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누군가에게는 엄마 차 안에서, 누군가에게는 오락실 게임기 앞에서, 누군가에게는 언니 방 TV에서. 우리는 그 순간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 순간이 우리를 선택했다.
엄마 차에서 들린 랩
베니는 에어로빅 강사였던 어머니의 차에서 처음 힙합을 들었다.
"엄마 차에서 신나는 음악들이 굉장히 많이 나왔어요. 처음 들었던 노래가 뭔지 정확히 기억은 안 하지만, 일단 힙합 음악이었거든요. 엄마한테 '이게 뭐야' 이랬는데 '랩이라는 거야'라고 얘기해 주셨어요."
그녀는 그때 깨달았다. 자기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내는 음악이 있다는 것을.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이미 마음은 결정되어 있었다.
오락실에서 만난 재즈
나는 Ez2dj 앞에서 재즈를 처음 들었다. 2000년대 초반, 동네 오락실. 'Complex'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건반을 두드리는 게임이었는데, 화면 속 음악이 이상했다. 듣던 가요와 달랐다. 멜로디가 어디로 튈지 몰랐다. 불안한데 아름다웠다.
나중에 알았다. 그게 재즈 퓨전이라는 것을. 일본의 카시오페아 같은 밴드들이 만들어낸 소리라는 것을. 오락실 게임기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을 줄은 그때 몰랐다.
아리아제이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녀 역시 게임에서 재즈를 처음 만났다.
"저는 게임 때문에, 게임에 나오는 일본식 퓨전 재즈가 처음에 접하게 된 재즈예요. 카시오페아 이런, 락밴드랑 재즈랑 합쳐진 거."
게임은 그저 게임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음악 입문서였다.
언니가 안 놀아줘서
아리아제이의 시작은 더 아이러니하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 가지고 매일 언니가 TV를 같이 봤어요. 근데 언니가 가수 따라하느라 저랑 안 놀아주잖아요. 저는 일곱 살 여덟 살밖에 안 돼서, 언니랑 너무 놀고 싶은데 안 놀아 주니까. 근데 언니가 가수처럼 되면 나를 봐주고 놀아 줄까,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언니가 보던 뮤직비디오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였다. 일곱 살짜리 아이는 언니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발악은 쇼미더머니4를 보다가 인생이 바뀌었다.
"블랙넛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대를 봤는데, 그때 당시에는 랩에 관심이 1도 없었어요. 블랙넛이 태도 논란이 좀 화두가 됐던 시절이었는데, 그 무대를 보고 '아, 이 사람이 어떤 환경을 살아왔기에 이런 행동을 하게 됐다'라는게 저한테는 설득이 돼서. 저런 얘기를 풀어내는게 정말 멋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저도 저렇게 랩하면 되게 재밌겠다고 생각을 해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는 그날 밤 네이버 지식인에 "랩 어떻게 시작하나요"를 검색했다. 내공 100을 걸고.
친구 아빠의 LP 컬렉션
글럼롤은 유학 시절 친구 집에서 록 음악을 만났다.
"친구의 아빠가 록 음악을 되게 좋아하고, 친구한테 그 음악을 다 전수해 주는 거예요. LP 막 다 있고, 아빠가 되게 광팬이시고. 그래서 저도 자연스럽게 '어, 이 음악은 뭐지?' 내가 듣는 브라이트한 팝이 아니고. 그래서 더 관심이 가서 그때부터 막 엄청 들었던 거 같아요."
음악은 유전되기도 한다. 부모에게서 자식에게, 친구에게서 친구에게. 누군가의 열정이 다른 누군가의 시작이 된다.
공부가 싫어서
클라베는 목동 학원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다가 음악을 만났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아, 나는 왜 살고 있는 걸까?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면서 그때 당시에 음악을 진짜 많이 들었어요. 자우림 노래도 많이 듣고 오아시스 막 이런 거 많이 듣고, 에이브릴 라빈. 그러면서 '아, 이런 음악들을 만들고 불러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녀는 엄마에게 한 달 동안 울고불고 매달렸다. 공부 대신 음악을 하게 해달라고. 결국 성적 90점 이상 유지를 조건으로 허락을 받아냈다.
뮤직비디오 한 편
단테 파크는 콜드와 영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마음을 먹었다.
"한국에도 있구나. 콜드라는 아티스트와 영이라는 프로듀서가 곡을 냈는데, 와, 명반인 거예요. 그중에서 뮤직비디오를 봤는데, '아, 뮤직비디오가 이런 식으로도 작용하는구나. 듣는 것뿐만 아니라 보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구나.' 하면서 '아, 이런 음악 하고 싶다'라고 마음먹게 됐어요."
음악은 귀로만 들어오지 않는다. 때로는 눈으로, 때로는 기억으로, 때로는 감정의 빈틈으로.
중학교 3학년, 방과후 교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2009년, 중학교 3학년. 방과후 기타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이 재즈 기타리스트였다. 그분이 연주하는 걸 보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락실에서 들었던 그 소리와 비슷했다.
"이게 재즈야."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재즈 공연을 보러 갔다. 무대 위 뮤지션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즉흥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악보가 없었다. 대화하듯 연주했다. 한 명이 던지면 다른 한 명이 받았다.
그 순간 알았다. 나는 저걸 해야겠구나.
선택이 아닌 발견
63명의 뮤지션을 인터뷰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아무도 "음악을 선택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음악을 만났다"고 했다. "음악이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소리가 찾아왔고, 그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을 뿐이다.
엄마 차 안에서, 오락실 게임기 앞에서, 언니 방 TV 앞에서, 친구 아빠의 LP 컬렉션 앞에서, 학원 책상 위에서, 유튜브 알고리즘이 띄워준 영상에서.
음악은 운명처럼 찾아온다.
우리는 그저 그 운명을 받아들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