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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땡땡 Aug 19. 2018

나는 이해해

당신 못지않은 당신이 될 때, 그때 나는 너를 이해한다.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 영화는 이미 본지 꽤 되었지만 사실 보고 난 후 주인공의 심정이 도저히 어떤 마음인지 공감되지 않아 한동안 생각을 펼 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그리고 다시 또다시 생각해봐야 했던 이야기 톰 후퍼의 2015년작 '대니쉬 걸' (Denish girl)입니다. 

 1926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두 부부 화가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풍경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와 초상화를 그렸던 아내 게르다의 이야기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예술적인 영감도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일에도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게르다의 초상화 모델인 발레리나 울라가 초상화 모델을 해 줄 날의 약속을 취소하게 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여 남편인 에이나르가 여자 모델이 되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울라가 입어야 할 스타킹을 신고 드레스를 만져보며 잠시 울라가 되어보는 에이나르에게 조금 이상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부드러운 실크 드레스의 촉감이 예사롭지 않던 그 날 이후부터 에이나르는 정체성에 혼동이 오기 시작합니다. 이후 에이나르의 남성성과 초상화 속 여성성이 혼합되면서 중석적인 매력을 갖게 되며 완성된 게르다의 작품은 이전에는 칭찬이 무색했던 평가가 아닌 칭찬일색의 평가를 받게 되면서 게르다는 점점 성장하게 됩니다. 예술적 영감의 완전체가 된 에이나르 아니 에이 르나의 또 다른 자아 '릴리'도 점점 그 존재가 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에이나르는 계속되는 여장을 통해 릴리라는 내면의 자아를 성장시키고 본래 가지고 태어난 남성성을 스스로 죽이려고 합니다. 이후 릴리의 모습을 즐기고 생활의 대부분을 릴리의 모습으로 지내면서 남자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이제는 에이나르의 존재를 완벽히 지우려고 합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 게르다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게 되면서 허망함과 동시에 그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고 하지만 끝끝내 에이나르는 자신의 릴리만 앞세워 고집을 부립니다. 결국 게르다는 사랑하는 마음 그 이상의 마음으로 에이나르가 아닌 릴리로써의 삶을 응원합니다. 정신적인 정체성의 변화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최초의 성전환 수술을 통해 여성이 되고자 하지만 신체의 거부반응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에이나르는 생을 마감하며 영화도 끝이 납니다.


 남자 그리고 여자, 지구에는 이렇게 두 종류의 성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직선의 곧고 강인한 이미지를 갖는 성, 남성. 둥글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진 성, 여성 이렇게 두 가지의 성이 존재합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역시 두 가지의 성을 불투명한 프레임 속에 아주 극명하게 표현합니다. 아마 남성과 여성의 표현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의상을 이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슈트와 코르셋을 함께한 여성 발레리나의 발레복은 정확한 나눔의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여기서부터 영화는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된 재료로 꺼내어 보입니다.

장면 장면마다 남녀를 구분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시각적으로 관객에게 남녀의 뚜렷한 구분을 연상하게 합니다. 곡선의 허리라인과 부드러운 소재의 드레스, 수많은 꽃의 자수, 굵은 컬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붉게 물든 입술과 뺨, 화려한 액세서리까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여성에 반해 직선적이고 심플한 멋스러움을 통해 강한 남성미를 보이는 슈트와 포인트를 주는 타이 그리고 깔끔하게 넘겨 올린 그들의 헤어스타일은 계속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남성과 여성이 갖는 정해두진 않았지만 오랜 세월 우리들의 머릿속에 만들어진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줍니다. 물론 그러한 장치적인 요소뿐 아니라 우리는 이 영화의 시대를 염두해야 합니다. 1926년 남녀의 패션은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 중 하나입니다. 구분이 갈 수밖에 없는 뚜렷한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영화 속 패션은 더욱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고 있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나타내는 남성성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슈트는 곧 남성을 가리키는 가장 보편화된 패션 아이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에이나르를 제외한 남성들은 슈트의 정석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이나르와는 반대로 자신의 성인 남성성을 더욱 부각하고 싶은 인물 또한 존재합니다. 영화의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중간중간 등장하는 작품들입니다. 위 장면에서는 그림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또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인 위치와 권위에 있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했던 시대인지라 배경이나 작품이 주는 분위기에서도 그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에이나르 베게너를 시작으로 캐릭터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에이나르 베게너는 남성의 정체성만을 지녔을 때에도 상당한 감각을 지닌 캐릭터입니다. 풍경화 화가인 그는 작품 활동을 통해 그의 성격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 작품을 오랜 시간을 통해 작업을 하고 덧칠을 통해 색을 채워가는 그의 작업 스타일을 보면 꼼꼼하고 다소 소심하며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패션은 그의 성격과 달리 짙은 남성성을 지니고 있지요. 결국 그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음을 표현합니다.

