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전쟁이 있었다. 인간이 아닌 이들이 살육을 반복했던 전장이. 인간은 멀리 떨어져 그들의 싸움을 관조하며 박수를 치던 전쟁이. 술과 고기 대신 살점과 핏물이 만찬을 대신 했던 살육의 축제는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마음에 들지 않네요. 이게 전부에요?
언제부터였을까? 이 여자의 얼굴을 뻔질나게 보게 된 것이. 아쉽지만 당신은 고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얼굴형에 맞는 비율이란 게 있는데 지금이 딱 좋아요. 괜한 칼질은 당신의 얼굴을 해칠 뿐입니다. 당신은 자연이 내린 축복 그 자체입니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처럼 아름답습니다. 말해주고 싶다. 당장 이 문을 열고 나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머리는 생각을 반복하는데 왜 내 입은 움직이지 않는 걸까. 진실을 말하는 법을 언제부터 잊어버린 걸까.
다연이는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인간은 왜 외형을 평가의 기준에 두느냐고. 외형이 지닌 미의 기준은 누가 정했으며 그것이 왜 이성을 평가하고 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냐며 묻는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천지창조의 마지막 마침표로 인간을 택했다면 왜 태초의 불평등을 인간에게 내려준 것인지 묻는다. 동물도 외형으로 짝을 정한다. 외형을 사랑의 전부라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매스컴은 대중이 쉽게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을 끊임 없이 재생산한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묻는다. 인간의 외형은 왜 자꾸 변하는 것인지. 늙는다는 게 왜 비참해지고 슬퍼지는 것인지. 그녀는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그녀가 찍은 사진에 내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다. 셀카와 친구들과 같이 찍은 사진만이 벽에 일렬로 걸려있다. 잠자리를 피하는 이유도, 신혼 때부터 콘돔을 꼭 착용하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나와 닮은 생명을 그녀는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와 조금이라도 닮은 조물을.
아뇨, 없습니다. 그쪽은 전쟁에 참전한 적이 없어요. 보세요, 기록만 찾아봐도 알 수 있습니다. 4년 간 군에 있었는데 어딘가로 차출된 기록은 없습니다. 네? 왜 4년이나 있었냐고요? 그야 저희는 알 수 없죠. 다만 여기 적혀있는 기록에 의하면 2년 간 실종상태로 있었어요. ‘왜’ 실종되었는지는 적혀있지 않네요. 제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자세한 건 부대에 가서 물어보세요. 부대 이름이……. 아, 이거 사라진 부대네요. 글쎄요, 이름이 바뀐 건지 아예 없어진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 부대가 있던 장소요? 이상하네요. 기록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2년 동안 있던 부대잖아요.
-이것도 별로네요.
여자의 얼굴은 고칠 수 없다. 어느 화가가 그린 명화처럼 완벽한 아름다움을 품어서 그런 게 아니다. 형태가 지닌 균형. 완벽한 조물주가 탄생시킨 조물의 욕망을 이뤄주는 행위가 에덴 동산의 뱀이 된 거처럼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벗겨진 여인의 눈을 떠주는 행위, 그녀가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환상, 그리고 실낙원에 떨어진 현실, 거울을 마주할 그녀가 지르는 비명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무너진 균형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깨져버린 계란처럼 내면에 간직한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걸. 수술결과를 예상한 사진들을 볼 때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다. 이 여자는 왜 얼굴을 고치려는 걸까? 왜 스스로 뱀의 혀와 입을 맞추려는 걸까. 불만으로 가득 찬 표정을 잃지 않으면서 매일 찾아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전 말이죠, 선생님이 특별한 분이라 생각해요. 제 생각이 틀린 건가요?
내가 왜? 대체 무슨 이유로 특별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저는 알고 있어요. 선생님의 ‘작품’들은 여기 없다는 걸. 여기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볼 수 없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되고 싶어요. 여기서 선생님이 창조한 첫 번째 ‘작품’이 되고 싶다고요!
보인다. 먼 곳에 위치한 거대한 구덩이. 붉은 진흙탕 안에 모여 있는 한 무리들. 잠수복을 입은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다. 서로의 개조된 신체를 칼로 찌르며 상대가 죽기를 바란다. 그들은 소리친다. ‘징그러워, 징그러워, 징그럽다고!’ 혐오에 젖은 칼날에 피와 고름이 찢겨져 나온다. 떨어진 살점이 검푸른 진흙탕을 어지른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뭉갠다. 눈을 파내고 코를 누르며 혀를 뽑아버린다. 검은 웅덩이에 비친 각자의 얼굴을 보고서야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흐린 하늘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을 신을 저주하며 울부짖는다.
수면제 옆에 물컵이 없다. 다연이가 치운 게 분명하다. 언제부터일까. 내 일상을 조금씩 바꿔놓기 시작한 것이. 시작은 변기였다. 열려있던 변기 뚜껑이 닫혀있기 시작했다. 하루의 일과가 변기 뚜껑을 여는 걸로 바뀌면서 미세하게 일상을 유지하던 흐름은 바뀌기 시작했다. 다음이 신발이었다. 아침이면 구두는 현관 대신 신발장 안에 있었다. 리모컨의 위치, 옷장 안 와이셔츠의 숫자, 저녁 식사 시간까지. 그녀는 조금씩 내 일상을 바꿔놓았다. 미묘하게 몸에 새겨진 예전의 기억처럼. 그리고 오늘은 물컵을 치워놓았다. 다연이의 눈빛은 무심하다. 그 두 눈이 정면으로 나를 응시한 순간은 한 번도 없다. 스마트폰, 책, 노트북 등 다연이의 시선은 입과 따로 움직였다. 그런데 왜 나의 일상을 건드리는 걸까. 왜 모든 것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걸까. 대체 무얼 위해서. 천천히 문을 연다. 다연이의 방문을 바라본다. 문틈 아래로 빛이 보이지 않는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부엌 불, 부엌 불 스위치가 어디 있지? 보이지 않는다. 달빛은 모습을 감추었다. 아파트 마지막 단지의 뒤편은 어둠과 친한 낮은 천장의 집들이 보여 있다. 눈은 익숙해지기를 거부한다. 어둠에 익숙해져 그 내부를 바라보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무얼 감추려는 거야? 이 조그마한 보금자리에 넌 무얼 감춰놓은 거니? 눈앞이 환해진다. 누군가 불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