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본인 친구 #20

소민에게는 고전영화를 좋아하는 악취미가 있다. 남자친구와 DVD방에 갈 때면 그녀는 지독하게 재미없는 영화들만 골랐다. 그는 <이브의 모든 것>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젊고 아름다운 이브라는 여인이 최고의 여배우 마고 체닝에게 당신은 나의 우상이라고 말한다. 마고 체닝은 이브의 과거 불우한 이야기에 동정을, 자신을 향한 열정에 감명을 표하며 그녀를 비서로 채용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브의 과거는 모두 거짓이었고 그녀는 마고 체닝을 이용해 스타가 되려는 속셈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진석은 진석을 존경했던 걸까? 우상보다 자신이 소중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망가뜨리는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존경 따윈 없었던 걸까. 쓴웃음을 짓던 진석 앞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멈춰 선다. 그들은 야구방망이와 각목, 쇠파이프를 들고 있다.


-너냐?


진석은 당혹감에 목에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너냐고 새끼야. 이 새끼 말이 없는 거 보니까 맞나 본데?


키 큰 남자가 다가온다. 그의 손에 쥔 쇠파이프를 보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때 무리 안에서 한 덩치 큰 남자가 튀어나온다. 남자는 키 큰 남자는 뒤로 밀친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기훈입니다. 전에 진석 형님이랑 만났을 때 본 적 있죠? 야, 이 분은 아니야. 선배님, 다름이 아니라 진석 형님이 박물관에 가보라고 하셔서요. 어떤 새끼가 형님한테 장난을 치는 거 같은데 잡아서 혼내줄까 합니다.


진석은 손으로 턱을 받쳐 올려 말을 꺼낸다.


-아, 그 문제는 내가 해결했어. 동아리에서 장난을 친 거더라고. 진석이 형한테도 연락했으니까 너희는 그만 돌아가도록 해.


고개를 끄덕인 기훈은 무리에게 지시를 한다. 사라져가는 무리를 보면서 진석은 주저앉는다. 키 큰 놈이 버리고 간 쇠파이프를 지팡이 삼아 가까스로 일어난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될 일이 남아있다. 아주 많이.


*


-참 웃긴 말입니다만, 소민이 전화번호부에 제 이름이 뀰이로 저장되어 있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죠. 아마 저 일본인은 김진석이라는 이름만 보고 제가 형인 줄 알고 전화했나 봅니다. 많이 당황하셨죠?

-저기 진석아, 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거든? 네가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 좀 해줄 수 있니?

-아니아니, 형은 이해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형은 곧 죽을 거거든요.


후배 진석은 바닥에 놓인 식칼을 집어 든다. 선배 진석은 네모난 안경테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초롱초롱한 눈이 서늘하게 바뀐 현재에 공포를 느낀다.


-진석아, 너 나한테 왜 그래? 이건 아니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니?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를 할게. 우리 대화로 해결 하자, 무섭게 이러지 말고.

-형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지? 사람은 말이지, 참 단순해. 자기 좋다고 하면 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아. 목소리 중후하고 평소 행실만 올바르면 티 없이 깨끗한 사람일 거라고 착각들 해요. 내가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형이 좋아했던 그 선배들 있잖아, 내가 다 죽여 버렸어. 그거 사고 아냐. 살인이지.


풀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움켜잡는다. 애증의 존재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그는 시원함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이 흐려질 즈음 떠오른 건 의문이었다. 그도 그 별장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선배들은 한 번도 촛불을 켜지 않았다. 밤새 촛불을 켜두다 사고가 난 뉴스를 많이 봐왔기에 정전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쓸 일이 없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형의 목숨이 좀 필요해. 날 위해 죽어줄 수 있어?


뒤돌아 도망치려는 순간 진석은 바닥으로 쓰러진다. 머리에서 피가 흐른다. 단단한 물체가 머리에 부딪쳤다.


-난 말이지, 원래 야구선수가 꿈이었어. 그런데 형을 보고 꿈을 바꾼 거 있지. 형이랑 함께 하고 싶어서 이 대학에 왔는데 이게 뭐야. 왜 하필 나랑 이름이 같은 거야.


진석은 선배의 위에 올라탄다. 식칼은 아래를 향하고 선배의 두 손은 식칼을 움켜쥔다. 노란 머리의 진석은 고통을 참으며 손을 움켜쥔다. 핏줄이 다 끊어지는 고통에 악을 내지른다. 빠박이 진석은 미소와 함께 더 강하게 힘을 준다.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제 곧 끝이 난다. 이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다. 소민에게 말할 것이다. 교헤이는 자신의 룸메이트였다고. 그가 선배 진석을 자신으로 착각해 죽였다고. 그리고 박물관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고. 소민은 슬퍼할 것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고백한 사람이 선배 진석이니까. 그 슬픔을 자신이 안아줄 것이다. 그들은 더 깊은 사랑에 빠질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손에 감각이 사라져 간다.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진석은 느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건데. 괜한 옛정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소민은 진석의 휴대전화에 자신의 이름을 저장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고백했다. 진석은 거절했다. 너처럼 키 작고 볼품없는 여자애한테는 관심이 없다 못 박았다. 학교에서 소민이 친구들과 그 이야기를 하면서 운 걸 본 적이 있다. 이건 그 과거에 대한 벌일 것이다. 이런 벌을 받을 줄 알았다면 효림이랑 했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건을 세우고 몸을 섞었어야 했다며 후회한다. 꼭 후회는 최악의 순간이 닥쳐서야 다가온다. 선배 진석의 손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감각이 끊어지고 힘은 들어가지 않는다. 후배 진석은 강하게 힘을 준다. 칼날이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진석의 몸은 붕 뜬다. 식칼과 함께 날아간 그의 앞에 쇠파이프가 다가온다. 진석은 손으로 쇠파이프를 잡는다. 목으로 다가오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얼굴 위로 피가 떨어진다. 이목구비의 형상이 일그러진 교헤이의 얼굴은 악귀와 같다. 그의 가느다란 팔이 엄청난 힘으로 쇠파이프를 짓누른다.


-안녕, 친구? 헤헤헤헤, 널 죽이기 위해 한국까지 왔어. 헤헤헤헤, 널, 널 죽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진석은 힘을 내뿜기 위해 애를 쓴다. 다리를 움직여 일본인을 치려고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교헤이의 쩍 벌린 입속에서 느껴지는 악이 모든 기운을 삼켜버린다.


-크크크크, 크킄,크크킄....... 나랑 같이 가자, 같이, 같이 저승으로 가자. 누나, 누나 기다려, 내가 곧 갈게, 곧........


교헤이는 체중을 다해 진석을 누른다. 악이 지배하던 몸의 기운은 사라져버렸다. 스가 교헤이의 마지막 숨은 진석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진석의 영혼은 육체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일본어 번역기를 제대로 돌렸는지. 자신이 마지막으로 쓴 그 외국어가 혹시 틀리진 않았는지. 틀렸다면 쪽팔린데. 그리고 마지막 기도를 잊지 않는다.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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