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그의 기분은 흐림 때때로 왈츠
그날도 비가 내렸다. 버스시간이 밀릴 줄 알고 일찍 출발했다가 강의시간 40분 전에 도착했다. 과방에 택호가 있는 걸 확인하고 강의실을 향했다. 교수도 학생도 자리를 떠난 그곳에 진석은 혼자 남아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기도를 드린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나가려고 했다. 우산이 문을 치면서 진석이 고개를 돌렸다.
-아, 미진이구나. 수업 시작하려면 한참 남지 않았어?
-비가 와서 막힐 줄 알았는데 빨리 빠지더라고요. 그런데 오빠는 여기서 뭐하세요?
-아, 그게 너무 감격해서. 글쎄, 교수님이 내 묘사를 보고 신경숙 작가 같다고 하더라. 그 소리를 듣는데 기분이 너무 좋은 거야.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랄까. 내려오기 싫어서 그대로 있었어. 나 3일을 새벽 5시까지 이 소설 과제 하나만 주구장창 썼거든. 몸은 너무 피곤한데 자고 싶지 않다. 자고 나면 지금이 꿈처럼 사라질 거 같아.
-오빠는 글 쓰는 게 그렇게 좋아요?
-글은 내가 보여주고 싶은 진짜 나니까. 내 글을 인정하는 건 날 인정하는 거라고 생각해. 오늘은 교수님도, 애들도 다 날 인정한 날이야.
-저도, 오빠 인정해요.
응? 진석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얼떨결에 나와 버린 진심에 미진은 우산을 꽉 쥐었다. 어떤 말을 내뱉어야 좋을지 몰랐다. 아니, 글보다 진석이란 사람을 더 인정하고 좋아한다는 말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알맞은 단어를 조합할 수 없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주전자처럼 뇌에서 소리가 나기 직전,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진석이 두 손을 잡았다.
-고마워.
그 한 마디가 두 사람을 하나로 이었다. 아직 그 붉은 실이 이어져있다면 사랑은 그 자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아파트 현관에서 우산을 턴 미진은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한층 한층 내려오는 소리가 카운트다운처럼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불 꺼진 거실 사이로 희미한 빛이 보인다. 그 장소는 미진의 방이다. 살짝 열린 문틈을 벌린 순간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청하는 진석이 보인다. 바닥에는 잘게 찢긴 종이조각이 흩어져 있다. 방을 나가려는 순간, 현관에 두는 걸 깜빡한 우산이 화장대를 건드렸다. 그 소리에 눈을 뜬 진석은 새처럼 붕 뛰어올라 미진 앞에 착지한다.
-당신 무슨 생각인 거야.
-뭐, 뭐야.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건데?
-외출 전에 말투가 이상해서, 아니, 너무 슬픈 거야.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생각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 좀 뒤졌더니. 하, 그래, 이번에도 내가 실수한 거 같다. 난 항상 실수투성이지.
-아니야, 이번에는 내 실수야. 난 당신이 다른 사람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혼하려고 생각했던 거야.
-왜,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당신이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그래서 이혼서류 준비했어. 당신이 좋아한다고 착각한 사람도 만났고. 내 오해는 다 풀렸어. 그런데 해답이 나온 건 아냐. 난 아직도 당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소설 쓰고 영화 만드는 걸 좋아했던 게 아니야?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고 있잖아.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그런데 왜 불행한 거야?
-난 재능이 없어.
뭐라고? 예기치 못한 말보다 강한 망치가 머리를 내리쳤다.
-이번에 준비하던 시나리오, 12년을 쓴 거야. 내가 조금이라도 유명해지면 아카데미 시상식 가겠다는 생각으로 12년 동안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비장의 무기라고. 그런데 촬영을 앞두고 보니까 정말 별로더라. 이게 뭐지? 난 이런 걸 비장의 무기라고 가지고 있었나. 처음 눈을 뜨고 거울을 본 기분이었어. 그러고 나니까 뒤에 비친 당신이 보이더라.
-설마, 아니지?
