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잠에 빠진 소녀를 만나다
들어주세요.
당신만은 제 이야기를
꼭 들어주세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아팠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저를 살리기 위해서는 수술을 다섯 번이나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태어난 지 백일이 되기도 전에 몸에 다섯 번 난도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새 생명이 태어나는 걸 지켜봤습니다. 저와는 다르게 부모님의 마음을 난도질 하지 않는 착한 아이가요. 그 아이는 무럭무럭 커갔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제 키를 따라잡더니 지금은 저보다 훨씬 큰 아이가 되었죠. 제 동생, 그러니까 건우는 운동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운동 신경도 좋아 운동선수가 되고 싶어 했죠. 하지만 집에는 그럴 돈이 없었어요. 저에게 모두 써 버렸거든요. 그날 이후 건우는 삐뚤어져 갔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오토바이를 타며 남의 돈을 빼앗고 여자 친구를 만드는 데에 급급해져갔죠. 어쩌면 건우가 그랬기에 우리가 만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우리가.
제 방은 작습니다. 마치 제 덩치만큼 작고 조그마한 방이죠. 여기 홀로 앉아 있으면 ‘자괴감’이라는 깊은 상념이 머릿속을 채웁니다. 의사선생님은 제가 더 이상 크지 않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 같은 작은 키로 살아갈 것이라고요.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셨습니다. 입으로 말하고 피부로 느끼며 발걸음이 땅에 닿고 입과 코로 숨을 들이키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운동을 잘 하는 것도,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것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전 이해해야 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신이 제게 준 모든 영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어머니는 수술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물질적으로 빈곤한 삶을 살아갈 자신이 어머니에게는 없었다고 해요. 어머니는 건우를 앉혀놓고 설득을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면서 왜 건우가 운동을 할 수 없는지 설득했죠. 아버지는 회사원입니다. 지독할 정도로 일에 충실한 회사원. 20대에 입사한 회사를 지금까지 다니면서 한 번도 나쁜 소리를 듣지 않은 것이 아버지라며 어머니는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들었을 때가 절 낳았을 때라고 합니다. 갑작스레 목돈이 필요해지자 아버지의 안색은 새하얗게 변했다고 하죠. 친척들은 절 포기해라 했다고 합니다. 아직 젊은 나이들이니 차라리 둘째를 낳으라고요. 건우가 처음 태어났다면, 첫째로 건우가 세상에 나왔다면 전 흙을 밟아볼 수 없었을 겁니다. 바람의 향기도 느끼지 못하고 햇볕의 따스함도 몰랐을 겁니다. 아버지는 반대했습니다. 첫 아이였기에. 제가 첫 아이였기에 포기하지 못했다고 하죠. 다섯 번의 수술 동안 어머니는 절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에게 정을 붙이기 힘들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해요. 의사 선생님은 부모님께 말했습니다. 장애를 가지지 않은 것에 만족하라고요. 몸도 마음도 정신도 조금씩은 불편하겠지만 큰 문제없이 살아가는 거에 감사하고 살라고 말이죠.
-형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날 건우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제게 했던 말을.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조금만 더. 건우는 화장실 문을 잠근 채 계속 중얼거렸습니다. 만약 조금 더 일찍 태어났다면 그 애는 절 죽였을 겁니다. 조그마한 팔과 다리를 흔들며 흰 시트에 누운 채 울먹이고 있는 제 육신을 밟아버렸을 겁니다. 그게 우리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었을 겁니다.
건우가 결혼 이야기를 꺼낸 건 한 달쯤 전이었습니다. 부모님에게 익살스러운 얼굴로 결혼해도 되냐고 물어보았죠. 어머니는 아직 고등학교 1학년 밖에 안 된 애가 무슨 결혼이냐고 말하셨고 아버지는 정말 할 생각이 있다면 집에 데려오라고 말하셨습니다. 건우는 많은 여자아이들을 사귀었습니다. 그 애들을 위해 선물을 사고 시간을 냈으며 가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혼낼 때마다 잠깐 즐기고 마는 애들이니 신경 쓸 거 없다고 말했던 애가 처음으로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겁니다.
-형, 궁금하지? 그 애가 어떤 애인지 말이야. 형이 먼저 봐볼래? 형이 보고 엄마랑 아빠한테 좋게 이야기해 주는 거야. 어때? 괜찮지?
