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 버릴려니 버리는 것도 일입니다.
친구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드는 나이만큼
깊어지는 것들이 있다.
‘아... 음악과 함께 놀고 가르쳐 온 인생, 오래 살다 보니 드디어 득도를 하였구나. 너는 참 좋겠다.’ 생각을 했지요.
어쩌면 친구는 자기 능력에 맞는 속도도 알고 동글동글 세상을 보며 지혜로운 말씀을 따르게 되었을까요? 떠나는 것에 집착도 아니하고 인생을 고스란히 녹여 나름의 빛깔과 향기를 지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일찍이 공자 선생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이 40은 불혹, 50은 지천명이라 하였는데 나는 아직도 많은 것에 미혹되고 하늘의 뜻은커녕 내 마음 뜻도 헤아릴 길이 없는데 벌써 공자 선생과 호형호제하는 친구 사이가 되었단 말인지, 부러울 따름이었지요.
이 나이에도 나는 방황이라는 걸 한다네.
20대, 답 없는 방황 30대, 길 잃은 방황 40대 초점 없는 방황에도 제법 강건히 잘 버텨왔다 싶었는데 지금은 당최 걷잡을 수가 없어.
이렇게 흔들릴 줄 몰랐거든.
나는 이렇게 답을 적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긴 장마로 인한 약간의 센티함으로 이해했고 그다음은 흔한 갱년기 증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두꺼운 양장본 세계문학전집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하시던 엄마의 나이가 이 나이였을 것도 같습니다. 그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흔들리고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갱년기 증세로 짜증, 불안, 그리고 감정의 오름 내림폭이 너무나 잦은 요즘~
스트레스 체감률이 급상승하니 내가 싫고 불편한 건 자꾸 피하고 싶네ᆢ 아직 사유의 깊이가 없으니 어리다 해야 하나? 언제 나이듬으로 아름다워지려나?
처음 썼던 이야기는 <그대 홀로 있기 두렵거든>이라는 글의 한 부분이고 자기도 지금 너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노라 심경을 털어놓습니다.
친구야, 글을 쓸 때는 항상 출처를 밝혀야 한다.
나는 네가 먼저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나 했단다.
친구 덕 좀 보나 했다. 내가 가부좌 틀고 면벽 수도라도 하여 그 깨달음을 전해주마.
맞나?
맞다.
하며 한참을 웃고 나니 마음은 좀 잦아들었습니다.
그렇구나, 친구야. 너도 그렇구나. 힘들겠구나.
이 나이가 참 쓸쓸한 나이다, 그쟈?
서로의 쓸쓸함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더군요.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며 마음의 소요(騷擾)는 가라앉지 않더군요. 위로가 될만한 책을 찾아 읽고, 영화도 보고, 늘어지게 잠도 자보고, 뜨거운 국수 국물을 마시며 해탈의 ‘후루룩 카~’를 해보아도 마찬가지였죠.
스스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때인가 합니다.
키키 키린 할머니는
“앞으로 어떻게 나이를 먹어갈 것인지 대략적인 방침을 세웠어요... 그 방법은 나를 완전히 버리는 거예요”라고 말씀하셨죠.
뭔가를 정리해야 할 나이도 아니고 암이라는 몹쓸 병에 걸려 지난 세월을 반추할 결정적인 이유는 없더라도 적어도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끌어안고 살았는지 끄집어내어 정리하다 보면 이 소란을 일으킨 범인의 족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실마리를 찾아서...’, 오라, 그거 좋겠다 싶었습니다.
문득, 친정엄마의 이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30년을 넘게 살았던 주택에서 관리하기 편한 아파트로 이사를 결정한 친정엄마는 거의 한 달에 거쳐 켜켜이 쌓여있던 집안의 모든 물건들, 모든 삶의 흔적들을 일일이 하나하나 꺼내어 찬찬히 들여다보시며 ‘휴~’ 한숨 한 번 쉬고 또 정리하고를 반복하셨죠.