-난 말이지, 난파선이야. 혼자 가라앉으면 되는데 갑판에 사람들이 자꾸 올라타. 왜 그런 줄 알아? 내가 유람선이라고 속이고 다녔거든. 처음 회사 안 나간 날 있잖아. 당신 노트북에서 파일 찾았어. 교내 문학상 받았던 그 작품. 나 그거 질투심 때문에 안 읽었거든. 보고 나니까 알겠더라.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아니, 아니야, 오빠. 내가 선택한 거야. 오빠 실수가 아니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뭔 짓을 한 거지. 이건 우리의 행복이 아니잖아.
-우리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중요한 건 오빠라고. 오빠 계속 글 쓰고 영화 만들어.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 그래도 돼. 내가 좋다는데 왜 오빠가 아니라고 그래.
-이렇게 사는 게 좋을 리가 없잖아.
미진은 침대 위에 손을 대 몸을 지탱한다. 당장 누워 잠을 청하고 싶다. 눈을 뜨고 나면 부스스한 얼굴로 밤새 쓴 시나리오 이야기를 하는 진석이 나타나길 원한다. 아니, 지금 잠들면 사라져버릴지 몰라. 이 남자는 상처를 보여준 걸 부끄럽게 여기고 달아날 것이다.
-내가 결혼할 때 말했잖아. 난 괜찮아. 출판사 일이 재미있고 좋아. 창작 때문에 밤새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밤새 생각하느라 불면증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편해.
-그때도 그랬지. 난 너랑 결혼하면 아르바이트라도 하려고 했어. 글은 밤에 써도 되니까. 그런데 자기는 작가로 돈을 벌고 싶다는 내 말에 그러라고 했어. 필명으로 연재하던 웹소설도 끝내고, 출판제의도 모두 거절했어. 그리고 당신을 지웠어. 솔직히 그땐 좋았어. 나, 당신을 질투했으니까.
-같은 일을 하면 승부욕이 느껴지는 게 당연한 감정이야. 내가 당신한테 졌어. 그뿐이라고. 난 자기 팬이야. 자기보다 잘 쓸 자신이 없어서 포기한 거라고.
-그러면! 그러면 당신보다 잘 써야지. 그런데 이게 뭐야. 며칠 전에 자기 없을 때 엄마가 와서 그러더라. 넌 들어가기 싫은 편의점이라고. 24시간 불만만 주구장창 내뱉고 쓸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대. 조용히 글만 쓰고 싶다고 해서 자취방도 구해주고, 아르바이트도 안 시키고, 취업부담도 안 준 결과물이 지금의 나라고 하더라.
-그래도 행복했잖아. 자기가 좋으면 돼. 세상에는 행복한 일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 한 번도 행복한 적 없어. 한 번도,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진석은 주저앉는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남편을 아내는 껴안는다.
-엄마가, 엄마가 자기랑 먹으라고 홍시 줬는데 내가 다 먹어버렸어. 나 정말 한심한 거 있지. 바다에 가고 싶은데 욕조 안도 두려워 해. 하늘을 날고 싶은데 롤러코스터도 못 타. 이런 내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아니, 할 수 있어. 우린 해낼 거야. 꼭 그럴 거야. 아니, 그래야 해.
진석은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누워서 매일 새벽 3시까지 노트북으로 글을 썼다. 이것저것 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지나 있더라. 그의 자취방에는 바닥에 책이 가득했다. 이걸 다 읽은 거야? 아니, 다는 아니고 대부분.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 이 사람들은 자기가 멋진 이야기를 쓸 줄 알았을까. 내가 좋아하는 락밴드 있잖아. 지금은 해체한 오아시스. 거기 보컬인 리암 갤러거가 이런 말을 했어. 자기 형제들은 방에 틀어박혀 시간만 보내고 있었는데 세계적인 밴드가 되었다는 거야. 어쩌면 이 모든 건 우리가 이 방 안에 있을 때 신이 계획한 게 아닌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 나도 느리지만 신이 계획한 방향대로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라도 안 하면 답답한 거 있지. 그때 미진은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었다. 신이 우리 편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