건우는 들떠있었습니다. 그런 건우의 모습을 본 건 처음 축구를 시작한 이후 처음이었죠. 무엇이 그리 기쁘냐고 물었더니 그냥 다 좋답니다. 그냥 다. 이제는 자신의 인생이 행복에 젖을 거 같다며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저 때문에 침울해지고 어긋났던 그 애를 누가 이렇게 만들어놓았는지. 그래서 건우를 따라 갔는지도 모릅니다. 건우는 처음으로 당당하게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형이라고요.
-부끄러워할 게 뭐 있어? 어차피 결혼하면 다 알게 될 텐데.
건우가 결혼을 결심한 아이는 작은 키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였습니다. 다예라는 이름의 아이는 마치 공주님처럼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죠. 건우의 관심은 금세 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키가 크고 잘생긴 친구들이 주변을 에워쌌고, 시끄러운 음악과 시중을 드는 여러 가정부 아주머니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한 아이는 저를 알아보더니 인사를 하고 이 자리가 다예의 생일파티라는 것을 알려주었죠. 다예는 돈이 많은 아이라고 합니다. 사업가인 아버지와 청년 멘토로 유명한 어머니.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랍니다. 어릴 적부터 물질적으로 부족함을 겪지 않은,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는 아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진 아이라고요. 그 애가 건우를 가진 것도 당연한 것이라며 어떤 아이는 말을 해줍니다. 다예는 어른들에게도 주눅들 것 없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인사를 받습니다. 당당함보다는 오만함이 느껴지는 모습에 왠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저 아이가 건우에게 어울리는 아이일지.
1층에 사람들이 많아지자 자연스레 발걸음은 2층을 향했습니다. 전 마치 호기심에 찬 꼬마처럼 처음 본 수많은 문에 호기심을 느끼고 하나씩 손잡이를 돌렸습니다. 책들이 가득 찬 방, 선풍기와 이동식 난로가 가득한 방, 지저분한 상자들로 가득한 방들이 보였죠. 그리고 새하얀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햇살에 얼굴을 비치며 침대에 누워 있는 당신을. 전 얼어버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할 수 없었죠. 건우가 뒤에서 어깨를 치지 않았다면 전 그대로 굳어버려 동상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다예는 장난스럽게 침대 옆으로 가더니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문을 닫은 건우는 제 팔을 당겨 침대로 향합니다.
-우리 언니야. 예쁘지? 언니는 아파. 오빠처럼 말이야.
그날 전 기뻤습니다. 제 어리석은 호기심이 가져온 기쁨을 말입니다. 집으로 향하면서 건우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부모님께 잘 이야기해주겠다고요. 건우는 부모님이 좋아하실 것이라 말했습니다. ‘부잣집이잖아, 그 애 집 부잣집이잖아’라는 말을 반복하면서요.
다예는 저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애는 건우와의 시간에만 관심이 있지 그 애를 따다온 저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전 책을 읽는다며 2층으로 올라갑니다. 건우는 제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니 신경 쓰지 말라 합니다. 2층의 오른쪽 통로 다섯 번째 방에는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밝게 빛나는 시트 옆에는 링거와 물통이 놓여있죠. 그녀의 이름은 다연이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잠을 자고 있어서 죽었다고 생각했답니다. 심장은 뛰고 있지만 울지 않는다. 기침은 하지만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다. 의사 선생님들은 결론을 내렸답니다. 자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깨어날 것이다. 그 기적적인 순간만을 기약하며 18년을 기다려왔다고 합니다. 무려 18년을. 영양주사와 물만으로 버텨온 몸은 가냘픕니다. 마치 심이 빠진 빈 볼펜 통처럼. 가정부 아주머니는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 말하십니다. 이 방이 그 증거라면서요. 아무것도 꾸며놓지 않은 새하얀 벽지를 가진 텅 빈 방 한 가운데. 그 한 가운데만이 채워져 있습니다.
