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커다란 생수통이 찌그러질 때까지 다연이는 온 힘을 다해 물을 빨아들인다. 고개를 돌리기 전 눈이 마주친다.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듯한 그 눈동자에 힘이 빠진다. 조그마한 발이 바닥을 울리며 내 앞으로 다가온다. 빠르게 리모컨을 낚아채더니 전원을 꺼버린다.
-솔직히 이야기하길 바라. 당신 나랑 사는 게 즐거워?
수첩을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급한 대로 손바닥에 글씨를 쓴다.
‘응’
-그럼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일과 사랑을 동시에 잡는 경우는 드무니까’
-그 말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손가락으로 앞서 적은 글자를 다시 가리킨다. 뒤돌아 선 그녀는 소파 옆에 놓인 화분을 집어 던진다. 화분과 벽걸이 TV는 서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함께 무너져 내린다. 몸을 일으키자 그 조그마한 손이 가슴을 친다. 자연스레 다시 소파 위로 몸이 떨어진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당신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고! 날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볼펜을 집어 든다. 손바닥에 다시 글씨를 쓰려고 애를 쓴다. 떨리는 손을 어떻게든 부여잡는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좋아한다면서 왜 나오지 않는 거야? 왜 그 방에 틀어박혀서 잠만 자고 입을 틀어막은 건데!
볼펜이 살갗을 파고 든다.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오해야 말을 못해서 그래’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겠지.
빨갛게 변한 눈동자가 날 노려본다. 말을 해야 한다.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 변명해야 한다. 하지만 진심은 혀를 타고 올라오지 못한다. 도망가고 싶어.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고! 귀를 틀어막고 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긴 꼬리가 앞을 막는다. 날카로운 발톱이 등을 할퀴고, 꼬리가 다리를 감싸더니 거꾸로 매달리게 만든다. 지독한 악취가 풍겨져 나오고 진득한 혀가 얼굴을 감싼다. 새빨간 눈. 그 눈이 나를 노려본다.
-이봐, 노일병, 뭐 하는 거야, 노일병?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에선가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듣지 마! 듣지 말라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차가운 피부가 내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 익숙한 손길이 기억을 자극한다. 자리를 찾지 못한 퍼즐 조각들을. 난 이 ‘물건’을 알고 있다. ‘안 돼, 알려고 하지 마. 진실을 알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어.’ 또 들려오는 누군가의 소리. 방해한다. 퍼즐조각을 구겨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멈춰, 멈추라고. 다시 갇힐 순 없어, 안 돼, 안 된다고!’ 다시 흩어졌다. 기억의 마지막 순간 목소리를 배신한 나약한 심장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 다연이와 마주한다. 그 애의 손가락은 길게 늘어져 끝이 뾰족하다. 다섯 개의 손톱이 내 배를 찌르기 전에 용서를 빈다. 모든 기억은 거짓이라고. 그러니 제발 살려달라고.
입술에 닿은 물은 아주 차갑다. 마치 방금 전에 누군가 이 침실에 들어와 가져다 놓은 듯이. 화장실에 가 보니 변기 뚜껑이 열려있다. 바닥이 눅눅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다. 누가 사용한 걸까? 이 집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전에 한 남자가 이야기했다. 키가 작은 중년 남자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나를 아는 듯했다. 물어보니 내게는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 여자 친구라는 존재가 이 집에서 함께 지내는 걸까? 그런데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걸까? 머리가 어지럽다. 아스피린을 찾기 위해 부엌에 가 보니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보인다. 새파란 풀과 어그러진 나무 사이로 울창한 숲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 걸음, 발자국을 찍어본다. 바닥이 진물처럼 끈적인다. 누군가 어깨를 친다. 문 상병님이다. 새파란 피부에 매끈한 액체가 온몸에서 흐르는 문 상병님. 상병님은 총을 건넨다. 상병님은요?
-괜찮아, 넌 ‘우리’랑 다르잖아. 정신 바짝 차리라고. 너 같은 놈이 가장 먼저 죽으니까.
두 개의 발자국이 찍힌다. 하나는 조그마한 슬리퍼가, 다른 하나는 4개의 긴 발가락이. 어두운 수풀을 지나 검은 구름과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하늘이 보인다. 그 아래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선도 악도 없는 전장 앞에 우리는 멈춰 선다. 한 남자가 담배를 건넨다. 작은 키에 주먹코를 가진 중년의 남자는 목을 뻗어 인간이 아닌 이들의 싸움을 가리킨다. 그 끔찍한 전장을 뿌연 연기 너머 흥미진진하단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찢는다. 날카로운 이빨과 거대한 꼬리가 서로의 붉은 눈을 파고든다. 샛노란 피가 바닥을 뒤덮는다. 그 위에 떨어지는 새빨간 잉크. 그래, 인간이다. 인간이 그들 사이에 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몸을 지닌 채 거대한 이빨 사이에 끼어 죽음을 맞이한다. 중년의 남자는 해맑은 웃음을 내뱉는다. 순수한 즐거움이 그에게 느껴진다. 거대한 머리가 발 밑에 떨어진다. 문 상병님. 문 상병님의 붉은 눈과 마주한다. 남자는 머리를 들어올린다. 목을 잃어버린 그 얼굴은 붉은 피와 고통을 지닌 명백한 ‘인간’이다.
-뭐 하는 거야, 부엌에서?
다연이가 생수통을 들고 서 있다. 얇은 잠옷에 물을 가득 흘린 게, 목이 탔는지 허겁지겁 마신 거 같다. 다연이의 반대편 손에는 아스피린이 들려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스피린을 건넨다.
-그런데 왜 부엌까지 나온 거야? 방 안에 물 가져다 놨잖아?
급한 대로 손에 글자를 쓴다.
‘아스피린이 없어서.’
다연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음, 그래. 다음부터는 아스피린을 가져다 놔야겠네. 그래야 당신이 나오지 않을 거 아냐.
‘내가 나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당신 바보 아냐? 지금 본 걸 환상이라고 여기는 거야? 아니면 잠깐 꿈나라에 다녀온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지? 계속 봤잖아. 현실을 인지하기 싫은 거야? 내가 알려줘? 당신이 본 건 모두 진짜야. 모두 사실이라고. 그 끔찍한 ‘물건’들과 당신 ‘선임’ 그리고 주먹코의 ‘남자’까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야. 당신 뇌 속에 그려진 그림 그대로야. 그러니 제발 그 지긋지긋한 기억 상실에서 벗어나란 말이야!
다연이는 손을 잡아 당긴다. 손바닥에는 방금 전 쓴 글씨 아래에 썼다 지운 잉크 자국이 보인다.
-망각은 반복을 가져올 뿐이야. 절대 잊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