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눈물은 남이 봐야 의미있다
진석이 우울증 판정을 받은 후,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반년이 지났다. 상진은 첫 중편소설을 썼다. 노년에 이른 한 여자가 첫사랑을 만나면서 자신의 지난 세월들을 돌아보는 이야기. 수많은 대화가 오갔지만 그 안에서 다시 과거를 택했다. 본승의 담당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한 번의 트러블 이후 본승은 속내를 드러내는데 조심스러워졌다. 편집장의 의견만 구하는 모습을 보던 은실은 결단을 내렸다. 또 다른 결단은 미진의 행동에서 나타났다. 풀린 눈빛으로 자주 멍을 때리고 화장실에서 우는 모습을 들켰다. 명지에게 자주 화를 낸 점도 은실의 마음을 자극했을 것이다.
-자기는 우리랑 다르잖아. 감수성이 특별하니까 우리가 모르는 예민한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참에 감정도 해소할 겸 소설 써보는 건 어때? 휴가도 떠날 겸 해서.
미진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까만 글자를 들여 보고 의미 없는 대화를 반복해야 잠시나마 진석의 얼굴을 잊을 수 있었다. 한 집에 부부로 살면서 얼굴을 볼 수 없는 기분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거실이 조용해지면 남편은 모습을 드러낸다. 문틈으로 바라본 그 모습은 기력을 모두 바쳐 영혼이 사라진 노인과 같다. 차라리 화를 내고 울음이라도 터뜨린다면 함께 감정을 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치고 박고 싸우다 보면 들끓는 박동을 이기지 못해 피부 밖으로 증기를 뿜으며 자신을 토해낼 것이다. 그때 진석의 입에서 당신을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미진은 견딜 수 있을까.
다은은 친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도희를 찾아냈다. 바뀐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 지인에 지인을 동원했다. 걔 중에는 다시 연락하기 싫은 사람도 있었다. 도희에 대한 기억은 편입생이 전부일 만큼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었다. 학교가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위해 집을 향했고, 공강 시간이면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도서관이라는 말에 느낌이 확 오더라. 뭐, 둘이 거기서 꽁냥꽁냥 데이트를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은 다 했어. 그래야 나올 거 같더라고.
대기업에 다니는 도희는 프로젝트가 있어 시간을 내기 곤란하다는 말로 연락을 끊으려고 했다. 도희를 만나지 못하면 미진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거다. 혼자 끙끙거리며 동굴 속에서 비명을 지르겠지. 너무 깊숙하게 들어가 어둠에 익숙해지면 다시 빛을 본 순간 놀라서 심장이 멎을지도 몰라. 다은은 비굴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김진석이 우울증에 걸렸다. 그 원인이 어쩌면 당신에게 있을지 모른다. 그 남자가 여전히 그쪽을 좋아해서 상사병이 난 거 같다. 짧은 침묵 후 스마트폰 너머의 목소리는 한 마디 쏘아 붙였다.
-그래서요. 내가 그 사람 마음을 받아주겠다고 하면, 당신 친구는 이혼할 생각이라도 있대요?
그렇다는 대답을 하기 까지 짧지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의 수축과 확장이라고 했나. 엉터리 철학자의 논리는 아니었구나. 남은 일은 친구에게 맡긴다는 생각으로 다은은 정류장을 향했다. 한 마디라도 덧붙였다간 용암이 분출하는 게 아닌 소나기가 내릴 거 같았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기 전, 미진은 오늘 아침을 눈앞에 그렸다. 화장실에서 몇 번 헛구역질을 했다. 눈물 때문에 마스카라가 번져 화장을 다시 해야 했다. 잠긴 문을 열쇠로 열려다 그 앞에 서서 말했다.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그러니 저녁에 문을 열고 나와 달라고. 두 다리에 힘을 준 미진은 도희란 여자 앞에 앉았다.
중간 정도 키에 귀여운 외모, 단정한 옷차림을 한 도희는 인사 후 미진의 얼굴만 빤히 쳐다본다. 미진도, 도희도, 기억 속 사진첩에 없는 얼굴이 한 남자를 통해 운명처럼 엮인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지금 미진 앞에 이 여자는 그녀가 상대해 온 수많은 작가들과 다른 강한 한 방을 지닌 이야기꾼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달갑지 않을 거예요. 불쾌하다 느낄 수도 있겠죠. 먼저 이기적인 마음으로 만남을 청한 거 사과드릴게요. 아마 그쪽도 진석 오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이미지를 품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4년은 좋았어요. 학창시절 때랑 같았거든요. 아시잖아요. 혼자 소설 쓰고 남이 봐주면 좋아하고 그런 거.
-미안한데 잘 모르겠는데요?
-네?