-예전에는 공주님 같은 방을 꾸며놓으셨지. 주인님과 마님은 기대하셨던 거야. 큰아가씨가 깨어날 것을. 그게 1년이 되고, 5년이 되고, 10년이 넘어가니까 고통으로 바뀌었지. 큰아가씨의 방은 작은 아가씨에게 넘어가고 이 썰렁한 방에 흰색 침대가 큰아가씨의 자리가 된 거야. 이제 주인님과 마님은 큰아가씨를 보러 오시지도 않으셔. 그분들에게는 없는 존재야.
그녀의 손은 따뜻합니다. 여느 살아있는 것들과 다를 바 없죠. 그녀는 살아있습니다. 원할 겁니다. 소통을. 누군가와의 이야기를. 전 그녀에게 말합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항상 바라왔습니다. 제 말을 들어주기를. 혼잣말을 듣는 것이 아닌 다른 이가 제 말을 들어주기를. 어린 시절 전 혼자였습니다. 아버지는 회사일로 외근을 나가기 부지기수였고 어머니는 주어온 장난감들을 널브러져 놓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죠. 처음 배운 욕은 ‘바보’였습니다. 밖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이 부러워 어머니 몰래 놀이터로 뛰어갔을 때, 저보다 큰 아이들은 손가락질 해대며 놀렸죠. 바보라고요. 전 울음을 터뜨렸어요. 어머니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더니 손바닥으로 등을 때렸죠. ‘왜 나갔어? 대체 왜 나간거야?’ 어머니는 부끄러워하셨어요. 바보 아들이 있다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셨죠. 어머니는 아버지의 능력을 보고 결혼하셨대요. 아버지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거라 여기면서요. 아버지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빚쟁이가 되었어요. 그래요. 모두 저 때문이죠. 제 어깨는 항상 쳐져있어요. 아무리 펴보러 애를 써도 펴지지가 않아요. 건우는 제가 죄인이라서 그런 거래요. 그래서 다들 절 싫어하고 무시하는 거래요.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요. 제가 외롭다는 것을요. 당신은 들어주겠죠? 제 이야기를. 말을 할 수 없는 당신만은 그저, 그저 제 이야기를 들어주겠죠?
어머니는 건우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건우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워도, 밤새 pc방에 있다가 들어와도 건우를 탓하지 않습니다. 모든 잘못은 저 때문입니다. 저만 아니었다면 건우는 운동을 했겠죠. 좋은 운동화와 회비를 내고 운동을 했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당신과 같은 집에서 태어났다면 건우는 행복했을 겁니다. 다예처럼 말이죠. 다예는 밝습니다. 항상 미소를 짓도 다니며 어깨를 펴고 다니는 모습이 당당합니다. 다들 다예를 좋아합니다. 가끔은 부럽습니다. 건우로 저리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건우도 다예처럼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못 만났을까요? 지금처럼 내가 당신의 손을 잡은 채 이야기할 수 없었을까요? 당신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요. 그저 계속 잠들어 있었으면 해요. 당신마저 떠나가 버린다면 전 살 수 없을 거예요, 절대로.
건우가 한 아이의 멱살을 잡습니다. 주변에 아이들이 모여듭니다. 전 읽던 책을 덮고 그곳을 향합니다. 건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옹기종기 모여든 아이들에 의해 동생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버립니다. 건우의 목소리만이 복도에 울립니다.
-함부로 입 놀리지마, 새끼야. 네가 뭔데 내 형한테 함부로 말해?
주먹소리가 들립니다. 벽에 부딪치는 소리. 발길질 소리. 등골이 서려옵니다. 무섭습니다. 누군가를 때린다는 것이. 다른 이에게 아픔을 안겨준다는 것이.
-너희들도 잘 들어! 난 선배라고 봐주거나 그런 거 없어. 내 형한테 뭐라고 그러는 건 나한테 뭐라고 그러는 거랑 같아. 알았어? 내 앞에서 우리 형 이야기하는 거 걸려봐.
