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석은 기다렸다. 교헤이가 나타나기를. 그가 이 박물관을 이 잡듯이 뒤지기를. 그 저질체력으로 금방 지쳐버리길 고대했다. 이건 너와 나의 놀이다. 숨바꼭질. 처음 이 놀이를 생각해낸 건 그 망할 밴드부 선배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툭하면 후배들을 모아두고 톰과 제리 놀이를 하였다. 후배들은 톰이 되고 선배들은 제리가 된다. 톰은 제리를 잡아야 하고 제리는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쳐야 한다. 헌데 이 게임은 반대다. 후배들은 선배들을 잡아야 하지만 물리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반면 선배들은 자신들은 연약한 생쥐이기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 규칙을 어긴 후배는 선배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한다. 후배들이 잡기 위해 다가서면 선배들은 뺨을 때리거나 걷어차고 헤드락을 건다. 여자후배라고 다를 바가 없다. 게임에서 지면 단체 기합이 주어진다. 이건 게임이 아닌 고문이다. 이런 개 같은 행동을 그들은 반복했다. 그래, 한 여 선배가 그랬지.
-얘도 연애 시키지 마. 너 연애 하면 우리한테 죽는다. 아니, 사귀는 애가 죽을 줄 알아.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왜 너희들 때문에 포기해야 되는 건데. 이층을 배회하는 교헤이처럼 진석은 방황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지만 일천배를 드리고 공양을 했는데 빈손으로 떠나고 싶진 않았다. 주여, 답을 주소서, 주여. 성경을 읽던 그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다.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은 건 인간들이다. 선한 어린 양만이 그 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았다. 양의 탈을 뒤집어 쓴 검은 늑대들은 예외다. 교헤이는 두 팔을 떨며 상자들을 옮기고 뜯는다. 그때 진석의 두 손도 떨렸다. 밴드부 선배들은 남달랐다. 다른 학과들이 후배들이 먼저 취하고 선배들이 뒷정리를 하는 반면 그들은 선배들이 취해 잠들 때까지 후배들이 취하지 못하게 정신적으로 괴롭혔다. 진석은 버텼다. 그들이 모두 곯아떨어질 때까지 온몸에 힘을 주었다. 혼자 짐을 옮기고 고기를 굽고 아코디언으로 반주를 하느라 기력이 다 떨어졌지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선배들이 모두 술기운에 빠져 꿈나라를 향했을 때 그는 두 손을 떨며 초를 쥐었다. 그 떨림은 긴장이 아닌 희열이었다. 이 별장에 그가 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이 5명이 재가 되어 사라지면 족쇄는 풀린다. 그들은 분위기 있게 촛불을 켜고 술을 마시다 전원 잠이 들었고 커튼에 옮겨 붙은 불이 집을 불태운 것이다. 뉴스는 할 일 없는 백수들이 멍청하게 놀다가 죽었다는 어투로 보도하겠지. 아무도 이들의 죽음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진석은 쇠파이프를 들고 박물관을 향한다. 손바닥의 상처가 욱신거린다. 후드티를 내려 빡빡 깎은 머리를 드러낸다. 안경자국을 꾹꾹 누른 뒤 있는 힘껏 일본인의 머리를 내리친다. 그의 시선이 노란 머리에 뿔테 안경을 낀 남자와 마주친다. 그 남자는 그가 아주 잘 아는, 이전까지 동경의 대상으로 여겼던 존재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님 공연에 감명 받고 동아리에 들어온 일본언어문학과 **학번 김진석입니다. 선배님께서는 절 작은 진석이라고 부르셨죠? 그런데 이제 그 호칭은 그만 사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대학에 김진석은 한 명만 남을 예정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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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교헤이를 이용해 김진석을 죽인다. 이 계획의 시작은 진석이 미용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그와 진석은 체형도 두상도 비슷했다. 이목구비의 차이는 컸으나 교헤이는 특징으로 사람을 잡아내기에 가능한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재석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날 그 장소에 간 건 내가 아니라 진석 선배다. 그 선배도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뿔테 안경을 끼고 다닌다. 그는 진석을 찾아가 스타일링을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돈을 들여 염색을 시키고 알이 없는 뿔테 안경을 사주었다. 진석은 후배의 호의를 굳이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너랑 나랑 스타일이 똑같다? 무대에서 사람들이 헷갈려하면 어쩌지?
-괜찮아요. 저 이제 다른 스타일 할 거거든요. 그나저나 형 진짜 멋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해드리는 건데. 이제 괴롭히던 선배들도 다 사라졌으니 실컷 연애하세요.
그는 고마워하는 진석을 보며 불안을 느꼈다. 누명이란 건 두 가지 경우에만 성립된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을 만큼 약하고 형편없거나 또는 죽어버렸거나. 진석은 선배를 죽일 계획을 세우려고 고민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교헤이가 등장했다. 진석은 몇 번 교헤이가 학교에 나타난 걸 보았다. 교헤이는 진석에 대해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 멍청한 명문대생들은 어학연수 때 친구였다는 한국말이 어설픈 일본인에게 그에 대한 정보를 주구장창 말해주었다. 진석은 일부러 학생식당에서 두 식탁 건너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했다. 눈이 마주쳤지만 교헤이는 진석을 알아보지 못했다. 진석은 이 일본인이 무식하게 노란머리에 뿔테 안경을 낀 남자를 찾아 죽여주기를 바랐다.