-잘 모르겠다고요. 그쪽 친구한테 사정은 다 들었어요. 두 사람 문제에 내가 소환된 것도 웃긴데 아직 마음을 품고 있다는 소리를 하니 기가 차더라고요. 참 좋은 친구를 뒀어요. 자존심 버려가면서 매달릴 줄도 알고. 시간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게요. 내가 그쪽 남편 좋다고 하면 이혼해줄 생각 있어요?
멀리서라도 그 사람이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만질 수 없는 벚꽃이 봄을 알릴 것이다.
-네, 전 그럴 수 있어요.
-내가 다시는 못 보게 해도요?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요.
미진의 대답에 도희는 웃음을 터뜨린다. 아이 같은 웃음은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수면 위의 빙산을 녹이는 기분이다.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셨네요, 참. 진석 오빠랑은 과방에서 한두 번 인사만 나눈 게 전부에요. 어떤 이유 때문에 그 오빠가 상사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어요. 뭐, 그쪽 친구 연락을 받고 떠올린 거지만, 3달 전에 진석 오빠를 만난 적이 있어요.
-3달 전이라고요?
-우연이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처럼 느껴질까요. 근데 정말 우연이었어요. 주말이면 혼자 청계천을 걷는데 누가 말을 걸더라고요. 보니까 진석 오빠였어요.
-말을 걸었다고요? 설마요. 그리고 집 앞 공원도 아니고 청계천까지 갔다고요?
-오빠 말로는 걷고 싶었대요. 걷고 또 걷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고 하더라고요. 절 자리에 앉히더니 대뜸 자기가 영화감독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자랑하는 거 있죠. 아, 어디서 또 성공한 꼰대 선배 하나가 잘 모르는 후배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러는 구나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래서 우울하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뭔 투정인가 싶었어요. 바쁘다고 핑계대고 일어서려는데 조금만 더 곁에 있어달라고 말했어요. 그 목소리가 너무 구슬퍼서...
-역시 그쪽한테는 마음을 연 거였네요. 내가 몇 달을 시도해도 말 한 마디 없던 사람이, 더 옆에 있어달라고 애원도 하고.
-그건 그쪽이 난파선 위에 탑승하고 있어서일 거예요.
-난파선? 무슨 소리예요, 그게?
-오빠는 자기가 난파선이라고 했어요. 물 위에 뜰 수 없는데, 배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하나 둘 탑승한다고 그랬죠. 그 사람들은 자기한테 새 돛을 달아주고, 바닥에 난 구멍도 메워주고 하는데 원하는 만큼 항해를 할 수 없어 괴롭다고 했어요. 빨리 가라앉아서 아무도 보지 못했어야 했는데 날 구해달라고 조명탄을 쐈던 시간들이 후회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몰랐어요. 그쪽 친구 말을 듣기 전까지 불평도 참 문학적으로 한다고만 생각했죠.
누군가는 그 배를 처음 발견했을 것이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게 최선을 다해 막고 있었겠지. 미진이 발견한 뒤 그 누군가는 떠났을 것이다. 뒤를 이어 인천이, 건평이, 택호가 갑판 위에 올랐다. 호화로운 여객선을 바란 게 아니다. 바다에 빠져도 상관없었다. 그저 느리지만 조금씩 앞으로 함께 항해하는 시간이 좋았다. 그 배를 가장 싫어했던 게 선장이란 걸 미진은 처음 알았다.
-그거 알아요? 괜찮다는 사람 중에 정말 괜찮은 사람 없어요. 죽고 싶다는 말이 살려달라는 신호인 거처럼 힘드니까 구해달라는 메시지예요. 뭐, 내가 그쪽처럼 오랜 시간 진석 오빠와 지낸 게 아니라 오해일지도 몰라요. 오빠는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어요. 20대 때는 꿈을 좇고 30대에는 돈을 좇는 게 답이라고요. 정말 오빠의 20대가 꿈만 쫓는다고 행복했을까요. 전 아니라고 봐요.
-왜 그 이야기를 전부 도희 씨한테 한 걸까요. 곁에 있던 건 나인데. 너무 억울하잖아요.
-소중한 사람이라서 그랬을 거예요. 부모가 아프면 자식한테 가장 늦게 이야기하잖아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면 약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 않아요. 그 사람도 같이 아프니까요.
문학 시상식 뒤풀이 날, 다은은 진석이 술에 취해 꼬장을 부렸다고 했다. 새파란 후배한테 또 졌다, 나 이제 진짜 글 안 쓰고 싶다, 교수님들 저 등단 좀 시켜줘라 등등, 취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며 비웃었다. 그때는 귀여운 투정으로만 생각했다. 술에 취하면 진솔한 마음이 나온다는 걸 미진은 몰랐다. 무대 위의 연극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다. 슬픈 표정을 보여주기 싫었던 배우는 가면을 쓰고 텅 빈 객석을 향해 계속 연기를 했다. 관객이 들어선 순간, 더는 보여줄 연기를 찾지 못한 그는 아래로 내려오지 못했다. 벗겨진 가면을 보며 멍한 표정으로 그곳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