아이들은 수군거립니다. 빨리 자리로 돌아갑니다. 차라리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난 내 자리에 있는 거뿐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바라보는 거다. 그래, 아이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다. 이렇게 합리화를 시켜봅니다. 잘못한 건 저 아이들이지 내가 아니다. 내가, 내가 아니다. ‘네 형은 태어나지 말았어야했어.’ 어머니의 목소리. ‘너 때문에 내가 집에 못 들어오는 거야. 못 들어오는 거라고!’ 술에 취한 아버지의 목소리. ‘형만 태어나지 않았다면, 형만 태어나지 않았다면……’ 문이 잠긴 방 안에서 들려오는 건우의 목소리. 숨이 막혀옵니다. 숨고 싶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할 곳에 제 몸을 숨기고 싶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가요? 저에게 어머니란 ‘고통’입니다. 어머니가 겪는 고통의 전부가 저라면 제가 겪는 고통의 반은 어머니죠. 외할머니는 예전에 어머니가 잘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 당신이 사는 집만큼은 아니지만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죠. 외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를 어머니는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충격에 빠져 잠도 이루지 못했다고 하셨죠. 그때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에게 말했답니다. ‘당신이 능력이 없어서 그래.’ 밥 먹듯이 그 말을 듣던 어머니는 여기게 되었죠.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예전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래요.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택했죠. 어머니는 꿈을 꾸셨다고 해요. 큰 집에서 가정부를 두고 해외여행을 다니며 진귀한 외국음식을 먹고 다니는 꿈을요. 그 꿈을 부셔버린 것이 저에요. 제 수술비용이 당신에게는 우습게 느껴질지 몰라요. 만약 당신이 눈을 뜨게 된다면 알게 될 거예요. 당신 집이 얼마나 부자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부러워하는지. 당신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일 거예요. 그들 사이에서 당신은 당당해지겠죠.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허리가 꼿꼿해지고. 그때가 되면 전 당신의 눈에 들어오지 않겠죠. 이렇게 작고 형편없는 존재 따위는요.
건우의 표정이 굳어있습니다. 손을 움켜쥐고 이를 악문 것이 무언가에 화가 난 거 같습니다. 건우는 저를 보더니 애써 미소를 짓습니다. 책은 잘 봤냐면서요. 다예에게 인사하고 가야 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니 이미 했다면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찬 밤공기가 얼굴을 스칩니다. 건우의 입에서 입김이 올라옵니다.
-형, 형은 뭐가 되고 싶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을 찾습니다.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작고 못생긴 재능 없는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없다고 대답합니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건우는 언성을 높여 다시 묻습니다.
-그냥 되고 싶은 걸 말하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보고 경외감이나 동경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에게 꿈이란 사치라 여깁니다. 건우가 운동에 재능이 있어 축구를 하고 싶어 했듯, 호날두라는 축구 선수를 좋아해 축구 선수가 되기를 바랐듯 저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건우는 화를 냅니다. 답답한 눈으로 절 바라보며 소리칩니다.
-그럼 찾아! 찾아서 뭐라도 하라고. 평생 그렇게 살면 내가 뭐라고 말해? 형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되냐고?
건우의 발걸음은 제멋대로입니다. 좌우를 맞추지 못하고 못나게 걸어갑니다. 보기 싫을 정도로 못나게.
당신은 꿈이 있나요? 이 새하얀 시트 위에서 일어나면 날개를 펼치고 싶은 소망이라는 게. 밤새 생각했습니다. 난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걸까?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러다 생각났어요.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건 당신에게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만이 유일하게 절 비웃을 수 없기에.
-여기 있을 줄 알았어. 것 봐. 내 말이 맞지?
재빨리 손을 놓습니다. 다예는 잔뜩 들뜬 얼굴로 저를 향해 손가락질 합니다.
-내가 말했잖아. 분명 여기에 있을 거라고. 책 읽기는 무슨.
얼굴이 붉어집니다. 큰 비밀을 들킨 거처럼 몸을 움츠립니다. 마치 죄인이 된 기분입니다. 건우는 저와 눈도 마주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빠는 왜 우리 언니를 좋아하는 거야? 말해본 적도 없잖아?
변명을 내뱉습니다. 아니라고요. 그저 조용히 책 읽을 장소가 필요해서 여기 들어와 있었을 뿐이라고. 거짓말은 곧 들통 납니다. ‘손에 아무것도 없잖아?’ 건우는 고개를 흔들며 다예의 말을 막습니다.
-말 한 마디 안 해봤는데 좋아한다는 것은 억측이야. 이 방이 햇빛이 잘 드니까 여기에 있는 거겠지. 형 방은 햇빛이 안 드니까.
다예는 입을 내밀고는 자기 언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립니다.
