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운 Sep 11. 2020

컵밥 먹기 좋은 날

컵밥이면 어떠냐? 집밥이면 되었지!

‘커피를 마시며 카피를 쓰다 코피를 쏟다’

모름지기 카피라이터라면 이 정도쯤은 이야기하며 멋있게 나를 묘사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나는 커피를 마시며 카피를 쓰다 컵밥을 먹는다’

쓸모와 필요에 의해서 살아가던 현실적인 나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카피라이터로 일을 하며 숱한 날 밤을 새우고 야근을 해도 식욕은 왕성하였고 코피를 쏟는 따위의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지만 참 부러운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얘기하면 뭔들? 하며 누군가는 웃겠다.

목이 아파요, 스카프를 목에 감고 다니는 것.

일을 하다 코피를 쏟고 머리를 뒤로 젖히는 동작.

머리를 손으로 살짝 짚으며 어지러움을 느끼는 몸짓... 같은 것들이다.

뭔가에 깊이 빠져 열정을 불태우고 있거나

집중해야 하는 과제에 열심이거나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시간 열중하거나 그런 표시로 읽혔기 때문이었다.


내가 컵밥을 즐겨 먹었던 이유도 열정•열심•열중을 나타내는 ‘행위’ 였다고 하면 비약일까?

시간을 아끼고 싶었다.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해내는 능력자로 보이고 싶었다. 일이 바쁘다고 먹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돈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했다면 직장의 유무와 관계없이 몸은 집에 있어도 ‘경제적 독립은 반드시 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다행히 직장은 구했으나 월급은 많지 않았고 그중 일부는 생활비로 부모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더 적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컵밥이었다.

일주일에 2~3번 정도는 집에서 밥과 반찬을 길쭉한 용기에 한꺼번에 담아와서 점심으로 먹었다.

점심을 회사 밖에서 먹거나 회사 안에서 시켜 먹을 때에는 가끔 밥과 반찬을 한 용기에 담아놨다가 야근할 때 요긴하게 먹었다.

이런 아이디어로 그때 컵밥을 만들어 팔았다면 나는 어쩌면 재벌로 살고 있겠지. 우리 아이들은 재벌 2세 소리 들으며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겠고.


컵밥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특히 둘째는 아침 눈 뜨면 나가지고 졸라대는 아이였기 때문에 간식이나 한 끼 정도의 요깃거리를 들고나가야 했다. 하루 종일 동네 놀이터를 전전하며 먹었던 컵밥이다.

내가 먹을 어른용 컵밥은 그날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대충 넣어 만들었고 아이용 컵밥은 계란이나 김 스팸 치즈 참치마요 중 몇 가지만 넣어도 훌륭했다.


컵밥이 순식간에 만들어지고 색깔까지 예쁘니 아이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보겠다며 여기저기 재료들을 흘리고 묻히며 재미있어했던 컵밥이었다.



편의점 김밥이 8,900원이라고?

그런데 얼마 전, 편의점에서 파는 김밥과 컵밥에 대한 기사에 시선이 꽂혔다.

‘지난 5월, 모 편의점 회사에서 판매를 시작한 ‘ㅇㅇ전복감태김밥’은 8,900원으로 편의점 역사상 가장 비싼 김밥이다.’

What?

4천 원대 프리미엄 컵밥도 인기라는 내용도 딸려있다. 3천 원대 컵밥 보다 훨씬 많이 팔린다고 한다.


“야, 야, 그... 8,900원짜리 김밥이 있다는데, 알아?”

말까지 더듬으며 아이들에게 물었었다.

“엥? 8,900원?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컵밥이나 도시락 뭐 그런 건 보통 4천 원이 넘죠. 4,500원쯤?”

“그렇게 비싼 걸 사 먹는다고?”

“밖에서 사 먹는 애들이 많으니까요. 먹는 김에 비싼 거 먹는 거죠.”


아... 이렇게 겁나는 시대에 살고 있구나.

