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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ul 21. 2022

기묘하게 보기

< 작당모의(作黨謀議) 18차 문제: 꼬리물기, 진샤-민현 >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을까, 하고 묻고 싶은 작가가 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완연하게 이해받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다. 그럴듯한 현실에서 시작하여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거닐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독자는 어떤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너무나 그럴듯하여 오히려 몽환적인 이야기 위에서 우리는 어찌할 수 없이 다시 작가의 이름을 보게 된다. 민현. 그 이름 앞에 서서 질문을 하고 충분한 이해를 곁들인 대답을 듣고 싶어 진다. 그의 소설이 꿈틀대는 현장, 바로 그곳에서.     


   평범한 사랑의 진행을 본다. 적잖은 남자애들이 그러하듯, 진혁의 뻔한 구애를 읽는다. 뻔하지만 뻔하기에 쉽게 빠져든다. 모두의 일반적인 경험이자 그들만의 특별한 과정을 지켜본다. ‘나’라는 화자의 평이한 시점과 담담한 어투에 독자는 쉽게 진혁을 평가한다. 그렇게 화자의 지난 연애를 둘러보다 독자는 어느 순간 읽기를 멈춘다. 자신을 의심하며 문장을 다시 읽는다.  

   ‘간을 먹었다’와 ‘맛이 좋았다’가 한 줄에 읽힌다. 화자를 향한 독자의 의심은 바로 다음 문장의 ‘타깃’에서 불안하게 멈춘다. 독자는 쉬운 문장들 속에서 화자를 판별해 내지만 그 과정에서의 기묘함은 쉽지 않게 분출된다. 화자에 대한 의심을 명확하게 거두지 못한 채 화자의 일상으로 재진입하게 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과정은 기묘하지 않다. 화자의 일상이 바로 '우리' 일상의 면면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독자는 화자의 평범하고 권태로운 일상에서 그 삶의 목표를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모습을 드러낸 화자의 목표는 확실하다. 특정 시점 이후 읽는 이들의 시야에 확보되는 어휘, 즉 ‘간’, ‘죽었다’, ‘찌르는 방향이 어긋나’, ‘고통으로 커진 눈’, ‘딱딱하고 질긴’ 등으로 독자는 화자의 삶을 재확인하게 된다. 화자는 쉬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인생 아니 야생적 삶으로서의 목표를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이 상상의 영역에서 얼마나 잔인해지고 고통스러워하는가에 대해 작가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작가는 오로지 화자에 집중할 뿐이다.

   화자는 고조할머니가 일으킨 사건으로 난감한 미션을 수행 중이다. 그 제목은 중의적 이게도 ‘19금 법’이다. 화자는 '19금'이라는 어휘가 연상케 하는 섹슈얼한 공간과 상황에서 비로소 '19금 법'을 지키며 자신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19금 법을 그대로 적어 본다.   


1. 타깃은 금요일에 처음 본 사람이어야 한다.
2. 이후로 금요일이면 반드시 타깃을 만나야 한다.
3. 만난 지 19번째 되는 금요일에 타깃의 간을 먹어야 한다.
4. 위 과정을 거친 간이 100개가 쌓이면 사람이 된다.
5. 이를 어기면 리셋. 처음부터 다시.      


   독자는 여기서 흥미로운 제목, ‘숙명’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지금까지 대면한, 어딘가 불길하고 불안한 화자는 이제 없다. 험난한 세계의 숙명을 짊어진 하나의 객체만이 존재한다. 그들의 고독한 숙명을 직시하게 한다. 작가는 지금까지 일상의 수면 밑에서 찰랑거리던 화자의 욕망을 '19금 법'을 통해 직면케 하는 서사 진행 능력을 선사함으로써 독자에게 이야기의 다층적 구조를 입체감 있게 드러낸다.

   이는 작가가 소설에서 세계를 구상할 때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작가는 전작 ‘재하, 소진, 현우 이야기’에서 그들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세계는 오직 그들 안에서 굴레의 층위를 더하고 서사의 두께를 넓힌다. 외부적 관찰을 통한 내부는 협소한 골격을 갖춘 세계이지만, 세계의 구성원들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숙명'을 스스로도 감지하고 인내한다. 전작에서 그들의 얽힌 실타래를 관조하기만 하던 작가는 '숙명'에서도 화자를 구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의 종족 보존 행위를 더욱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엄마는 할머니가 열네 번째만에 겨우 얻은 딸이었고, 엄마는 그렇게 위로 열세 명의 오빠를 두었다. 그 끔찍한 일을 내가 겪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화자의 이 지긋지긋한 숙명의 기원은 모두가 인지하는 대로 설화에서 비롯된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독자라면 구미호를 모를 수가 없다. 그러나 작가는 기묘한 발상으로 기묘한 방식의 서사를 풀어놓았다. 독자들로 하여금 간의 맛을 상상케 했고(딱딱하고 질긴데) 간을 꺼내는 방법을 체험하게 하였으며(찌르는 방향이 살짝 어긋나 간 대신 콩팥을 꺼냈고) ‘간을 보던’ 이들의 최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그러다 너 죽는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에게 간을 내어주고 보낸 문자 그대로 죽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행위가 대대로 이어져야 하는 당위적 서글픔을 담담하게 표현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사람이 되려 하는지를 물으면 또 눈물이 난다. 그게 구미호의 숙명이니까.'