-난 언니가 안 일어났으면 좋겠어. 왠지 내걸 전부 빼앗길 거 같은 느낌이거든.
갑작스러운 말에 머리가 멍해집니다. 예전에 건우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형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다예는 여기고 있습니다. 그녀가 죽었다고요. 아예 죽었다 여기기에 스스럼없이 옆에 다가섭니다. 아름다운 인형. 다예는 그저 인형을 바라본다고 여길 겁니다. 감상하고 돌보아주기만 하면 되는 인형이기에 자신의 곁에 두는 것에 스스럼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깨어난다면. 인형이 아닌 사람이 된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나눠야 된다는 생각에 상실감을 느낄 겁니다. 건우가 그랬던 거처럼.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언니가 일어났으면 좋겠어? 아니면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어?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킵니다. 그 긴 잠에서 깨어나면. 새로운 세계 속에 전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 외길에 홀로 던져지고 싶지 않습니다. 건우는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라며 말을 자릅니다.
-당연한 걸 왜 물어봐? 누가 이렇게 계속 누워있는 걸 바라겠어? 세상에 그런 사람은 너 하나뿐일 걸?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난 솔직한 내 마음을 이야기했을 뿐이라고. 너도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내뱉지 못하는 말이 있을 거 아냐?
-없어. 그런 말 따위.
건우는 모릅니다. 마음속에 품은 말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자신은 다 내뱉고 있다 여기나 깊은 심연에 잠들어 있는 생각이 누구나 있다는 것을요. 말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생 이대로 남아있었으면 한다. 내가 늙어서 머리가 다 하얘지고 지팡이를 짚고 다닐 때에도 그녀는 이대로 이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저 부드러운 손을 잡고 이야기할 수 있게.
솔직히 당신이 부럽습니다. 당신은 하루 종일 잠을 청합니다. 잠, 그래요, 잠. 내가 옆에서 아무리 말을 해도 당신은 알아들을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다른 세계에 있습니다. 그 세계는 불행과 냉혹함과는 거리가 멀 겁니다. 포근함과 따스함에 뒤덮인 채 미소를 짓고 있겠죠. 그게 당신이 있는 곳의 전부일 겁니다. 제가 머무는 세계는 무섭습니다. 어릴 적 수술은 목숨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앗아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생명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으니 감수하고 살아가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생명만 가지고 살아가기에 이곳은 척박하고 메말라 있습니다. 만약 생명이 삶의 모든 것이라면 자살이라는 선택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선택지 따위는 지워져 버렸을 겁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을 만듭니다. 그 기준에 도달하는 사람만을 취급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말이죠. 전 한 번도 그 기준에 부합한 적이 없습니다. 전 불량품입니다. 생산과정에서 폐기되지 않은 채 판매대에 걸린 것만으로 고마워해야 된다는 말을 듣는 불량품. 사람들은 불량품의 마음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장 난 시계를 쳐다보지 않는 거처럼. 당신의 동생, 그러니까 다예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당신이 불량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도 다예도 당신의 곁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만약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영원히 잠에 빠지더라도 어느 누구도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일어나지 마세요. 제발……제발…….
건우에게 물어봅니다. 왜 다예와 헤어졌냐고. 부모님께 매일 결혼시켜 달라며 졸라대던 애가 갑자기 마음을 왜 바꿨냐고. 건우는 귀찮은 듯이 말끝을 흐립니다.
-뭐, 그렇게 됐어.
다시 물어봅니다. 왜 헤어졌냐고. 대체 왜 마음을 그리 쉽게 접었냐고. 건우의 언성이 올라갑니다.
-아, 짜증나서 헤어졌다고. 형은 몰라. 걔가 얼마나 실없고 제멋대로인지. 처음에는 귀엽다 생각해서 받아주었는데 그런 것도 한 두 번이어야지. 그게 쌓이고 쌓이면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알아? 하긴, 여자도 만나본 적 없는 형이 어떻게 알겠어?
