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땡땡 Apr 20. 2018

두 번도 세 번도 아닌, 한 번

삶은 씨앗을 뿌렸고, 죽음은 꽃을 피웠다.

 여러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막연하게 두려움이라면 왜 죽음이 두려운지에 대해 고민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은 삶과 죽음을 고뇌하는 현대 작가 ‘데미안 허스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데미안 허스트는 1965년생으로 영국 브리스틀 출신 현대 미술작가입니다. 그는 2007년 전후로 현존하는 현대 미술작가 중 작품가가 가장 높은 순위 1,2위를 다투는 작가로 괴짜 아티스트, 죽음의 예술가 등등의 별칭을 갖고 있는 영국 현대 미술작가이지요. 물론 그가 현대 미술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능력이 가장 컸겠지만, 한 편으론 그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영국의 광고회사 대표이자 컬렉터이면서 사치갤러리의 주인인 찰스 사치의 후원 또한 그를 거장으로 만들었던 하나의 계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움도 있었지만 물론 그의 창의성과 기발한 아이디어는 사실 부정할 수 없는 그만의 능력이며, 그를 거장으로 만든 큰 요소임은 분명합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그리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도 아니었고, 공부에 큰 재능도 없었고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별난 구석이 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영안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시체를 보며 인체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그는 ‘죽음’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체를 그리고 생물학과 해부학을 연결하여 미술에 접목하기도 했고 그는 과학과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두 가지의 재료와 요소를 결합하여 주로 작업에 임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살았고 이후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며,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열었던 ‘프리즈’라는 전시에서 큐레이터를 하며 영국에서 자신의 예술가의 삶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영안실에서의 경험이나 작업들이 쌓이고 그때의 그 죽음에 대한 개념과 고뇌가 연장되어 지금 그의 작업물에서 볼 수 있듯이 포름알데히드 용액이나 알약, 수술용 도구들이 작업에 재료화 되어 현대 미술계를 놀라게 한 작업물로 탄생된 것이 아닐까요.

이후 그는 영안실에서의 경험과 실험 도구 및 약, 수술도구들을 관찰했던 지난날의 작업들을 통해 더욱 죽음에 집중하게 되었고, 죽음을 넘어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며 결국 인간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도착점은 죽음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사실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이 이 과정이 얼마나 허무한 것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려 했습니다. 또한 그 이야기를 뒤집어보면 그는 그렇기에 죽음이란 것이 또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생각하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형태로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다르게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지 알 순 없지만, 결국 우리는 삶의 출발점에서 죽음의 도착점까지 가는 것은 모두가 같다. 그 도착점이 죽음일지라도 그것이 결코 비극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도달하기까지의 삶에 대한 아름다움, 살아가면서 피어나는 열정, 그렇기 때문에 결국 죽음 역시 아름다울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Pill cabinets>

 물론 데미안 허스트는 작품을 통해 죽음과 관련하여 또 다른 시점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약'이 모티브가 된 작업은 데미안 허스트의 어머니가 약에 대한 의존을 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죽음과 멀어지고자 '약'이라는 것에 의존하기도 하고, 의존과 확신을 통해 기계적으로 약을 먹기만 하다가 과다복용으로 약에 취해 또 다른 고통을 경험하기도 하는 아이러니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시선으로 죽음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죽음에 관한 작품들이 있지만 오늘 얘기해 볼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은 '삶과 죽음'입니다.


<Thousand year>


그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를 담은 작품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은 바로 <Thousand years>입니다. 이 작품은 1990년에 제작된 <천년>이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큰 유리관을 두 공간으로 나누어 한쪽은 상자 속에서 구더기를 넣어두었고, 또 다른 한쪽은 죽은 소의 머리를 놓아두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자 속 작은 구멍으로 구더기들은 파리로 자라고 날아서 옆의 또 작은 유리 구멍을 통해 죽은 소의 머리를 뜯어먹기 위해 이동합니다. 그러나 죽은 소의 머리가 놓인 유리관 위에는 전기장치가 설치되어있기 때문에 파리는 물리적인 충격으로 인해 파리는 결국 죽게 됩니다. 이 작업은 소의 머리가 완전히 부패되기까지 계속 진행됩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자 했을까요. 물론 가장 하고 싶은 얘기는 역시나 죽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죽음에 대한, 죽은 소의 머리가 다시 죽고, 파리가 전기장치의 물리적인 충격으로 죽음을 맞이는 하는 그것만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겁니다.                       

그는 저 유리관 속에 죽음만이 아닌 삶도 함께 있음을 얘기합니다. 분명 저 안에서는 구더기라는 것이 파리로 탄생하는 파리의 삶이 있습니다. 또 죽은 소머리의 부패 전의 삶이 있죠. 따라서 작품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데미안 허스트는 늘 그래 왔듯이 단순히 죽음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한 죽음을, 삶과 죽음은 공존하고 있음을 작품에서 늘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삶과 죽음이 무한 반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저 죽은 소의 머리는 시간이 지나면 부패합니다. 부패는 끝을 의미합니다. 전시의 끝이기도 하면서 삶과 죽음의 공존의 최후의 시간이지요. 분명 죽은 소의 머리에도, 구더기에게도, 파리에게도 끝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결국 삶을 살고 죽음으로 가는 인간의 삶과 죽음, 그 사이를 꼭 닮아있습니다.

<Adam and Eve exposed>

  

 다음 작품 역시 '죽음'을 의미하는 <Adam and Eve exposed>라는 2004년 작품입니다. 인류기원 가장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통해 인류의 시작과 끝, 삶의 시작과 죽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삶이라는 시작과 죽음이라는 끝을 맞이하는 점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표현합니다.

 그의 사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이중적인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결국 우리는 죽음으로 향하고 우리가 도달하는 마지막은 우리의 도착점은 ‘죽음’ 일 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허망함 속에서 허무한 삶을 살고 있다는 허무주의적인 정서로 보이기도 하죠. 그렇지만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그는 결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단순한 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에도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꽃도 영원히 살지 않기에 단 한 번 피고 죽음을 맞이하기에 우리는 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같다.


 우리도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단 한 번입니다. 그러한 한 번을 살아가면서 어찌 열정적으로 살지 않겠는가 라고 그는 전자와는 또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의 사상과 개념은 결코 죽음을 앞둔 삶의 허무함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만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중적이지만 그는 분명 삶과 죽음 모두를 수용하고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희로애락이 존재하는 것처럼, 결국 죽음에도 두려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름다운 마침표임을 그는 이야기합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이중적인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삶은 결국 죽고 나서 모든 게 사라지는 것임을 말하는 ‘허무주의적 사고’와 삶과 죽음 사이에 각자가 피우는 ‘개화’로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는 삶.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사고 중 어떤 시선으로 작품을 보셨습니까? 물론 어떤 시선에도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추가해보겠습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이중적 작품론 속에는 한 가지의 조건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단 한번’이라는 조건이지요. 소의 머리에도 파리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삶과 죽음은 단 한 번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조건이 있다고 해도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그렇지만 매 순간 인지할 필요는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단 한 번이지만 그 사이에 오랜 시간 때문에 우리는 간과합니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 사이에도 조건이 존재합니다. 오늘도 역시 단 한 번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두려운 죽음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부끄러운, 자기 스스로 만족할만한 개화를 하지 못하고 맞이하는 죽음일 것입니다. 어떤 형태든 어떤 방식이든, 후회 없는 아름다운 개화를 마음속에 피울 수 있는, 꽃이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에게 너란 존재, 너란 부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