그런데, 참 이상했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멀쩡하게 잘 살아왔는데 말입니다, 막상 꺼내놓고 나니 별게 없는 거예요.
‘뭐 이런 걸 다 가지고 계셨대?’ 싶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구질구질한 것, 상처투성이인 것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엄마도 조금은 황망한 표정이셨지요.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것들을 이고 지고 살았을꼬”
하시더군요.
“비우고 살았으면 훨씬 홀가분했을 텐데, 이제야 버릴려니 버리는 것도 일이다” 하셨죠.
엄마는 정말이지 ‘집 떠나는 순이’처럼 옷가지들과 몇몇 손때 묻은 살림살이만 남겨 놓고 대부분의 살림들을 버리셨습니다.
살면서 부서진 것은 고치고, 흠이 있으면 메우고, 헤지고 뜯어진 것들은 기우고 때워서 겨우겨우 지니고 사셨을 겁니다. 그렇게 살아야 할 때가 있었고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없으면 안 하고 살면 되는 거고, 안 하다 보면 할 것도 없어지겠고 할 게 없으면 정말 편하겠다”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하시며 웃었지만 그것은 슬픔이었음을 압니다. 오랫동안 그것들은 엄마에게 속해 있었고 엄마의 손길과 호흡이 닿아 있었던 것들이었지요.
기쁨과 슬픔의 끝은 이렇게 맞닿아 있습니다.
“야, 싹 비우고 나니까 속이 다 후련하다”
애써 아쉬움을 외면하며 딴청을 피우십니다.
“그래도 엄마, 너무 휑하지 않을까?”
“야, 야, 충분하다, 충분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든 하면 되는 거지. 더 보탤 것도 채울 것도 없다. 딱! 좋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면 그만이다. 뭐 사주려고 생각도 하지 마라. 내가 편하면 되는 거지. 누구 눈치 볼 것도 없고, 아주 좋아요!”
엄마는 진심 행복해하셨던 것 같습니다.
내 마음 정리도 이사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래된 권력은 부패하고, 오래된 물건은 닳고 무뎌집니다. 처음 그것을 가졌던 설렘과 살면서 손때처럼 묻은 추억들이 있어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소유하고 있다’라는 것만으로 그것은 진정한 ‘나의 것’은 아니지요.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조금만 더’라는 마음의 욕심을 꺼냅니다. 조금만 조금만 하다 보면 항상 지금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죠. 감사하게 살 일이 많은데 고마운 일이 많은데 그걸 놓치고 살게 되면 안 되잖아요.
가끔씩 불쑥 튀어나오는 ‘그랬으면 좋았을걸’ 하는 미련과 후회도 꺼냅니다. 어차피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지요. 만약 과거로 돌아가 후회되는 일을 다시 바꾸게 된다 하더라도 다른 것을 잃을 수 있지요.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시기와 질투, 섣부른 기대와 허황된 바람들도 모두 모두 꺼냅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반짝일 필요도 없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될 필요가 없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자신의 보폭을 알고 자신의 속도대로 자신만의 방식대로 하면 되지요.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요.
일단 오늘은, 이것부터 마음에서 이사시켜야겠습니다. 오래 묵히고 쌓여 있던 마음속 짐들인데 하루아침에 다 버려질까 싶어 옆방으로 잠깐 이사시켜놨습니다. 조금씩 천천히 꼼꼼히 점검하고 버리게 말이죠. 이별 연습도 충분히 하려고요. 그래야 다시 찾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버릴 것 버리고 지니고 살 것들을 정리하면 ‘새단장된 나의 모습’이 보이겠지요?
잘해야 합니다. 앞으로 또 50년 데리고 살아야 하는 ‘나’이니까요.
새단장된 나의 모습은, 나의 마음은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마음을 읽고 주위 사람들도 함께 편안했으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표지 사진) 짐 홀랜드 (Jim Holland. 미국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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