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요청하신 파병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뇨, 문서란 문서는 다 조사해 보았지만 ‘전쟁’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어요. 해외 출국 기록이요? 여권도 만든 적이 없습니다.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실종된 이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기억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네, 찾아봤지만 실종에 대한 당시의 진술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입니다. 맞습니다, 없어졌습니다. 누가 고의로 숨겼을지도 모른다고요? 설마, 그럴 리가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 부대 기록은 모두 남아있어요. 무엇 때문에 일개 사병의 기록을 일부러 없앤답니까.
한 남자가 있다. 칼을 들고 있는 남자가. 그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인간. 그는 인간이다. 자신의 외형이 신과 같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는 진흙탕에 발을 집어넣는다. 지독한 악취와 매음이 올라온다. 잠수복을 입은 ‘물건’이 그에게 다가온다. 날카로운 칼날이 부딪친다. 핏물과 진물이 떨어진다. 잠수복을 입은 이들이 그들을 둘러싼다. 새빨간 눈을 가진 그들의 시선은 그저 살점을 노리는 칼날에 매달린다. 남자가 물건의 목을 잡는다. 칼로 옆구리에 낀 그 목을 그어버린다. 기둥을 잃은 머리는 이내 바닥에 떨어진다. 샛노란 피가 남자의 얼굴을 뒤덮는다. 그는 자신의 육신을 바라본다. 서늘한 분노들을 이겨내지 못해 갈갈이 찢겨 여기저기 고름이 피어난 육체를. 한 여인이 다가온다. 남자는 눈물을 흘리는 여인 앞에서 자신의 고름을 짜낸다. 그 무거운 생명의 피를. 도망가라. 여인에게 속삭인다. 도망가라. 여인은 고개를 흔든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돌아가라. ‘인간의 숲’으로.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곳으로.
-이거 마음에 드네요. 이 얼굴로 만들어 주세요.
여자는 책상 위의 사진을 가리킨다. 그 얼굴은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인간의 두 손이 아닌 조물주의 점토가 만들어낸 산실이다. 여전히 소리는 목에 막혀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여자는 소리를 지른다. 저 얼굴이 아니면 안 된다, 난 꼭 저 얼굴을 가지고 싶다, 선생님은 조물주이지 않느냐, 왜 조물주의 흉내를 내면서 조물주가 아니라고 말하느냐.
-선생님, 뭐가 그리 두려운 거죠? 살을 찢고 뼈를 가는 게 선생님이 여기 앉아있는 이유잖아요. 뼈로 쌓아 올린 탑 덕분에 지금 여기 계신 거잖아요. 전 그 탑의 일부가 되는 거뿐이에요.
당신의 뼈와 살은 균형을 깰 필요가 없어. 귀의 모양부터 콧구멍의 크기, 심지어 속눈썹 길이까지 완벽하다고. 당신은 창조론의 증거야. 자연 속에서는 태어날 수 없는 ‘작품’이지.
-여기서 나갈 때마다 불안해요. 전 ‘변하고’ 싶어요. 지금 제 모습이 싫다고요. 제가 싫다는데 왜 선생님은 침묵하고 있는 거죠? 그 침묵의 의미는 뭐냐고요. 매일 이곳에 올 때마다 숨이 막혀요. 차라리 내 얼굴을 찢어버렸으면, 다 헤쳐서 원래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다고요. 그런데 거울 속 모습은 또 저예요. 전 언제까지 이 얼굴로 살아야 되는 거죠?
내뱉고 싶다. 당신은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고. 왜 얼굴을 고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당신은 왜 거울 속에 자신을 싫어하냐고. 제길,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고통스럽다. 왜 말을 할 수 없는 거야? 대체 왜? 난 또 넘어갈 것이다. 침묵이 의미하는 암묵적인 동의에 빠져버릴 것이다. 본능이 지닌 아름다움에, 그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싶은 열망에 빠져 다시 칼을 들 것이다.