화를 냅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소리를 질러봅니다. 울분이 솟구칩니다. 다예의 집에 찾아갔을 때, 가정부 아주머니는 말하셨습니다. 이제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요. 다예가 방에서 울고 있다고 했습니다. 건우가 그 애에게 헤어지자 말을 한 겁니다. 제 머릿속에는 두려움이 차올랐습니다.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두려움. 다시는 햇살이 찬란한 방에서 그 부드러운 손을 잡은 채 조용히 제 이야기를 내뱉을 수 없다는 실망감에 말이죠. 선천적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어둠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둠에 대한 두려움과 빛에 대한 갈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요. 하지만 빛을 본 장님은. 빛을 알아버린 장님은 갑자기 찾아온 어둠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자신이 살던 세계가 달라진 것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제가 살던 세계는 건우에 의해 바뀌었습니다. 건우가 초대한 생일파티에서 만난 다예, 다예의 집 2층의 새하얀 방에서 만난 그녀. 그 모든 것들이 나란 존재를 이루고 있던 세계를 바꿔놓았습니다. 건우는 그걸 파괴했습니다. 빛을 주고 다시 앗아간 겁니다. 살아갈 수 없게. 건우에게 달려듭니다. 제 조그마한 주먹이 그 애의 배를 때립니다. 건우는 절 침대로 던져버립니다. 다시 달려듭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화가 납니다. 제 팔을 잡아 끌던 건우는 이내 포기한 채 제가 뻗는 주먹을 모두 맞습니다. 자리에 주저앉더니 눈물을 흘립니다. 볼품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형, 우리 같이 죽자. 이따위로 살아봐야 뭐하겠어? 그냥, 그냥 같이 죽자. 우리가 죽어서 엄마, 아빠한테 새로 살라고 기회를 주자. 괜히 우리 때문에 고생하지 않게 그냥 죽자.
온몸에 힘이 빠집니다. 건우를 따라 눈물이 흐릅니다. 건우는 절 끌어안습니다. 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손이 제 목을 향합니다. 점점, 점점 더 강하게 건우의 손이 제 목을 조릅니다. 발버둥 칩니다. 살기 위해 손을 뻗습니다. 제 손도 건우의 목에 닿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목을 조릅니다. 숨이 턱 막혀 완전히 끊어지기를 바라면서. 어머니는 장바구니로 우리 둘을 때립니다. 장바구니의 매질은 저를 향합니다. 제 몸은 계속 매를 맞습니다.
-동생한테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짓이냐고?
제 형편없는 작은 육신은 멍들어갑니다. 아니, 그보다 더 멍들어가는 건 마음입니다. 제가 잊고 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납니다. 제가 누구였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사치를 부리고 어떤 잘못을 했는지. 어머니는 알려줍니다. 빨리 꿈에서 깨어나라고.
한 번 이부자리에 오줌을 싼 아이는 평생 오줌싸개라 불린답니다. 또 다른 잘못을 범하기 전까지 하나의 주홍글씨가 박혀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전 탄생과 동시에 주홍글씨를 받았습니다. 거대한 주홍글씨가 등에 박혔죠. 제 어깨는 펴지지 않습니다. 움츠러든 모습은 모두에게 알려줍니다. 저는 죄인이라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 잘못한 사람이 다시 잘못을 한다면 어떨까? 그 잘못이 이전의 잘못보다 작은 것이라면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그저 넘기지 않을까? 그럴 줄 알았다고. 죄인이기에 잘못을 한 게 당연한 것이라고. 초등학교 때 한 아이가 저를 때렸습니다. 그 아이는 전에도 다른 아이를 때렸고, 또 전에도 다른 아이를 때렸습니다. 담임선생님은 그 아이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넘어갔습니다. ‘또 너냐?’ 이 한 마디가 다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큰 사고를 쳤다는 것을. 누군가를 심하게 다치게 했다는 것을요. 그러기에 살짝 멍이든 제 상처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부모님은 절 이해할 것입니다. 건우도, 다예도. 그리고 당신도 말입니다. 당신은 절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해 준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못했더라도 이해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제 유일한 소통의 통로니까요.