  

   구미호가 보여주는 도달 불가능해 보이는, 그러나 언젠가는 도달해야 하는 세계의 미션은 현대 한국사회의 불확실한 단면과 맞닿아있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모든 세대는 일정 수준의 미션을 통과해야 다음 단계로의 진입이 가능한 구조 속에 위태롭게 존재한다. 시험, 대학, 취업, 결혼, 출산, 경제적 안정을 통한 ‘자리잡기’로 통칭되는 모든 미션은 구미호가 거쳐야 하는 수많은 ‘금요일’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구미호의 세계와 이곳의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리셋, 처음부터 다시’이다. 화자의 할머니는 스물네 번의 ‘처음부터 다시’를 견뎠다. 열세 번의 ‘불필요한’ 출산을 참아냈다. 그가 이 끔찍한 과정을 거치며 숙명을 겪어내는 동안, '리셋' 장치가 없는 사회적 구조에 존재하는(있다 해도 사실상 무력한) 우리는 어떠한 사건들을 비켜서거나 외면했다.

   2000년대를 거치면서 이루어낸 집권 세력의 교차는 사회적, 구조적, 인식적 교차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단발성의 혁명이 있었으나 유효기간은 기대보다 짧았다.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동시적으로 목격한 이 사회의 구성원은, 유가족과 피해자에 한정하여 '운명'이나 '숙명'을 탓했다.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태도로 '자멸적 수치로부터의 직시와 직면'이 대두되는 때에 작가는 ‘처음부터 다시’의 항목을 보란 듯이 5번에 배치했다. 이 통쾌한 고통을 껴안고 우리는 결국 ‘금희’의 탄생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숙명이고,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므로.  우리의 숙명 안에도 '리셋, 처음부터 다시'가 배치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무난한 에세이의 생산을 부추기는 브런치 생태계에서 민현의 소설은 기묘하게 탄생했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담담한 에세이로 브런치 내에 정평이 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의 것처럼 소화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아내의 출간기를 자신의 출간과 접목하여 에세이를 직조해 나가던 그의 첫 소설이,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 '동백꽃'의 점순이를 접목시키며 탄생한 것은 그리 기묘한 일이 아니다. 그의 모든 소설은 이렇게 일상과 소설, 소설과 설화의 어느 지점에서 교차한다. 그 교차에서 민현다운 기묘함이 발생한다.

   '공대 출신 개발자'라는 수식어를 뗀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그가,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가. 협소한 배경에 인물을 몰아넣고 유머러스한 문장들을 넣어 특유의 효과를 생산하며 단단한 내구성을 가진 서사에 집중하게 한다. ‘센서등’의 결말에 발생하는 불편한 공포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백일 간의 기억’에서 그가 호랑이의 둔중한 외피를 뒤집어쓴 채 소설의 어느 지점을 거닐고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해낼 것이다. 그는 소설을, 정확하게는 ‘소설적 서사와 문장’을 즐기고 있다. 지금 그의 작업에, 그의 내부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건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 시점에서,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소설 쓰는 민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그의 대답은, 소설이 외면받는 브런치에서 그의 소설을 계속 읽어야 하는 필요성과 연결될 것이다. 또한 그의 소설을 계속 읽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독자들의 내면과도 일치할 것이다. 이제 그의 대답은 필연적이다.

  작가의 기묘한 소설적 글쓰기 아니 실재로서의 소설 쓰기는 이제 막 자궁을 벗어났다. 그는 에세이가 뿌리내리기 쉬운 브런치의 토양에서 소설을 성장시켰다. 아마도 그의 다음 작품이 생장하는 환경은, 브런치 외부의 어느 현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가 되었든 간에, 그의 다음 작품이 산출해낼 감정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다림을 감내하게 하는 힘, 그것이 민현의 소설에 웅크리고 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가 이끌고 올 신선하고 기묘한 시선, 그것을 장착할만한 유연한 자세뿐이다.  








<끝>  



작당모의 18차 문제는, 작당모의 작가에 대한 또는 작가의 글에 대한 글쓰기입니다. 저는 민현 작가님의 글 '숙명'으로 '민현의 소설 쓰기'에 대해 써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위의 글은 편혜영 작가의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의 신형철 해설, '섬뜩하게 보기'를 제목과 내용에서 전반적으로 참고 및 인용하였습니다. 신형철 평론가님께 미리 감사와 사과의 말씀드립니다.

* 사진 출처: 민현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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