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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회 서울환경영화제를 가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外


제15회 서울환경영화제를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극장은 처음 가봤는데 사람이 정말 많더군요. 특히 중국 관광객과 학생들이 많아서 좀 놀랐습니다. 보통 영화제 하면 아침부터 도착해서 저녁까지 쭉 봐야 하는데 일정 때문에 세 편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니면 볼 시간이 거의 없었는데 아쉽더군요. 사실 영화제에 ‘환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너무 교훈적인 영화들만 상영하는 영화제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게 즐기고 왔습니다. 무엇보다 직원 분들이 정말 친절해서 기분 좋게 감상하고 왔습니다. 오늘 본 세 편에 대해 소개 겸 리뷰를 써볼까 합니다.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균형과 죽음


동남아시아 영화의 경우 장르 영화가 아니라면 정서적인 차이를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이들이 보여주는 미신적인 요소나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표현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꿈과 환상, 현실을 넘나드는데 컷 사이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흔한 소재를 가지고 꽤나 멋진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작품의 주인공인 탄트라와 탄트리 남매는 이란성 쌍둥이다. 탄트라는 뇌에 혹이 생기면서 신체 기능을 점점 잃어가는 식물인간이 되어가고 누나 탄트리는 그 모습을 바라만 보는 현실에 괴로워한다. 간호사는 이란성 쌍둥이는 생김새가 다르기에 서로 균형을 이루어 준다고 말한다. 이 두 남매는 계란의 흰 자와 노른자다. 탄트리는 계란 하나를 요리해 노른자 부분을 잘라 탄트라에게 준다. 달걀은 흰 자와 노른자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노른자는 생명이 탄생하는(후에 병아리로 변하는) 부분이고 흰 자는 이 노른자가 생명력을 공급할 수 있게 공급하는 부분이다.



탄트라가 병에 걸리면서 남매는 균형을 잃는다. 탄트리가 먹는 삶은 계란에 노른자가 없는 장면이 이를 상징한다. 흰 자인 탄트리는 노른자인 탄트라가 생명력을 얻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벼를 가져와 심기도 하고 닭 놀이를 하며 원숭이가 되기도 한다.(이 장면들 중 벼와 닭에서 탄트라가 함께 행동하는데 이는 탄트리의 환상이다.) 이런 두 남매의 존재를 가장 크게 은유화한 존재가 달이다. 노른자처럼 꽉 찬 달은 탄트라를 상징하는데 보름달은 항상 떠있을 수 없다. 반달이 되다가 초승달이 되기 마련이다. 가지가 꽃을 받치는 거처럼 꽃이 되어 달을 받치겠다는 노래를 부르는 탄트리는 의식을 드린다. 이 의식 장면에는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결말은 첫 장면에서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탄트리가 계란을 깨는 장면 말이다. 이 영화는 볼 때는 그리 좋은 걸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보고 난 후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다 보면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동생을 사랑하는 누나의 헌신을 영화가 얼마나 신선하면서 가슴 아리게 표현해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만의 표현이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평가를 관람 후 바로 하게 해서 점수를 별로 안 준 게 후회될 만큼 말이다.



* <천황군대는 진군한다> - 폭력이 지닌 정당성은 인정받을 수 있는가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보냈고 죽음으로 이끌었다. 일본은 카미카제라는 극단적인 자살 부대까지 운영할 만큼 잘못된 정신과 신념으로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일왕이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일본이 일왕(원래는 천황이지만 굳이 한국인인 내가 천황이라고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 일왕이라고 표기하겠다.)을 신처럼 받든다는 점, 그런 일왕에게 해를 입히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통제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당시 참전했던 군인인 오쿠자키 겐조는 일왕의 책임을 물으며 시위를 전개한다. 그는 2차 대전을 일으키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일왕을 섬기고 따르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경찰 공무원들을 향해 욕설을 날린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따르지 않고 명령에만 복종하는 행태를 혐오한다. 왜냐하면 군대라는 곳이 그랬기 때문이다. 참전 군인들에게 감정과 생각은 허용되지 않았고 명령은 절대적으로 들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말이다.