화려한 불빛이 보입니다. 수십 개의 창에서 밝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정원의 잔디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개들이 뒹굴어댑니다. 세 명의 가정부 아주머니들은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닙니다. 다예의 화려한 생일파티에서 남겨진 음식과 더러워진 카페트는 모두 버려집니다. 다예는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옷을 원하면 입을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죠. 그 세계에 들어섰을 때 느껴졌던 건 이질감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밥을 먹었을 때는 느낄 수 없던 기분이었죠. 같은 땅이 아닌 다른 땅을 밟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피했습니다. 일부러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죠.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 나와는 다른 공간에 사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 손잡이를 돌렸어요. 밝게 빛나는 당신의 모습은 저와 같은 세계에 공존하는 존재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낯설지 않았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 순간 제 몸은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그 아름다움에 즉각 반응을 했습니다. 그 순간 제가 봐왔던 세계는 바뀌었습니다. 저 자신에게 변화가 온 것은 아닙니다. 전 여전히 말없고 둔하며 다른 이들에게 말 한 마디 걸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깊은 마음속만은 짙게 깔려있던 안개를 벗었습니다. 지저분하게 깔려있던 응어리들이 하나하나 새어나왔습니다. 저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초인종을 누릅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물어봅니다. 전 일부러 당신이 아닌 다예를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 건우가 전할 말이 있어서 보냈다면서요. 다예는 저를 자신의 방으로 부릅니다. 형형색색의 가구들과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옷가지가 널려있는 방에는 가족사진이 걸려있습니다. 당신을 제외한 세 식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찍은 사진이요. 죄책감이 한결 덜어집니다. 전 그들이 당신을 사랑할까봐 걱정되었습니다. 너무 사랑해서 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다예는 곧 당신을 잊어버릴 겁니다. 물론 며칠간은 투정을 부리겠죠. 마치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하지만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당신을 미칠 정도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요. 다예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건우가 아직 마음이 남아있으며 만나고 싶어 하는데 쑥스러워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요. 그 애가 저에게 부탁해 다예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 만나게 해 달라했다고 말입니다. 다예는 미소를 짓습니다. 이 아이는 바로 전화를 걸 겁니다. 그리고 만나기 위해 나가겠죠. 가정부들은 그녀의 치장을 돕기에 바쁠 것입니다. 전 다예의 방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계단을 오릅니다. 당신의 방문의 손잡이를 돌립니다. 불이 꺼진 방 안을 비추는 건 달빛입니다. 달빛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새하얗습니다. 어떠한 죄악도 지워버릴 만큼. 당신의 손을 잡고 말합니다. 저와 함께 가요. 전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만이 날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체육선생님은 운동을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강압적으로 시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기 싫은 사람은 하지 말라며 운동장에도 나오지 못하게 했죠. 홀로 교실을 지키는 건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끔 가는 소풍은 괴로웠습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모두를 오르게 하기 위해 선생님들은 아래에서부터 쉼 없이 소리질러댔죠. 다리의 근육들이 소리칠 정도로 아팠지만 참고 또 참았습니다. 결국 눈물을 흘리고서야 선생님들은 절 내려 보내주었어요. 만약 그때 산을 올랐다면 지금 당신을 데리고 가는 이 길이 조금은 더 수월했을까요? 전 당신을 깃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가벼워서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되는 깃털. 하지만 제 작은 몸은 당신의 가냘픈 무게조차 버티기 힘듭니다. 비가 쏟아집니다. 비는 불행의 산실이라고 합니다. 내리치는 물줄기는 눈도, 귀도, 마음도 모두 닫아버립니다. 아무 것도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게. 지금 제가 느끼는 건 온몸에 전해지는 아픔뿐입니다. 빨리 도망치고 싶습니다. 이 높은 산에서 빨리 내려가고 싶습니다. 빗줄기가 세차질수록 심장은 더욱 고동칩니다. 느려지는 발걸음에 초조함이 더해집니다. 멀리서 소리가 들립니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 멈추라는 소리. 뒤를 돌아봅니다. 건우가 서 있습니다. 아니, 건우뿐만이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예, 다예의 부모님. 그리고 경찰들. 건우는 소리칩니다.
-형, 멈춰. 멈추라고. 대체 뭐하는 짓이야?
