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심장은 새빨간 풍선처럼
학부 시절 다은이 미진을 처음 본 건 강의실에서였다. 새하얀 피부에 금발의 단발머리, 팔목에 타투를 한 미진의 모습은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가 있다면 저런 이미지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눈을 뗄 수 없었다. OT와 MT에 참석하지 않는 건 물론 동아리나 학회도 가입하지 않은 미진은 미지의 존재였다. 내뱉는 말마다 물음표에 가까웠다. 선배들은 어설픈 철학자 행세를 한다며 꼬집었지만, 이를 비웃듯 유명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문하생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나온 모습조차 다은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넌 내 우상이었어. 그래서 네가 김진석 좋아한다고 했을 때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한 거고.
다은과 진석은 소설창작 수업을 같이 들었다. 진석의 소설은 교수는 물론 함께 자리한 학생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허술한 구성과 과한 설정, 의미 없는 이야기의 나열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더 불편한 건 진석의 태도였다.
-뭐, 그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충분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제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이 작품에서 말이죠, 시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외화는 여자가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이고, 내화는 그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회상이죠. 물리적인 시간은 3시간인데, 기억의 시간은 1년, 이런 구성을 통해 시간이 지닌 규격에 확장성을 불어넣은 거죠. 즉, 인간에게 있어 시간이란 확장과 수축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한 겁니다.
그 어설픈 변명을 들어주는 교수가 미웠다. 글을 쓰는 선배랍시고 너희가 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해 내 글을 이해 못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어투가 싫었다. 무엇보다 본인의 글에 만족을 표하는 그 미소가 역겨웠다.
-진석아, 잘 들었어. 그런데 네가 작가는 아니잖니.
교수의 말로 분위기는 유쾌하게 넘어갔지만 수업마다 궤변을 늘여놓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궤변에 넘어간 미진이 결혼까지 간 건 다은을 더 괴롭게 만들었다. 심장의 한 구석이 녹아내려 생긴 마그마는 짓눌렀던 열기를 터뜨린다. 만남을 이유로 연락을 한 미진은 도희 이야기를 꺼냈다.
-한도희? 그 편입생 말하는 거지? 번호야 안 바꿨으면 예전 스마트폰 주소록에 있겠지.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너 그 사람이랑 친했어?
-아무래도 남편이 그 여자를 좋아했던 거 같아. 아니, 아직도 좋아하고 있을지 몰라. 이번에 쓴 시나리오 초고를 보니까 이름이 도희로 되어 있더라. 남편 상담하는 의사가 그러는데 작품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런 건 아닌 거 같대. 가족이 이유인 거처럼 말하는데, 그러면 내가 문제라는 거잖아. 어쩌면 이번 작품을 쓰면서 그 도희라는 사람이 다시 떠올랐는지 몰라. 같이 애도 만들기 싫은 여자랑 살다 보니까 예전 기억이 떠올랐나 봐.
-하, 웃기지도 않네.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갑자기 상상력이 폭발했어? 그 오빠가 왜 한도희 씨를 찾아? 그냥 이름 하나야. 네가 의미부여할 필요도 없다고.
-너 진석 오빠가 우울한 거 봤어? 노트북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야. 손가락 10개 붙어있는 것만으로 신한테 감사기도를 드린다고. 그런 사람이 우울증이래. 이제 막 꽃을 피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태양을 외면하는 이유가 뭐겠어. 뿌리 내린 흙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거겠지.
다은은 눈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들이킨다. 얼음을 이빨로 아그작아그작 씹으며 끓어오르는 화산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한도희 찾으면 어떻게 할 건데? 뭐, 진석 오빠가 이혼이라도 해달라고 하면 해줄 거야? 두 집 살림 하고 싶다고 하면 받아줄 거냐고.
-나 최근에 치료 시작했어. 오빠가 우울해지니까 나도 우울해지는 거 있지. 아침부터 집을 나가서 하루 종일 공원에 멍하니 있고, 집에 들어와서는 방에서 나오지 않아. 그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내가 아파보니 알겠더라. 마음이랑 싸우기 위해서는 많은 힘이 필요한 걸 처음 안 거 있지. 오빠가 행복해지면 나도 좋아질 거야. 설령 아니더라도, 둘 다 불행할 필요는 없잖아.
