했냐면 말이야, 이 와중에 말여, '브런치'라는 글쟁이들이 모여 제 글 뽐내는 공간을 들여다 본거야. 고거 재미지더라고.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고 그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양하더라 이거여.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아주 희한하고도 발칙하고, 격렬하면서도 신랄한 글을 쓰는 사람을 보게 되었지. 그렇다고 글이 난폭하냐 하면 절대 그건 아니여. 오히려 글은 아주 점잖터란 말이야. 도포자락 휘날리며 구름에 달 가듯 뒷짐 지며 걸어가는 선비의 모습이여. 표현도 얼마나 나긋나긋 친절한지... 불툭불툭 튀어나오려는 거친 감정을 살포시 누르고 덮어 동글동글 빚어내는 솜씨가 이거, 단수 꽤나 높은 양반이더란 말이야. 특히 댓글을 볼라치면 간질간질할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하더라고. '댓글도 문학'이라나 뭐래나, 그 양반이 그렇게 얘기하더구먼. "격려와 응원의 말을 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힘을 얻어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댓글 하나에도 정성과 진심을 다한다"라고, "글 스승님이 저에게 한없는 용기와 애정을 주었기에 저 역시  그렇게 하는 것뿐"이라고. 감동이 쓰나미처럼 몰려 오는디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구먼 그래.

이름이 파우스트랴. 인간을 가두고 있는 지식과 능력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괴테가 만들어 낸, 그 초인간적인 캐릭터 말이야. 파우스트란 사람의 지향점이기도 하겠지? 그러니 어쩌, 홀라당 넘어가 버린 거라. 이 양반이 도대체 뭣 허는 사람인가 궁금해져 버린 것이제.


   파우스트의 글을 처음부터 읽었구먼. 글을 딱 보아하니 인생 살면서 산전, 수전 정도 너끈히 겪으며 이기며 살아온 폼이라. 글은 또 어떻고. 소싯적에 부처님 손바닥 안에 손오공 갖고 놀듯이 글을 갖고 좀 놀아본 솜씨라, 글에 끼가 다분하다, 고로 '문끼'가 있다 이것이지. 그중에서도 백미는 <구라태니커 백과사전>이라는 매거진이더만. 파우스트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수필 쟁이'인데 수필의 한계가 무엇인가? 수필은 현재의 사실을 근거로 하기에 다른 장르의 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상상을 집어넣지 못한다는 게 한계가 아니었는가. 지금까지 에세이스트들이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던 이유이기도 하지. 경계 대상은 '허구'라는 녀석이었고. (<파우스트의 수필 생각> 매거진의 '짐작만으로 짜릿한 것, 논픽션의 상상(끝)' 편에 나옴) 그런데 말이여, 이 파우스트란 양반이,

 "대체 허구가 뭐길래, 작가들이 이렇게 주눅이 들었을까. 방향을 잘못 잡았다. 우리의 상대는 '허구'가 아니라 '나'다. 수필 자체다... 수필의 고유한 본성에 더 집중하자는 것이다... 얼마든지 매력적인 수필적 상상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허구의 담을 넘어 고개를 기웃거렸다... 짐작만으로 짜릿한 것, 체험적 현실의 연장선상에서의 상상, 절제된 상상, 이것이 논픽션의 상상이다."라고 말을 하는거여.


   글을 대하는 이런 진지함과 깨달음이 만들어 낸 작품이 가만히 보아하니, <구라태니커 백과사전>에 담겨 있더란 말이야. '인생은 구라다'라고 소리치면서 말이야. '모든 것은 구라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을 해봐. 어차피 인생은 구라니까 진지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걸까? 속고 속이는 인생, 내 맘대로, 내키는 대로 살아도 무방하다는 뜻일까? 그건 아니겠지. 인생 막살라고 조언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역설, 메타포(metaohor), 오마쥬(hommage)인 것이지.


파우스트의 <구라태니커 백과사전> 매거진 글들


   오마쥬란 무엇이여? 불어에서 온 말로, '경의의 표시' 또는 '경의의 표시로 바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거여. 다른 작품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일부러 모방을 하거나, 다른 형태의 인용을 함으로써 자신의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공식인데 파우스트는 그걸 또 다른 예술로 승화시키더란 말이여. 문학인이 가져야 하는 품위 있는 글쓰기가 이런 것이다, 딱 보여주는 것이제.

  

   '꼴뚜기 게임'이나 '토끼와 거북목'이란 글을 보란 말이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지도 않어. 대놓고 겁박하지도 않고. 의뭉하고도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글을 쓰고 있는 파우스트의 모습이 나는 보이는디 자네들은 보이지 않는겨? 주제의식은 가져가되 그 구성에 전적으로 자유를 부여하고 있단 말이야. 단순히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폭로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어. 거북목이 된 토끼를 보란 말이야. 끊임없이 투쟁하고 경쟁하는 삶 속에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조급하게 자신을 몰아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 거북목 토끼로 형상화되어 있거든. '내면의 기형'이라고 감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보란 말이야.


   '꼴뚜기 게임'에서는 '달고나'를 '인생 쓰고나'로 표현해 놨어. 모양을 깔끔하게 분리해내지 못하고 실패했을 때의 허무한 마음이 쓴웃음과 함께 되살아나는 기분이지. '꼴뚜기 게임'은 예술의 극치이며 '글로 더불어 살자'는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난 모본(模本)이라 할 수 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야. 연장자가 느티나무 앞에서 한 말과 행동을 주목해 보란 말이야. 이 부분이 절정 부분이야. '이러다 다 살아'라고 외치는 부분이 완전 압권인데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그럼 좋겠네'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지 않아. 모두가 승자가 되는 게임, 아나키스트들의 행위예술! 이 보다 좋을 순 없지, 암만. 너나들이하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잘 사는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겠어. 춤이 저절로 춰지지 않겄느냔 말이여.


   사람이 어째 제 것 하나 독창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모티브를 여기저기서 끌어다 쓰느냐 가자미 눈으로 삐딱하게 볼 수도 있겠다 싶은디, 그게 바로  파우스트 만의 '꼿꼿한 줏대'라는 것이야. 글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는 파우스트만의 '올곧은 지조'란 말이지. 글과 상상이 갇히면 안 된다는 '자유분방한 사고'란 말이지. 온갖 생각에 붙들려 끌려다니는 일이 없고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적인 자신의 삶으로 승화시켜 이해하는 것이 완벽한 구라를 창조하는 파우스트의 방식이지. 세상을 다채롭게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것일 테고.


   그리하여 파우스트의 글, 또는 '구라론'에 대해 읽고 공부하면서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구먼. "그 양반, 문끼 참 도도하구먼!"하고 말이여. 그리고 그 도도한 양반이 말이여, 그림 하나를 그렸는디 말여, 기가 멕힌다, 이거여. 


   웃고 살아야지, 별 거 있냔 말이거든.

웃자는 말이거든.

웃을 수밖에 없단 말이거든.



이 그림은 파우스트님이 그린 자신의 모습으로, 웃겨서 웃는 '포복절도'의 웃음일까, 일부러 배를 간지럽힘으로써 웃음을 뽑아내는 '자학 웃음'일까. 어차피 웃음도 구라다!!!



https://brunch.co.kr/magazine/rnfk


작당모의 18차 문제는, 작당모의 작가에 대한 또는 작가들의 글에 대한 글쓰기입니다. 저는 파우스트 작가님의 매거진 <구라태니커 백과사전>으로 '파우스트 구라론'에 대해 써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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