숨이 떨려옵니다. 무섭습니다.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 차갑습니다. 당신이 차가우니 저도 차가워집니다. 얼굴이 질려옵니다. 도망치기 위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경찰이 총구를 겨눕니다. ‘꼼짝 마라’, ‘넌 포위됐다’, ‘빨리 이쪽으로 와’ 두렵습니다. 제 두려움은 돌을 들게 만듭니다. 그 돌은 당신의 얼굴을 향합니다. 용서하세요. 전 당신과 함께 도망가고 싶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잡히면 전 당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소리칩니다. 총을 내리라고. 당장 물러서라고. 그러지 않으면 당신을 죽여 버리겠다고.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울음소리, 비명소리, 역경을 내는 소리. 어지럽습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섞여 갑니다. 건우의 큰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형, 대체 왜 그래? 제발 그만해. 그만 하라고! 얼마나 더 내 앞길을 막아야 속이 시원한 거야?
분합니다. 분함에 치가 떨려옵니다. 왜 날 죄인으로 보는 거야? 대체 왜 넌 날, 날 죄인으로 몰아가는 거야? 소리칩니다. 난 죄인이 아니야! 난 죄인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냥 보내줘! 제발 보내달라고!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다예의 가족들을 가리킵니다.
-저 모습이 안 보이니? 네가 그런 거야. 더 큰 사고 치기 전에 그만둬라. 어서 그만둬!
떠오릅니다. 어머니가 했던 말이.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어머니의 그 한 마디가.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무능한 아버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신경을 쓰며 고인 진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아버지. 싫습니다. 이제는 다, 다 싫습니다. 전 떠날 겁니다. 당신들을 버리고 그녀와 가버릴 것입니다.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경찰들이 움직이려하자 다시 돌을 움켜쥡니다. 경찰 중 한 사람이 말합니다.
-학생, 그만둬. 미래를 생각해야지. 지금 이러면 너한테 더 곤란해질 뿐이야.
제 미래는 그녀에게 있습니다. 그녀가 없으면 미래는 없습니다. 답답한 어둠 속에서 살아가기에 단지 붙어있는 숨만으로는 벅찹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기쁨만으로 살아가기에 제 주홍글씨는 너무나 큽니다. 빗줄기는 더 거세집니다. 가족들의 얼굴은 굳어가고 제 다리는 비틀거리는 것을 넘어 주저앉아 버립니다. 돌을 집어 올립니다. 건우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같이 죽자. 그냥 같이 죽어버리자. 당신은 계속 잠을 청할 겁니다. 그것이 현실이던 죽음이던 상관없을 겁니다. 제가 당신의 세계에 가는 길은 죽음뿐입니다. 같이, 같이 죽는 길 뿐입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집니다. 당신의 손이 제 뺨을 쓰다듭니다. 전 바라봅니다. 당신의 얼굴을.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비치는 투명한 눈동자를. 따뜻합니다. 당신은 제 상상 속에서만 따뜻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넘어온 이 세계 속에서도 당신은 따뜻하기만 합니다. 그 따스함에 전 무너집니다. 제가 진 주홍글씨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 채 지워져갑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릅니다. 엉엉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던 저의 투정을 당신이 받아줍니다.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먹구름들이 소나기가 되어 흘러내립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한 마디가 매어진 목구멍에서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꼭 전해주고 싶은 한 마디가.
저는 당신을 데리고 갈 겁니다. 저 높은 산 너머 다른 도시에서 우리는 함께할 겁니다. 당신이 싫어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넓은 방과 푹신한 침대, 시원한 물과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방을 떠나고 싶지 않아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사람이라면, 정말 인형이 아닌 사람이라면 소통을 하길 원한다고 저는 여깁니다. 전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해도 당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고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따뜻한 사람입니다. 제가 잡고 있는 이 손이 이야기해줍니다.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몸은 머리보다 정직합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그 세계는 따뜻합니다. 자상한 어머니와 유머러스한 아버지, 붙임성 강한 동생이 있는 그곳에서 당신은 행복을 느낍니다. 말하고 싶을 겁니다. 그 세계에 대해서.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저에게 말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전 듣고 있습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이야기를. 당신이 입이 아닌 피부로 말하는 그 이야기를요. 그러기에 전 당신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해야 합니다. 그 세계를. 그 따뜻한 마음을. 약한 사람도, 강한 사람도, 선인도, 죄인도, 악인도, 지위도, 계층도, 명예도 없는 그 세계에 함께 가고 싶어요. 그럴 거죠? 같이 갈 거죠? 전 당신을 믿습니다. 영원히 저와 함께 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