오쿠자키 겐조는 전쟁 말기에 뉴기니에서 살해당한 두 병사의 사건을 추적한다. 그는 종전된 후 두 군인이 명령에 의해 죽었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한 살인이라고 규정한다. 헌데 이 남자, 좀 이상하다. 인간의 법이 아닌 신의 법을 따라 양심적으로 행동해야 된다 말하는 태도는 좋다. 헌데 제대 후 부동산 업자를 죽여 징역형을 살고 일왕에게 돌을 네 번이나 던진 경력이 있다. 그리고 그는 인터뷰를 하는 당시 군인들이 제대로 대답을 안 하거나 회피하려고 들면 폭력을 행사한다. 그는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며 입을 열지 않는 남자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아니, 그 이전에도 그는 입으로 실컷 폭력을 행사했다. 상대를 모욕하고 투 머치 토커가 되어 말로 괴롭히는 게 그의 특기다. 오쿠자키 겐조의 말은 일리가 있다. 일본이 행하고 있는 전쟁에 대한 미화, 이를 보고 전쟁을 대단하다 여기는 젊은이들, 다시 군대를 만들려는 움직임 속에서 전쟁 세대가 할 일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것이다.



헌데 그 참혹함을 알리겠다고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그의 행동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수단을 써도 된다는 그의 자세는 제국주의 하에서 어떠한 폭력도 용인된다는 전쟁 당시 일본의 태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특히 그가 신의 이름으로 행한 마지막 폭력은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의 폭력과 동일하다는 생각이다. 일왕을 신처럼 섬겨 그 폭력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이들과 정의와 신의 이름을 빌려 폭력을 행사하는 오쿠자키 겐조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는 전쟁이라는 이름을 빌려 살육을 자행한 이들처럼 그 역시 정의와 진실이라는 명제에 숨어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폭력을 자행한다고 본다.


하라 카즈오 감독은 왜 오쿠자키 겐조를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어쩌면 그는 2차 대전의 만행을 반성하지 않는 걸 넘어 피해자인 척 코스프레하는 일본의 가증스러움을 오쿠자키 겐조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침묵의 시선>을 통해 인도네시아 군부 정권의 학살자와 피해자를 조우시킨 거처럼 과거의 사실을 들춰내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충격과 반성을 느끼지 않는다. 과거가 현재가 만나야 그 느낌은 배가 된다. 그래서 감독은 오쿠자키 겐조라는 불량스러운 남자를 통해 폭력의 정의에 대해 심도 있게 파고 들어가며 당시 일본 정권의 만행, 현재 일본 정권이 취하고 있는 잘못된 태도를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폭력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일왕의 뒤에 숨었던 과거의 일본이 그랬고, 원자폭탄의 비극에 숨은 현재의 일본이 그러하듯 말이다.



* <키리바시의 방주> - 이제는 기후변화에 주목해야 할 때


키리바시는 지구의 한 가운데에 있는 섬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푸른색과 녹색의 조화가 참 아름다운 이 섬은 기후 변화의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이전에는 없던 태풍에 극심한 피해를 당하는 건 물론 해수면이 높아져 섬이 점점 가라앉고 있다. 그들에게 기후 변화는 생존의 문제다. 작품은 기후 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키리바시 대통령 아노테 통과 뉴질랜드 이민 프로그램을 통해 뉴질랜드에 정착한 한 여성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진행된다. 


아노테 통은 키리바시의 상황을 이렇게 비유한다. ‘만약 북한에서 원자력이 터져 방사능이 남한으로 흘러간다면 그건 전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지금 키리바시의 상황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 기후 협약에 참여하고 일본 대사를 통해 해저 도시 건설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그리고 피지의 섬을 살 계획을 세우지만 의회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는 계획이 아닌 실천을 강조하지만 쉽지 않다. 세계의 강대국들은 키리바시처럼 기후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는 이런 불안한 키리바시를 위해 매년 70여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뉴질랜드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시행 중이라고 한다. 이 정책에 의해 뉴질랜드를 향한 한 여성은 항공료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홀로 뉴질랜드를 향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임신한다. 이 임신의 의미는 미래다. 생각해 보면 키리바시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 위험을 알기에 전 국민들이 근처 국가들로 이주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미신적인 요소들과 집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국민들의 모습을 통해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그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결국 키리바시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이 기후 변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좀 더 드라마틱한 연출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연출이 약간 따로따로 노는 느낌이 강했다. 편집에 있어서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의미의 연결이 더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어 보였던 소재를 두 명의 주인공, 전통과 집을 지키려는 노력과 떠나가야 하는 시간, 그리고 약간은 슬픈 결말까지 담아냈다는 점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p.s. 참고로 화장실은 6층보다 5층이 더 깨끗하고 좋더군요. 그리고 건물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어서 짧은 시간에 끼니를 해결하기 좋았습니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나 많았는데 내일 주말은 어떨지....... 현장 티켓팅이 가능할지 걱정되네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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