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훈은 꽉 끼는 양복을 입고 과일 세트를 들고 있다. 병문안은 태어나 처음이다. 입원한 사람이 고학번 선배이기에 예의를 차려야 된다는 생각과 자신이 멍청하게 속아 박물관을 향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이 겹쳤다. 진석은 두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다. 그의 왼쪽에는 효림이 사과를 입에 넣어주고 있고 오른쪽에는 소민이 배를 깎고 있다. 기훈은 90도로 인사를 했다. 진석은 살짝 미소를 보였고 효림과 소민은 기훈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미인이 두 분이나 병문안을 오시고.
-난 남자가 더 편하다. 그래, 기훈아, 일은 어떻게 끝났냐?
진석은 온몸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119와 112에 신고했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스가 교헤이와 후배 김진석의 관계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중문학과 학생들은 김진석이 스가 교헤이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증언했고 북경의 대학에서도 교헤이의 친구들이 비슷한 진술을 했다고 한다. 경찰은 교헤이가 진석을 죽이기 위해 한국을 향했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후배 진석의 경우 집단 강간폭행 사건을 선배 진석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았다. 사건을 조사하는 교수와 선배 진석, 소민의 진술을 토대로 사건을 구성하였다.
-작은 진석 선배가 그럴 줄 몰랐습니다. 그놈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그 새끼, 두 번이나 가담했답니다. 신고한 놈이 그랬는데 한 번 왔다가 또 와서 정말 섹스에 굶주렸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하더라고요.
진석은 한숨을 푹 내쉰다. 그는 후배 진석이 자신의 뒤를 이어 동아리를 이끌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중후하고 깊은 동굴 목소리가 언젠가 빛을 볼 거라 여겼다. 그는 자신의 눈을 후회했다. 말을 달콤하게 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는 사기꾼에게 당한 것이다. 진석은 서랍장을 열어보라고 말한다. 기훈은 그 안에서 콘돔을 하나 꺼낸다.
-그게 뭔지 아니? 행운의 콘돔이란다. 우리 과 여신 예인님께서 주신 거니까 잘 가지고 다니렴. 혹시 아니, 너한테도 나처럼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칠지.
기훈은 그의 똘끼에 다시 한 번 감탄하였다. 대학교는 술과 여자를 제외하고는 재미없는 곳이라는 편견을 이 선배는 바꿔놓았다. 무대 위에서 웃통을 벗고 1.5리터짜리 생수통을 온몸에 들이부울 때 어린 후배는 전율을 느꼈다. 어쩌면 예인도 이런 똘끼에 반해 그와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암튼 친해지면 좋은 선배라는 결론을 내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형님, 그런데 노란색 스프레이랑 검정 선글라스 말입니다, 수화 동아리에서 빨리 좀 돌려달라고 하던데요? 걔들도 공연 때 필요 한가 봅니다.
-아, 맞아, 깜짝했네, 고맙다, 기훈아.
-뭘요. 걔들도 기록부에 적혀있지 않았다면 깜빡했을 거랍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기훈은 고개를 돌려 진석을 바라본다.
-그런데 형님 진짜 큰일 날 뻔했습니다. 빌려간 게 18일로 기록되어 있어서 망정이지 16일이었으면 강간범으로 몰릴 뻔했다니까요. 암튼 쾌차하십시오!
어린 기훈은 선배의 눈에 숨은 불안을 감지하지 못한 채 병실을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