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당모의(作黨謀議) 18차 문제: 꼬리물기, 민현-김소운 >
작년 8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작당모의 매거진에 첫 글을 올렸다. 그 후로 2주에 한 번씩, 어떨 때엔 서로 쓰자 하는 글감이 넘쳐 1주에 한 번씩 글이 나갔다. 그렇게 1년을 보내면서, 21개의 글이 작당모의의 옷을 입고 내 이름의 명찰이 달려 발행되었다.
작당모의의 글이 발행되는 건 목요일 오후 2시이다. 그 시간이 가까워지면 작당모의 작가님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이 시끌해진다. 대부분이 엄살이다. 이번 글은 망했어요. 이번 주제 누가 제안한 겁니까. 머리 다 빠졌습니다. 아. 몰라요. 그냥 발행. 이게 뭐라고 점심밥도 못 먹고 계속 퇴고 중입니다. 이번 글 쓰느라 몇 년은 늙었을 거라고 이번만큼은 누구보다 자기 글이 가장 별로일 거라고 괜한 연막을 친다. 그러면서도 눈은 시계를 향해 있고, 어느덧 카운트가 들어간다.
'발행 1분 전!'
매거진을 작당모의로 선택하고 글과 함께 나갈 키워드를 고르고 손가락을 글 발행 완료 버튼에 조준하고 1:59 인 핸드폰 시계를 바라본다. 가장 떨리는 시간. 이 엄살쟁이 작가님들 보나 마나 또 엄청난 글들을 썼겠지. 이번 글은 망했다는 푸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뒤통수를 몇 번 맞아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 분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보내는 글만큼은 진심이다. 이제 어느 누구도 발행 전 늘어놓는 엄살들을 믿지 않는다. 시계가 2:00 을 가리킨다.
'쏘세요!'
같은 주제의 각기 다른 4개의 글이 작당모의의 이름으로 발행된다. 역시나 이번에도 엄살은 엄살일 뿐이다.
그간 써온 그들의 글을 읽으며 혼자 이러저러한 사람들일 거라고 상상했다. 누구보다도 궁금했던 건 김소운 작가님이었다. 손에 잡히는 크레파스로 아무 색이나 칠한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김소운 작가님의 모습은 글마다 색이 달랐다. 글을 읽고 떠오르는 모습이 그때그때 달랐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리라. 서로 통해야 하는 것이다. 통하려면 유연해야 한다. 멈추어 있어도 안된다. 서로의 마음을 흔들고 가능성을 깨우고 변수에 모험을 거는 것.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날마다 조금씩 자라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 - <바람이 낳은 꽃기린> 김소운
산다는 것이 힘들고 고돼서 외로울 때 잠시 기대어 위로받고 싶다가도
학창 시절, 나는 모창과 성대모사에 능한 편이었다. 유머 프로그램을 본 다음 날, 흉내를 내면 주위에 있던 친구들은 까르륵 뒤로 넘어갔다. 자기들만 보고 듣기 아깝다고 오락시간에 나를 앞에 세우기 일쑤 었다. - <영구야, 노올자!> 김소운
나도 모르게 왠지 기분이 들뜨고 좋아서 그 기운을 함께 나누고 싶다가도
우리는 너무 쉽게 글을 쓰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글과 말은 하나도 쉬운 것이 없는데 뱉어지고 배설된 말과 글들은 신중하게 쓰인 것인가? 토할 때까지 고치고 또 숙고하였는가? 글과 말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도 20번, 30번 들여다 보고 자세히 보며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작업을 철저히 하고 있는가? -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김소운
내가 쓰는 글은 왜 이리 가벼운 건지 고민이 될 때 찾아가 답을 내놓으라 떼쓰고 싶다가도
맞다. 전날 술을 마셨다. 전날뿐만 아니라 불금이라 불리는 금요일,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 안심되는 토요일이면 묻고 따지지 않고 술을 마신다. 물론 평일에도 술을 마시기는 마찬가지이다. - <오늘도 북엇국이지!> 김소운
인생 뭐 있나. 부어라. 마셔라. 먹고 죽자고, 죽기 참 좋은 날씨지 않느냐고 조르고 싶어 지는.
글 하나를 읽고 이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른 글에서는 저런 사람이 되고, 읽은 글들이 겹치면서는 혹시 그런 사람이었나? 하는 식이었다. 글로는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모습이 진짜인가. 난 어떨 때 이분을 찾아가야 하는 건가. 만나보면 실체가 드러날 것인가.
장마전선이 잠시 남쪽으로 내려가 우산이 제 쓸모를 잃었던 어느 날, 작당모의의 4명이 수서의 한 식당에 모였다. 함께 모여 글을 쓴 지 1년 만이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얼굴을 몰라보고 놓치지는 않을까. 혹시..., 또는 실례지만..., 따위의 민망한 말로 첫인사를 하게 되지는 않을까. 모퉁이를 돌아 식당으로 다가오는 김소운 작가님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를 보자마자 양손을 번쩍 들어 반가움을 표하실 때,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알았다. 서로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3시간가량의 시간은 짧고 길었다. 몇 마디 나눈 것 같지도 않은데 바로 헤어져야 할 만큼 부족했고, 상상하던 모습을 하나하나 글과 겹쳐 볼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김소운 작가님에게선 그분이 쓰시는 글처럼 다채로운 색이 느껴졌다. 글에 쓰인 모든 것이 그분이었다.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정하고 유쾌하고 진지하고 편안한, 그 제각각의 모습이 숨겨지지 않는 그분은 실제로 이런 사람이면서 저런 사람이고, 또 그런 사람이었다. 기대고 싶고, 떠들고 싶고, 보채고 싶고,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 아쉽게도 그날, 그분의 모창과 성대모사를 듣지는 못했지만.
'2122년'이 주제였던 글, <나무의 머리와 심장>에서 김소운 작가님은 100년 후의 암울한 세상을 그렸다. 선택받은 자들의 I 구역, 밀려난 자들의 O구역, 그리고 그 두 곳을 오갈 수 있는 B구역으로 나누어진 세상에서 강인은 B구역을 선택한다. 의사라는 직업으로 I구역에서 안전한 삶을 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아버지 인호의 말에 강인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원래 좀 삐딱하죠. 하라는 대로 하기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무엇보다 거기서는 술과 담배를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사람 사는 것 같거든요. 사람이랑 같이 사는 게 좋아요. 아픈 곳을 만져주기도, 눈물을 닦아주기도, 볼을 서로 비비기도, 마음에 안들 땐 한 대 치기도 하면서 사는 거죠. 감정 소모가 꽤 큰 편이지만, 뭐, AI애완동물을 껴안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멋진 삶이죠. - <나무의 머리와 심장> 김소운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강인의 말이 떠올랐다. 강인의 말이었지만, 머리에 그려지는 건 김소운 작가님의 표정과 목소리였다. 강인의 입을 빌린 그분의 말이었다. 내 앞에 앉아 눈을 맞추고 멋진 삶을 이야기하는 그분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세상이 암울해져 살아갈 구역이 정해지고, 내가 가야 할 곳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분을 따라 B구역으로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언제든지 그분을 찾아가 아픈 곳을 보이고, 눈물을 흘리고, 볼을 비비고, 한 대 맞기도 하는 친구가 되어 술과 담배도 하면서, 하라는 것들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들만 하고 살면서 재미있게, 사람 사는 것처럼 삐딱하게.
작당모의 18차 문제는, 작당모의 작가에 대한 또는 작가들의 글에 대한 글쓰기입니다. 저는 김소운 작가님을 읽고, 보고, 떠오르는 것들을 써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