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전쟁이었다. 거대한 분쇄기에서 흘러나오는 살점과 내장 조각을 주어먹으며 배를 채웠던. 그래서 바랐을 지도 모른다. ‘인간인 자’가 더 많이 죽기를. ‘물건’들의 시체는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내장과 살점은 질긴 고무처럼 위가 받아들일 수 없었고 피는 단단히 응고되어서 마실 수 없었다. 그래서 죽였다. ‘인간’을 보이는 족족 죽이고 갈아먹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우리는 그저 배가 고팠을 뿐이라고. 같은 종족끼리 죽이는 건 죄가 아니라고. 전쟁은 모든 선택을 용서해야 하는 직면한 현실이라고. 다른 누군가는 말했다. 이건 신이 내린 재앙이라고. 피조물의 멸망을 바라는 천사들의 장난이라고.
그때 날 바라봤던 눈빛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검은 눈빛이 인간과 같기도 했고, 새빨간 눈빛이 짐승의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악몽이나 환영에 시달린 것이기를 바랐다. 그 날 난 무엇을 하고 있던 걸까? 땅을 밟고 있던 느낌도, 담배를 피던 연기의 냄새도 기억이 나는데 잔상은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맞춰지지 않는다. 대체 왜…….
-아, 일어났어? 생각보다 너무 약골이네. 한 마디 들었다고 정신이 가출하다니.
꼬리가 보인다. 보라색으로 물든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며 눈 앞을 가린다. 메스꺼운 냄새. 지독한 악취가 코끝을 찌른다. 동시에 어딘가 익숙한 냄새에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가 집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만 바닥에는 수풀이 가득하고, 베란다는 가시 덩굴이 수를 놓고 있다. 천장에는 곰팡이와 이끼가 피었으며 뱀과 이구아나가 혀를 내밀고 눈동자를 돌려댄다. 앞을 가리던 꼬리가 모습을 감추고 새파란 피부가 손을 흔든다.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축축한 몸과 기다란 손톱, 툭 튀어나온 입과 기다란 혀, 바닥을 적시는 알 수 없는 액체와 새빨간 눈. 그 모든 것은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그대로다. 그것이 꿈인지, 퍼즐 조각인지, 아니면 망상의 일부인지 알 수 없지만.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너를 기억한다고.
-뭐야? 기억이 나기 시작한 거야? 그러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잖아. 시작하자고. 이미 연극은 막을 내렸으니까.
-야, 노 일병, 야, 일어나 봐.
하얀 정액을 내뿜으며 죽은 두더지 한 마리. 그것이 나온 땅 속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바닥에는 한 점의 피가 떨어져있다. 문 상병님이 손길이 느껴진다. 뺨을 몇 대 때리더니 미소를 짓는다.
-뭐야, 죽은 줄 알았잖아, 인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두더지 잡겠다면서 삽 들고 뛰어가더니만 갑자기 픽 하고 쓰러지기나 하고. 너 어디 아프냐?
아니, 전혀. 몸이 아프지는 않다. 그저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기분 나쁠 뿐이다. 그저 넘어졌을 뿐인데 피가 줄줄 흐르다니.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럼 가자.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알았지? 우리 사이니까 그냥 넘어가는 건데 이거 명령 불복종이야, 알아? 최전방에서는 선임의 말이 곧 군법이야, 인마.
문 상병님이 땀을 닦는다. 초록색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른다. 걸음걸이를 옮길 때마다 엉덩이 쪽에서 무언가 움직인다. 거대한 무언가가.
-아, 왜 이렇게 졸리냐. 너무 더워서 그런가?
하품을 내뱉는 문 상병님의 혀는 갈라져있다. 길고 가느다란 혀가 두 갈래로 갈라진 채 흔들린다. 손을 뻗는다. 문 상병님의 어깨를 움켜쥔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 혀는 대체 뭐고요. 문 상병님은 튀어나온 동공으로 날 바라본다.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손이 내 이마를 스친다.
-어? 너 왜 피가 빨간색이냐?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 안에는 얼굴이 담겨 있다. 언제 왜 찍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모르는 얼굴이. 왜 여자는 이 얼굴을 원하는 걸까? 난 왜 이 사진을 여기에 둔 것일까. 모르겠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미스터리가 된 시점을 예측할 수 없다. 여자는 몇 번이고 말했고 그때마다 내 수첩에는 안 된다는 글자가 같은 필체로 적혀나갔다. 할 수 없다. 이런 ‘흉물’을 만드는 건 사람이 아닌 짐승의 발이 할 일이다. 아름다움을 짓이고 뭉개는 건 이성과 감성을 지니지 못한 파괴의 선택이다. 그런 죄악을 실천하기에 나란 인간은 나약하고 형편없다. 이건 무엇일까? 인간도 짐승도 아닌 이것은. 내가 이걸 만들었나? 아니라면 왜 액자에 넣어서 책상 위에 올려둔 걸까. 유리창 너머 키 작은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눈이 마주치니 실실거린다. 저 놈은 알지 않을까? 이게 무엇인지. 그림책에서나 볼 법한 괴물의 모습 옆에 왜 내가 있는지. 자리를 박차고 남자에게 향하려는 순간 문이 열린다. 그 여자다. 그녀의 얼굴은 붕대로 꽁꽁 묶여있다 . 왜 얼굴을 가린 거죠? 입을 벌린 여자에게는 입술이 없다. 새하얀 이빨과 분홍빛의 혀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선생님 고민을 덜어드리려고 얼굴을 없앴어요. 이제 선생님이 새 얼굴을 해주지 않는다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해요.