-선생님, 벌써 퇴근하십니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작은 키에 주먹코인 중년 남자가 퇴근 때면 문 앞에 서 있다가 따라다니는 게. 빵모자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트렌치 코트를 입은 남자. 그는 굽은 허리로 양손을 비비며 내 주변을 배회한다. 그가 하는 말이라고는 하루 일과를 물어보는 것이다. 뻔하디 뻔한 일상을 짜증날 만큼 세세하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몸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와 좋지 않은 인상과 만나 불쾌한 반응을 유발해낸다. 당신은 날 어떻게 아는 거지? 대체 누구길래? 첫 질문을 던진 그 날도 그랬다.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남자는 어떻게 생각을 읽었는지 목구멍이 내뱉은 질문에 입으로 답하였다.
-저와 선생님은 아버지 대부터 친구였습니다. 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까지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 절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처음에는 선생님께서 저를 상대하시기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고 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선생님이 기억을 잃어버리셨더군요. 그러니 절 기억하지 못 하는 게 당연하겠죠. 안 그렇습니까?
이 남자는 어떻게 아는 걸까. 내가 기억을 잊어버린 것을. 다연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을. 이름을 물어봐도, 나이를 물어봐도, 사는 곳을 물어봐도, 이 남자는 능력을 쓸 수 있는 건 하루 한 번 뿐이라는 듯 모두 흘러 넘긴다. 그러면서 무얼 알고 싶은 건지 쉼 없이 질문을 내뱉는다. 잠은 몇 시에 잤는지, 점심은 뭘 먹었는지, 대학시절 몇 번 연애를 했는지, 학창시절 교우관계는 좋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지? 내가 기억해내기 위해 애쓰는 그 파편들이 어떤 모양인지 알고 있는 거지? 남자는 누런 앞니를 보이며 미소만 짓는다.
-이런,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집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언제 식사나 한 번 같이 하시죠. 여자 친구 분도 함께 하셨으면 합니다.
여자친구? 다연이를 말하는 건가? 분명 군 제대 후 결혼식을 올린 거 같은데, 왜 여자친구라 하는 거지? 그는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 입구로 사라진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를 찾을 수가 없다. 남자만의 고유한 악취가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서랍장을 뒤져본다. 옷장, 책상, 수납장, 냉장고 안, 상자 속, 쓰레기통. 어디에도 없다. 혼인 신고서, 결혼반지, 결혼식 사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결혼에 대한 증거라고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다연이의 모습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가 우리를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어놓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방을 따로 쓰는 거지? 나는 왜 일정한 시간만 되면 다연이의 방에서 빠져 나오는 거지? 다연이에게 느끼는 긴장감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감정이지? ’다연이는 누구인가?’ 하나의 커다란 물음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기억 속 다연이는 어떤 파편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존재해야만 한다. 기억 어디에선가 머물러야만 한다. 그 강렬한 감정이 이렇게 산화될 순 없다. 다연이가 돌아왔다. 어질러진 집안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다.
-이게 대체 뭐야? 집안을 무슨 돼지우리로 만들어 놨어!
탁상 위의 수첩을 집어 든다. 볼펜에 힘을 주고 휘갈겨 쓴다.
‘우리 결혼한 거 맞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설마 결혼한 걸 잊어버렸다는 건 아니겠지?
‘증거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증거라니!
제길, 뭐라고 써야 하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결혼반지나 사진 같은 거. 우리가 부부 연을 맺었다는 증표가 하나도 없어.’
-하, 짜증나네. 그거 다 친정으로 보냈잖아. 집이 좁다고 결혼사진이고 비디오고 택배로 친정에 보내는 미친 사람은 당신 밖에 없을 거야. 왜?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니 기억도 같이 잊어버렸니?
‘전화번호 줘.’
-무슨 번호?
손이 점점 떨려온다. 왜 이런 거지? 싸늘한 공기가 인중 위를 스친다.
‘당신 부모님 번호. 직접 물어봐야 되겠어.’
-번호는 무슨. 당신 진짜 중증이다.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냐?
다시, 다시 휘갈긴다. 나도 알아보기 힘든 글씨를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휘갈긴다. 뒤돌아 서려는 다연이의 팔을 잡아 끈다. 수첩을 얼굴에 들이민다.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아.’
다연이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묘한 미소를 짓는다.
-이거, 들켜버렸네?
그 한 마디에 기억은 뇌를 관통하였다. 과거의 파편 중 하나가 조각을 맞췄다. 굵고 낮은 저 목소리. 내 귓가를 긁어대며 고통에 빠지게 만들었던 소리. 다연이는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선생님은 조물주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