커피값 아끼려고 친구들 약속도 극장 앞이나 오락실로 잡았었다. 밥값이 아까워 컵밥도 싸다니고, 지하철 출구에 아침마다 팔던 1천 원짜리 김밥도 단골 메뉴였는데, 바쁘고 배고플 때 들어가 컵라면 하나 정도 사 먹고 나오는 편의점 문화가 아니구나.


코로나 시대, ‘집콕’이 늘고 외식이 줄면서 간단하게 먹더라도 제대로 먹자는 분위기가 한몫했을 것이다. 정부의 재난 지원금이 편의점 고가 제품 중 하나인 와인의 매출을 전년 대비 777% 늘리는데 기여했다는 것은 익히 아는 바이다. 소상공인을 살리자는 취지는 무색하였고 대기업 계열 유통사인 편의점 문턱만 닳게 만들었다.

유통업체들이 이런 찬스를 놓칠 리가 없다.

이제껏 저렴한 가격의 상품으로 소비자를 유인했다면 유통채널에 파워가 붙었을 때 프리미엄 상품을 내놓는 전략으로 바꾼 것이다.


일자리는 없고, 실업률은 증가하고, 집값이 오르고, 개인 부채는 늘어만 가고, 가게가 문을 닫고, 경제성장률이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는 이 시점에 이렇게 허투루 돈을 쓰고, 쓰게 만들 일인가.


컵밥 앞에서 ‘꼰대의 시점’이다.



그래서 컵밥을 해 먹고 싶어 졌다.

컵밥, 그거 뭐 별건가?

예전에 나를 표현하던 커피, 카피, 컵밥 중에 커피도 가고(평균 5잔 정도 먹던 것을 요즘은 딱 1잔 마신다), 카피도 가고(카피라이터가 아니니까), 겨우 컵밥 하나 남았는데, 프리미엄 컵밥 시대에 컵밥 하나 사 먹을 배포도 없는데 해 먹을 밖에 도리가 없다.

급하게 컵밥이 당겼다.


시어머니 밑반찬을 20년 째 만들어 드리고 있죠(좌),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왔지요(우)

오늘은 컵밥 먹기 좋은 날이다.

컵밥, 그냥 먹으면 되지, 먹기 좋은 날이 따로 있나? 물으면 대답은 ‘따로 있다’이다. 조건이 있다.

컵밥은 혼자 먹어야 한다

컵밥은 먹는 날의 냉장고 컨디션이 좋아야 한다

컵밥 먹으며 다른 일을 같이 해야 맛이 산다

그러므로 지금, 오늘이 딱이다.

두 녀석이 다이어트를 한다고 밥을 안 먹겠단다

시어머니 밑반찬을 만들어드리고 와서 냉장고 컨디션이 매우 좋다

<보이스트롯> 몰아보기를 해야 한다

오! 이 정도면 완벽하다. 컵밥 빨리, Come on!


냉장고 컨디션이 좋은 날...재료: 현미밥, 참치마요, 콩자반, 연근, 오징어실채무침, 오이지무침, 동치미무무침, 계란, 소시지, 김

오! 컵밥! 너 본지 오래다, 이 맛이로구나!

밑반찬들 다 꺼내 놓고 컵에 밥 한 층에 반찬 한 층 또 밥 한 층에 반찬 한 층... 차곡차곡 쌓으면 된다. 열무김치는 컵밥 한 번 떠먹을 때마다 곁들여 먹어야 하기에 따로 담는다. 특별관리 대상이다.

영롱하여라, 빛깔도 곱구나. 일곱 빛깔 무지개를 닮았구나. 분홍 소시지까지 데코레이션 해주니 셰이크처럼 달콤할 것 같은 느낌도 드는걸.


컵밥을 혼자 먹으며 보이스 트롯을 보는 맛이란!

어느 날은 오롯이 혼자여서 자유로울 때가 있다.


혼자이면 어떠냐? 스스로 즐기면 되었지.

컵밥이면 어떠냐? 집밥이면 되었지.

프리미엄이 아니면 어떠냐? 맛있으면 되었지.


컵밥 먹기 좋은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