그 녀석인가? 그 땅딸보가 이런 짓을 한 걸까? 다시 유리창 너머 대기실을 바라보니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수첩에 휘갈긴다. 대체 왜 그랬죠? 왜 스스로의 얼굴을 지워버린 겁니까?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색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생각해요. 누구는 빨간색으로, 누구는 초록색으로, 또 누구는 노란색이나 검정색으로 태어나죠.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색만 보고 그 주변을 칠하려고 하죠. 선생님은 제가 아닌 제 색을 보고 취한 거예요. 항상 그랬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친구들도 저한테 어울리는 색으로 주변을 칠해나갔죠. 이제 저는 하얀 도화지에요. 예전의 얼굴 따위는 없어요. 선생님은 그저 그리기만 하면 되요. 지금 들고 계신 붓과 물감으로 액자 속의 얼굴과 똑같이 그려주세요.
그녀는 웃고 있다. 아주 미약하고 희미하지만 보인다. 그렇게 원하세요? 이런 모습이 되는 것이. 누구나 혐오하는 모습이 되기를 원하는 건가요?
-같은 모습을 가지기 싫거든요. 선생님과 같은 모습을요. 혐오스러워요. 거울을 볼 때마다 토악질이 난다고요. 왜 인간은 원하는 ‘외형’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하는 거죠? 대체 왜요? 전 저주해요. 이런 모습을 준 신을 저주한다고요. 사진 속의 저 모습으로 만들어주세요. 선생님 옆의 저것으로 만들어 달라고요!
사르르 바람이 불어온다. 귀 끝까지 간절함과 처연함이 밀려온다.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서려온다. 메스. 그래, 메스를 쥐고 있었지. 눈을 뜬다. 낯익은 풍경들. 꽉 막힌 검은 벽과 코끝을 찌르는 알코올 냄새. 새하얀 마스크와 장갑에 튄 색깔을 알 수 없는 피. 그리고 잔뜩 녹이 슨 거대한 문. 생각난다. 난 누군가를 수술 중이었다. 그건 사람도 동물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물건’이라고 불렀다. 부대에서는 물건을 생포하였고 선임들은 장난스러운 내기를 하였다. 저 흉측한 얼굴을 ‘사람’처럼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를. 그들은 나를 믿는다고 했다. 내 손끝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며 어깨에 한 가득 부담이란 돌을 올려놨다. 부대장은 은밀하게 제안하였다.
-만약 자네가 저 ‘괴물’을 바꿀 수만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은 멈추게 될 거야. 하지만 실패한다면 자네의 인생이 지긋지긋해 지겠지.
그는 마지막 기회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무사히 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된 중요한 기회라고. 이 기회를 놓쳐버리면 넌 평생 원망의 대상이 될 거라고. 내가 뭔데. 대체 내가 뭔데 이런 짐을 짊어져야 되는 거지. 여기서 나에게 해준 게 뭔데. 이 지옥을 시작한 건 그들인데 왜 끝내는 건 내야 되어야 하는 거냐고!
‘물건’이 말했다.
-여긴 너에게 지옥이니?
처음이었다. 그들은 말을 할 수 없다 여겼다. 그들이 지르는 고함과 알 수 없는 외침은 인간의 것과 다른 언어라 생각했다. 아니면 지금 듣는 건 환청일까. 이 절망과 낙담이 낳은 대상 없는 외침이 아닐까. 상관없다. 누구라도 들어준다면, 내 마음을 들어준다면 그게 천사 혹은 악마라 해도 상관 없다. 고개를 끄덕였다. 괴롭다. 미칠 듯이 괴롭다. 그들은 끝내지 않을 거야. 이 끝없는 살육전을 끝내지 않을 거라고.
-내가 널 구해줄게. 여기서 나가게 해 줄게. 다만 조건이 있어. 이곳을 나가는 순간, 너를 둘러싼 모든 건 바뀌게 될 거야. 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 줄게. 대신 네가 가진 모든 걸 버려야 해. 그럴 수 있어?
상관없다. 여기서 나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 바뀌든 상관 없다. 그러니 제발, 날 여기서 내보내줘.
-여긴 처음부터 너희들이 올 세상이 아니었어. 그저 적응 되길 바랐을 뿐이지.
울려 퍼진다. 거대한 굉음이. 짧은 순간에 열기는 조각을 녹이고 파편으로 흩뿌린다. 숲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옮긴다. 주변이 시끄럽다. 사이렌 소리, 총 소리, 누군가를 찾는 소리. 달린다. 그들을 피해 달린다. 소음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물 웅덩이를 바라본다. 다르다. 나와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남자는 모래 속에 갇힌다. 그는 두 팔을 벌려 여자를 껴안는다. 새하얀 젖가슴을 드러낸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입을 맞춘다. 투명한 눈물이 모래 위로 떨어진다. 두 사람의 주변을 둘러싼 게들. 거대한 게들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날카로운 다리가 그들의 살결을 찢는다. 새빨간 피가 모래 위를 뒤덮는다. 새하얀 뼈가 모습을 드러낼 때 즈음, 남자는 알게 된다. 자신의 품속의 여자가 죽어버린 것을. 그는 절규한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조물에 대해, 자신을 이 세계에 던져놓은 음모에 대해, 자신에게 육신을 준 모든 것들에 대해, 절망만을 낳은 데카메론의 저주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