마음이 급해진 건 교헤이가 진도를 빼지 못하면서다. 고학번인 진석은 툭하면 다양한 핑계로 학교를 빠졌고 밴드부에 출석하는 일자도 제멋대로였다. 이러다 교수가 진석을 호출이라도 한다면 그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교헤이가 모텔까지 잡은 걸 보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일을 빨리 진행시켜야만 한다. 진석은 선배를 미행했다. 검은 모자에 검은 후드티, 검은 마스크를 쓴 진석은 노란머리 진석을 몰래 따라다녔다. 진석이 효림과 함께 모텔로 들어가는 걸 보고 환호했다. 돈을 노리고 모텔에 잠입한 도둑에게 저항하다 살해당한 대학생. 그림이 나오자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진석은 핸드폰 사진첩을 뒤져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자신의 옛 모습을 인쇄했다. 노란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그 얼굴 위로 글자를 썼다.
‘겁쟁이 일본인 새끼야! 한 판 제대로 붙어볼까?’
아래에 진석이 묵고 있는 모텔 주소와 방 번호를 적은 뒤 벽돌에 사진을 붙였다. 반대편 건물에서 교헤이의 방 창문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귀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교헤이의 비명이 들렸다. 진석은 재빨리 건물 뒷문으로 나왔다. 이제 남은 건 알리바이를 만드는 일이라 생각했다. 만약 교헤이가 그 도발에 분노, 진석에게 향한다면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것이다. 혹시라도-그런 일은 없겠지만 교헤이가 선배에게 당하고 그의 정체가 들통 난다면 진석과의 관계가 수면 위에 오르고 벽돌과 함께 던진 사진이 문제가 될 지 모른다. 다만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면 그의 알리바이는 보장된다. 진석은 그 대상을 소민으로 정했다. 소민이 오기 전 그녀의 집에 있으면 언제부터 그가 거기서 기다렸는지 알 수 없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말을 믿고 증언한 시간을 답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면 알리바이는 성립될 수 있다. 진석은 도어락을 누르고 소민의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소민은 남자친구의 그런 행동을 꺼려했다. 사적인 영역에 대한 침범이라며 화를 냈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자주 다퉜고 소민은 툭하면 이별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싸움이라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녀가 언제고 선명하게 자신이 여기 있었다는 걸 기억할 테니까.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소민이 오기를 기다리던 중 도어락이 움직였다. 어설프게 끼익끼익 소리를 냈다. 진석은 본능적으로 불을 끄고 커튼을 치고 그 뒤편의 베란다를 향했다. 수도 시설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불이 켜지는 걸 지켜보았다. 실루엣의 모양은 길고 얇았다. 속삭이듯 들려오는 일본어를 들으며 그 정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스가 교헤이, 그가 진석이 아닌 소민을 향한 건 룸메이트의 계획에 전혀 없던 선택지였다.
진석이 북경의 대학에서 지내면서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다. 교헤이의 원래 룸메이트인 니시자와가 교활하고 입이 싼 녀석이라는 점이다. 교헤이는 소민을 기다리면서 한국어로 니시자와에 대한 불만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니시자와는 교헤이가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혼잣말로 내뱉은 진석이 준 고통, 누나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학교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교헤이가 샤워실에서 혼자 울음을 터뜨린 걸 정신병에 걸린 게 분명하다며 소문을 냈다. 그는 교수들을 찾아가 교헤이의 상태를 과장되게 부풀렸고 그와 같이 방을 쓰는 게 겁이 난다며 하나 남은 1인실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교헤이는 학교에서 정신병자 신세가 되었다. 오랜 룸메이트에게 배신당한 그는 주먹질을 했고 그 문제로 정신병 확진을 받았다. 교헤이가 소민을 포박하는 동안 진석은 망설였다. 지금 나가서 그녀를 구해줘야 하나. 아니면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노려야 하나. 대화를 엿 듣던 그는 조금씩 창문을 열었다. 베란다와 방 안을 이루는 창문이 두꺼워 외부 소리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펼칠 수 있는 작전이었다. 진석은 두 팔로 창틀을 잡은 뒤 아래로 몸을 던졌다. 2층이었지만 한 바퀴를 구르고 차바퀴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는 아픔을 참고 택시를 잡았다.
학생관 4층 우측 맨 끝의 수화 동아리 방은 온갖 소품들로 가득하다. 소아암 어린이들을 위한 수화공연을 주 활동으로 삼는 이곳과 작년에 같이 공연을 한 적이 있다. 진석은 뒤에서 드럼을 연주했다. 그는 맨 앞에서 노래를 하는 선배 진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그는 고등학생 때 유튜브에서 진석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동아리라는 취미활동으로 노래를 부르기에는 아까운 재능이라 여겼다. 그의 생각대로 진석에게 빨대를 꽂으려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 같은 자신을 인정해주길 바랐다. 공연이 끝나고 진석이 노란 가발을 썼을 때, 그 가발을 쓰고 자신의 옆에 왔을 때, ‘우리 형제 같지 않냐?’고 말하며 같이 사진을 찍었을 때 그는 전율을 느꼈다. 진석은 가발을 쓰고 박물관을 향한다. 그리고 바닥에 형광도료로 글자를 쓴다. 교헤이가 가장 싫어할 그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