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초인플레이션
엄청난 규모의 전쟁배상금과 이에 대한 독일의 저항은 독일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렸으며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1920년에서 1922년 사이 각종 전쟁배상금으로 정부 재정은 적자 상태에 놓였고 승전국이 요구하는 배상 스케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서 1922년 12월에는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지게 된다.
배상금 재원을 마련하고 늘어난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세금을 다소 올렸지만 이미 패전으로 산업 기반이 무너진 독일 경제는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정부는 돈을 찍어내는 인쇄기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21~23년 사이 통화 공급량은 7,500배나 늘어났다. 오늘날 경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초인플레이션이 시작된 것이다.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진행 과정을 경제사학자 그로스만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전쟁 직후인 1920년 독일의 물가는 전쟁 전인 1914년에 비해 약 10배가량 올랐다. 6년도 안 되는 기간 안에 10배가 오른 것인데 미국의 물가가 10밸 오르는 데 약 59년(1946~2005년)이 걸렸던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빠른 속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의 진행 과정은 더욱 믿기 어렵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22년 6월에 독일의 물가는 다시 10배가 올랐으며, 그다음 10배는 6개월, 그다음은 4개월, 그리고 초인플레이션이 진행되던 당시에는 수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1923년 10월 한 달 동안에는 물가가 거의 300배나 상승했다.
이로 인해 1921년 초까지 미국 달러화 대비 1.5 내지 2.5센트 수준에서 교환되던 마르크화는 1923년 말 0.00000000003센트로 사실상 종이 값도 안 되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초인플레이션은 엄청난 액면가를 지닌 지폐를 양산했다. 전쟁 전에는 100마르크(약 240달러) 화가 가장 큰 금액의 지폐였으나 1923년 말에는 100조 마르크화까지 발행되었다.
100조 마르크화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자 독일은 패전 이후 5년 동안 여섯 번이나 정부가 바뀌었다. 1923년 8월 등장한 구스타프 스트레제만 총리는 바이마르 헌법 7개 조항을 정지시키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대책에 나섰다. 10월에는 새 통화인 렌텐마르크(Rentenmark)의 발행을 위한 법률이 공표되었지만 사회적 혼란이 거듭되면서 초인플레이션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렌텐마르크화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로마로 진군하여 정권을 잡는 것을 본 히틀러는 1923년 11월 9일 뮌헨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혼란은 더욱 커졌다. 1923년 11월에는 빵 한 조각의 가격이 200억 마르크에서 1,400억 마르크로 폭등하면서 독일 전역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약탈과 폭동이 일어났으며, 마르크화의 가치는 전쟁 전에 비해 약 1조 분의 1수준으로 폭락했다. 농민들은 마르크화를 받기를 거부하면서 그해의 농작물을 팔지 않았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베를린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빵과 일자리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고 길가의 상점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는 눈에 보이는 대로 유대인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스트레제마은 통화 문제를 전담할 장관급 자리를 신설하여 11월 13일 햘마르 샤흐트를 임명했고 11월 15일 독일은 휴지 조각에 불과할 정도로 가치가 떨어진 마르크화의 발행을 중지하고 다음 날 렌텐마르크를 발행했다. 새 통화 렌텐마르크는 토지와 건물에 의해 가치가 뒷받침되는 저당증권 형태의 화폐였다.
하지만 이미 지폐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렌텐마르크를 신뢰하지 않았다. 샤흐트는 신뢰를 얻기 위해 발행량을 철저히 통제했다. 발행 한도인 24억 렌텐마르크(약 6억 달러)는 독일의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지극히 작은 액수였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 은행, 대기업들로부터 발행 한도를 늘리라는 압박이 심했지만 샤흐트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새 화폐의 공급량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애덤 퍼거슨이 1975년에 출간한 저서 <돈이 죽을 때>에 기록한 대로 샤흐트는 “단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독일 최악의 금융 혼란을 안정시켰다.” 샤흐트가 새 통화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초 약속한 공급량을 정확히 지켰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발표된 정책을 유지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자 단 수 주일 만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존 마르크화는 거부하던 농민들이 렌텐마르크를 받고 농작물을 내다 팔기 시작한 것이다. 거래가 재개되자 최악의 식량난이 해소되었다. 렌텐마르크가 성공적으로 정착되면서 초인플레이션도 잡히기 시작했다.
샤흐트는 이미 신뢰를 상실하고 날로 가치가 폭락하는 중앙은행의 라이히마르크(Reichsmark)를 퇴출시키기 위해 새 통화인 렌텐마르크화와의 교환비율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으며 적기에 교환비율을 확정하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1923년 11월 12일 라이히마르크는 1달러당 6,300억 마르크 수준에서 교환 거래되었고 재무부의 많은 사람들은 이 비율로 교환비율을 확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샤흐트는 암시장에서 라이히마르크가 지속적으로 폭락하는 것을 지켜보며 추가 폭락을 예측하고 결정을 미루었다. 그의 예상대로 11월 14일 라이히마르크는 달러당 1조 3,000억 마르크로 떨어졌고 다음 날에는 2조 5,000억 마르크로 떨어졌다. 11월 20일 라이히마르크가 달러당 4조 2,000억 마르크까지 떨어지자 샤흐트는 새로 발행한 렌텐마르크와 라이히마르크의 교환비율을 1대 1조로 결정했다. 1914년 달러당 14조 2,000억 마르크로 거래되던 환율을 감안하면 엄청난 폭락이었다. 샤흐트가 통화 문제에 전권을 쥔 지 불과 며칠 사이에 약 80퍼센트 정도가 추가 폭락한 것이다. 샤흐트는 며칠 기다리면서 교환비율을 고민한 끝에 구화폐를 흡수하고 신화폐를 도입하는 비용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다. 그 결과 최초 발행 당시 약 3,000억 달러의 가치를 가지고 있던 라이히마르크를 단지 1조 9,000억 렌텐마르크, 즉 약 4,500만 달러에 환수할 수 있었다.
샤흐트의 맹활약으로 초인플레이션은 잡았지만 초인플레이션이 가져온 사회 혼란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명운을 재촉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를 등장시켜 세계를 또다시 참혹한 대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참고 자료
‘다모클레스의 칼’, 유재수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2015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