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답게 하는 ‘가족’이라는 이름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가족입니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에이 시시해” “뭐야? 촌스럽기는”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이런 말들을 하며 첫 문장 읽고 책장 탁 덮어버리듯 더 이상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등속 직선운동을 계속하는 관성의 다른 이름은 아니었을까요?
‘내가 드디어, 어른이 되었어!’
‘인생’이라는 기다란 산맥에서 ‘어른’이라는 최고봉에 올라 감격의 깃발을 내리꽂는 순간, 그동안 내 안의 최고였으며 절대적으로 자리했던 부모형제의 의미는 저기 저 아래, 발아래로 굴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손을 잡고 걷는 일이, 아빠와 공을 차는 일이 부끄럽고 어색한 일이 되어버렸지요.
오히려 가족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독립을 쟁취했다는 뿌듯한 자부심에 환호했을지도요. 그즈음, 가족 이외의 다른 사회에서 더 솔깃한 제안을 해옵니다.
‘나’는 다른 관계 속에서 리셋됩니다. 띠리릭~
세상을 보는 초점 또한 ‘나’와 ‘사회’에 맞추어지게 됩니다. 사회 속에서 주목받고 관심받고 싶어 하죠.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나’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나’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나’의 발전을 위해 혹은 도태되지 않으려고 ‘나’는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그냥 달리는 게 최선이고 최고라고 나를 다독여가며 말입니다.
곁눈질 마저 허락되지 않는 경주마가 되어 경주장 트랙을 달리고 있는 ‘ 나’를 발견했을 때에도 주위에는 그런 경주마가 널려 있었고 이미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으스대는 무리들도 있었기 때문에 속도를 늦출 수는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 날은 내가 해낸 일들이 좋은 성과를 내 ‘달디 단 샴페인 맛’을 보는 순간도 있었을 겁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착각 속에 얼마간은 취해 살 수 있었겠지요.
모든 것이 환하게 밝혀지는 순간, 반려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부모님이 사셨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그럴 리가 없다고’ ‘나는 다르다’며 나는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중이라고 외면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럴수록 보다 새로운 것, 보다 가치로운 것에 대한 갈증은 더해갔고 ‘나’는 ‘누구인가?’ 존재에 대한 답은 모호해지기만 했습니다.
별반 다를 것 없는 루틴으로 돌아가는 가족관계와 습관처럼 지속되는 사회적 관계는 이제 더 이상 흥미롭지 않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생각을 멈추어 봅니다.
마음속으로 휘~이~잉 바람이 지나갑니다.
인생, 참 어렵고 힘듭니다. 헛것에 미혹되어 살아온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습니다.
끝내 풀지 못한 수학 시험지를 들고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수험생의 좌절과 절망이, 월급날 확인하는 통장 잔고에 한숨 쉬는 회사원의 번민과 허무가, 하루 설거지를 마치고 고단한 몸을 뉘이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중년의 공허함과 외로움이 한 데 엉겨 나락으로 나락으로 나는 끌려갑니다.
꿈이었을까요?
장대 끝에 앉아 있는 잠자리처럼 아슬하게, 딱 그만큼의 절망과 무기력함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후회와 분노가 교차하는 어느 순간이었을 겁니다.
평범한 어느 날이었을 것이고요.
딸이 학급 회장인 관계로 학부모 연수에 참석 아닌 동원이 되어 가야 하는, 지루할 것 같은 날이었지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는 폭력 예방, 게임중독, 양성평등 교육시간이 넌더리가 난다고 했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막상 학부모 연수에 가야 하는 입장이 되니 아주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지요.
어떻게 연수 프로그램은 그 나물에 그 밥인지...
그날도 연수 제목은 아이와의 소통, 부모의 역할, 뭐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으며 예의는 바르게 센스 있는 긍정의 고갯짓을 간간히 날리고 있었습니다. 1부가 끝나고 2부 체험을 위한 활동지가 배부되었습니다.
가족을 동물로 표현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완성된 그림만으로도 가족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강사분의 호언에 고민이 깊어지더군요. 솔직히 표현했는데 뭔가 좋지 않은 가족사라도 드러난다면 여간 낭패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가족 간의 관계와 서로의 위치, 생각들에 대해 헤아리고 살지 않았구나’ 자성하고 있던 찰나였습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시던 강사가 내가 꾸민 활동지를 가져갑니다. 어라? 뭐가 이상한 걸까?
설명은 ‘독특하다’와 ‘재미있다’로 시작되었습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고 주목받길 좋아하는 나= 얼룩말, 엄마를 대표하는 동물로 선택하는 사람 못 봤답니다. 변화무쌍하고 예민하답니다.
성격은 온화하나 방어기제가 높은 딸= 캥거루, 육아 중인 캥거루를 딸로 표현한 사람 또한 더더욱 보지 못했답니다. 열정이 내재돼 있는 외유내강형이랍니다.
단독행동을 하지 않고 상호작용이 활발한 남편= 돌고래, 함께 협업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계속해서 으쌰으쌰한다네요.
사회성이 좋은 인싸 아들= 펭귄, 친절하지는 않지만 주위와 나에 관심이 많아 손해 볼 일은 절대 안 한답니다.
개인 개인의 개성이 뚜렷하나 각자의 맡은 자리에서 할 일은 다 하면서도 가족의 구심점인 ‘나’에게 기대어 화합하며 잘 지내는 집이라는 설명입니다. 특히 딸과의 유대가 아주 좋아 서로를 많이 의지하고 포근포근하답니다. 제가 딸을 더 의지하고 있는 것 같답니다. 무릎팍도사도 아닌데 이 강사의 통찰이 기가 막힙니다.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왜 눈물이 났는지요...
사회 속이 아닌 가족이라는 이름 속에 묻혀 있는 나는 사면초가의 느낌이었거든요.
‘나’는 그동안 가족에게 ‘구심점’으로 작용하였던 것일까요? ‘나’의 모습은 가족의 관심과 애정 속에서 빛이 나고 있었던 것일까요?
사면초가가 구심점이 되어 돌아오자 나는 울컥하였고 가족이라는 이름이 진정 나를 나답게 세워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시골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 느끼는 안도와 평온이었습니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그 누님처럼 꽃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천사의 몫’이라는 게 있습니다.
위스키 숙성 과정에서 오크통 속에 있는 술 2%가 증발해 없어지는데 이것을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고 합니다. 소실돼 없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천사와 나눈다(Share)는 표현을 합니다.
심지어 천사와 나누는 그 2% 때문에 위스키의 맛은 더욱 깊어집니다.
나는 그동안 이 ‘천사의 몫’을 간과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여러 과정 중에서 잃기도 하고 잊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것들을 ‘나누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어땠을까요?
가족을 위해 내가 버린, 아니 나눈 2% 때문에 우리 가족의 모습이 더 아름다워졌다고 한다면,
그 속에서 ‘나’는 깊어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나다워지는 중’이라고 한다면...
나는 분명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또한 행복한 얼룩말입니다.
*표지 사진) 한국 스페인 수교 70년 기념 특별전 : 에바 알머슨 Vida (2020.6.27일~9.20일. 세종문화화관 미술관) 중 <어느 특별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