차분하고 우아한 톤의 컬러를 통해 내면의 여성성이 패션에서 반영되기도 합니다. 테일러드 재킷이 갖는 남성성이 존재하지만 하이웨이스트의 와이드 팬츠를 매치하면서 허리를 강조하는 여성의 의상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흘러내릴듯한 부드러움과 마치 스커트를 연상하게 하는 그의 팬츠는 그가 표출하고픈 그의 내면 속 여성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중반부는 본인 스스로 정체성의 혼동을 의상을 통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성적인 그의 스타일이 극의 흐름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에이나르의 아내 게르다가 등장하면서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상법이 확실하게 표현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은 여기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게르다는 정체성의 혼동을 주는 캐릭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에이나르와는 달리 부드럽지만 강하고, 야심 찬 여류 화가입니다. 성공을 위한 열망이 가득하고 남성과 맞서 인정받겠다는 의지가 늘 불타오릅니다. 그러한 그녀의 성격은 패션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여성의 모습은 드레스나 장신구를 통해 표현되면서도 부츠나 액세서리의 매치를 살펴보면 그녀의 성격을 조금씩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영화는 1920년대 당시 여성들의 패션을 잘 고증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화려하고 곡선의 아름다움을 지향했던 당대의 트렌드를 잘 반영하고 있지요.

 사실 에이나르를 흔들어놓은 여성성은 바로 이 발레리나의 드레스입니다. 부드러운 실크와 풍성한 시폰이 만나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극치를 뒤섞어 놓은 이 드레스가 에이나르의 내면에 깊게 그리고 오래 숨어오던 여성성을 스멀스멀 꺼내게 된 것입니다.

에이나르가 아닌 그의 두 번째 자아 그녀, 릴리입니다. 릴리는 본격적으로 에이나르를 죽이고서 살아가려고 발버둥 칩니다. 영화를 보시면 느끼시겠지만 에이나르 역을 연기한 배우 에디 레드메인은 릴리 역을 위해 1년을 안무가와 함께 여성의 몸짓과 손짓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의 묘한 중성적인 매력이 연기의 한몫을 한 것 아닐까 합니다. 이제는 컬을 살린 머리가, 붉은 입술이,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가 더욱 자연스러운 릴리의 모습입니다. 확실히 당시 남성과 여성의 패션에 있어서 여성이 훨씬 화려함을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뿐 아니라 소재와 컬러까지 모두 심플함과는 거리가 멀고 화려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갈망했던 에이나르는 정신적인 변화뿐 아니라 신체적인 변화까지 고심하며 끝내 수술을 통해 성기 제거, 자궁 이식을 통해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습니다. 그러나 신체 거부 반응을 통한 부작용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곁에는 단 한 사람, 아내이자 사랑하는 사람 게르다가 그의 임종을 지키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영화 대니쉬 걸을 보고 난 후 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영화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게 된 이유는 바로 게르다 때문입니다. 게르다의 행동이 납득이 되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했지만, 생각을 계속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게르다는 에이나르를 한 남자로서 사랑하는 그 마음 이상이었고, 그 마음 이상의 무언가가 '이해'임을 받아들이고 나서 영화를 정말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3의 성은 아마 달리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곳에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우리를 이해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한 것이 있다면 그 말을 전하고 싶다.

그 이상으로 좋은 말이 그 이상으로 더 큰 마음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하나가 있었다.

가슴으로만 당신을 보는 것이 사랑이라 한다면, 가슴과 머리를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며 끝내

당신 못지않은 당신이 되는 것, 내가 그런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그때가 오면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

소리로 전하는 이해가 아니라 내 가슴과 내 머릿속에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는 당신이 있어서 저 발끝 아래부터 올라오는 이해의 울림을 통해 나는 당신을 진짜 내 가슴에 앉혀놓을 수 있었다.


당신 못지않게 내가 당신이 되는 것,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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