-너는 지금 나랑 친구인 걸 고맙게 생각해야해. 만약 네가 후배나 내 동생이었다면 두들겨 팼을 거야. 미진이 넌 대학 때 사랑을 할 게 아니라 글을 썼어야 해. 김진석 그 인간이 아니라 네가 작가가 되었어야 했다고. 교내 문학상도 그 인간이 아닌 네가 1등이었고, 공모전도 그 인간 하나도 못 붙을 때 너는 12개나 붙었어. 그런데 그 인간 자존심 살려준다고 신춘문예는 도전도 안 했지. 출판제의도 거절하고.
손을 뻗은 다은은 미진의 오렌지주스도 한 번에 들이킨다. 다람쥐 같은 두 볼에 얼음을 또 한 가득 넣고 깨부순다. 조금 열기가 가라앉자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래, 한도희 찾아줄게. 어디까지 네 인생이 망가지는지 한 번 보자. 이러다 나까지 우울증 걸리겠다. 아,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네 말, 사실일 수도 있겠더라. 김진석 그때 진짜 과제 같이 할 사람 찾고 있었거든. 그걸 네가 오해해서 여기까지 온 거라면, 하,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해야 되나.
다은이 카페를 나간 후에도 미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텅 빈 두 개의 잔이 자기들 부부 같아 쓴웃음이 올라왔다. 도희가 미혼에 남자친구가 없다면 진석은 괜찮은 상대일 것이다.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한 예술가를 마다할 여자는 없다고 미진은 생각한다. 도희의 마음을 잡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랑을 놓을 수 있을까. 정말 도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에 무너지지 않을 힘이 두 다리에 있을까. 도희의 사랑을 확인한다면 진석은 떠날 것이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건 자기 자신이니까. 그래서 그의 행동을 관심이자 사랑으로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어리석게도.
-어머어머, 미진아! 너 혼자 여기서 뭐하니? 밥은 먹었어?
혼자 과방에서 과제를 하던 날, 택호는 미진 옆에 가까이 앉아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자연스러운 동작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안 먹었으면 우리 같이 밥 먹을래? 아니다, 우리 집으로 가자. 바로 학교 앞인데 엄마가 어제 반찬 해주고 갔거든. 우리 엄마 집밥이 한정식집 수준이라 맛이 끝내준다니까. 오빠랑 몸보신 하러 가자, 응?
택호가 미진의 노트북을 끄고 손을 잡을 때, 진석이 들어왔다. 말을 꺼내기도 전 택호의 능숙한 몸놀림은 어느새 미진을 뒤에서 밀고 있었다. 진석의 손이 새하얀 어깨에 닿은 건 과방 문을 나서기 이전이다.
-잠깐, 미진아. 너 어디 가냐? 나랑 같이 과제하기로 했잖아. 택호 너 얘 밥 사주기로 했냐? 내가 더 비싼 거 사줄게, 과제 끝내고 나랑 먹자.
-아니, 형. 저희 밥 먹으러 갈 거예요. 과제는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해도 되잖아요. 미진이한테 손 떼세요.
-미안한데 급한 과제라서. 넌 손이 아닌 몸을 떼라, 인마. 무슨 그렇게 밀착하고 있냐.
-아니, 남이야 밀착을 하든 말든. 과제 저녁에 해도 되잖아요, 네?
그 장면을 미진은 신경전이라 여겼다. 진석의 표정은 진지했다. 바람둥이라 포장된 난봉꾼 후배를 순순히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셋이서 같이 먹자. 돈은 택호가 계산하는 거로 하고. 이렇게 밥을 사주고 싶어 하는데 같이 가줘야지, 뭐. 아, 혹시 너희 집으로 가니? 금남구역이라 들었는데 내가 처음으로 가보는 건가? 이거 부끄러운 걸.
택호는 특유의 추임새를 내뱉으며 자리를 피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 진석이 보인 표정은 분명 꽃을 찾은 꿀벌의 미소였다.
-야, 너 나랑 같이 과제하기로 한 거다. 다른 녀석이랑 같이 하면 가만 안 둔다, 알겠지? 자, 약속.
그때 맞잡은 손가락의 의미가 진실이길 원한다. 만약 아니라면 터널을 벗어나 다시 햇빛을 볼 수 있을까. 눈을 녹이는 봄바람이 불어온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 미소를 되찾아도 가까이서 볼 수 없단 생각에 미진은 머리카락을 움켜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