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광(5) - 최종

연락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에 남깁니다. 이 메시지를 듣는 대로 연락주세요. 선생님의 군 기록 중에 2년간 실종되었던 기록 말입니다. 조사하던 중, 당시 같은 부대에 있던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XX병동에서 요양 중인데 보기 안쓰러울 만큼 수척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은 선생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 마디로 문제아라고 하더군요. 선생님이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니고 위의 선임들이 유독 선생님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 문제 때문에 같은 생활관을 썼던 사람들이 상당히 괴로워했다고 해요. 그 몹쓸 짓을 당할 때마다 선생님이 밤새 눈물을 흘려서 기억한답니다. 선생님과 가까웠던 사람으로 누가 있었냐고 물어보니 문익성이라는 선임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나마 잘 대해주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제대일이 가까워질수록 선생님이 불안해하는 게 눈에 보였답니다. 그 외에 한 사람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은 친하기보다 가까웠던 사람이랍니다. 선생님과 동기였는데 나이가 서른 중반에 키가 작고 못생긴 주먹코 남자였다는 군요. 그 남자는 앞에서는 선생님을 위로해주는 척하고 뒤에서는 괴롭힘을 주도했답니다. 혹시 두 사람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선생님이 실종된 날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 어딘가로 불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창고로 쓰이던 지하실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더군요. 안에 있던 두 사람과 바깥에 있던 다섯 사람이 이 폭발로 죽었지만 선생님은 시체는커녕, 군번 줄도 발견되지 않은 걸로 기억한답니다. 군 당국은 폭발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폭발사고라는 점에서 사건을 은폐시켰고 해당부대를 해체한 뒤 새로운 부대로 개편했답니다. 사건은 사고로 처리 되었고 선생님은 실종 처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건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선생님이 계속 실종 중이라는 겁니다. 사병 기록에는 2년 후 돌아와 남은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자료를 입력한 군 기록관을 찾아보았으나 아무도 이런 기록을 한 적이 없다더군요. 여기에 더 놀라운 사실은 선생님과 함께 군 생활을 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다는 겁니다. 온 몸에서 진물이 흘러나오고 피가 샛노랗게 변하다가 응고가 되어 말라 죽는 병이라고 하더군요. 이 남자도 그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고 합니다. ‘기적적’으로 병은 이겨냈으나 아직 완치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부대가 없어진 숨겨진 이유는 이 병의 원인이 부대 내에서 발생하지 않았나 하는 점인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원인이 선생님의 기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그날 폭발사고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최면 요법을 실시할 예정이오니 꼭 연락 주십시오. 더 이상 선생님 개인만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깊게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런 전쟁이 있었다. 인간이 아닌 이들이 주연인 전쟁이. 추악한 이들이 ‘물건’이라는 이름을 뒤집어 쓴 채 서로를 물어 뜯은 전장이. 그곳에서 인간은 방관자였다.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담배를 피며, 비웃음을 내뱉는. 어느 날, 물건들은 생각했다. ‘인간들은 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그들도 엄연한 이 땅에 떨어진 조물이 아닌가?’ 신이 낳은 조물임을 거부하는 인간에게 신의 오만함을 본 그들은 인간들을 유혹했다. 자신들의 전쟁에 참여해 달라고. 자신들을 도와 전쟁에서 승리하면 엄청난 전리품을 주겠다고. 인간들은 믿었다. 이 멍청한 물건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이 전쟁에 대충 참여한 뒤, 이긴 쪽을 모두 죽이고 전리품만 받아 가겠다고. 사치와 향락에 빠진 이들은 생명이 존재하는 모든 영역이 자신들의 것이라 여기며 그들 역시 자신들이 소유한 그 어떤 것들과 다름 없는 ‘물건’이라 여겼다. 총소리와 동시에 ‘물건’들은 인간들을 공격했다. 새빨간 육즙을 들이키고 새하얀 살갗을 찢으며 쾌감에 빠졌다. 그제야 인간은 깨달았다. 여기는 자신들이 발 디딜 땅이 아니었다고. 에덴 동산의 죄악이 씻겨지지 않은 채 자신들에게 절망을 안겼다고. 한 인간이 말했다. 우리는 태초부터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그리고 소리쳤다. 신이 내린 모습을 바꾸어 버리자고. 그가 쥐어준 모든 조물주의 증거를 내려놓자고. 인간은 택하였다. 살육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모습을. 조물이 만든 외형을 내려놓은 채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의 모습을 선택하는 걸 탄생과 죽음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직 절벽 아래를 바라볼 수 있는 이들만이 이 끔찍한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찾았다.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을. 주먹코에 홍조를 띤 그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바라보았다. 수술대 앞에 선 내 모습을.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물건’을. 그는 들었을 것이다. 물건이 내게 한 말과 내가 물건에게 울부짖는 그 모든 상황을 지켜봤을 것이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그는 날아갔다. 보았다. 남자의 피가 노란색이라는 것을. 바지 사이로 꼬리가 튀어나온 것을. 빨간 눈동자를 굴리면서 무언가를 찾는 것을. 그는 울부짖었다. 잃어버린 것을. 실낙원에서 이브를 잃어버린 아담은 울부짖고 있었다.


작은 키의 남자가 다가온다. 그는 언제나처럼 나를 기다렸다. 수술실에 처박혀 다른-어쩌면 같은 ‘종’의 모습을 그리고 있던 나를. 그는 여전히 굽실거리는 자세로 조곤조곤 말을 내뱉는다.

-어때요? 기억은 되찾으셨습니까?

‘아니, 전혀.’ 일부러 수첩에 거짓을 적는다. 데카메론의 저주를 받은 이여. 오랜 세월을 ‘인간’이라는 거짓된 이름으로 살아온 이여. 당신은 알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를. 인간의 땅에 사는 모두가 ‘거짓’을 칭송하는 이유를.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입니다. 전 기억을 ‘되찾은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기억을 되찾았다면 제가 가져온 이 ‘물건’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거든요.

남자는 등에 멘 군용가방에서 머리를 꺼낸다. 딱딱한 껍질로 장식된 ‘인간’과 ‘물건’ 사이의 머리를. 기억한다.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남자는 내 손에 머리를 쥐어준다. 축축하다. 그 끈적거림이 생명을 향한 갈망처럼 느껴진다.

-기억하실 겁니다. 당신을 가장 아꼈던 ‘사람’이죠. 당신이 아직 기억을 찾지 못해서 ‘영광’입니다.


-오늘이 제가 ‘다연’으로 살아있는 마지막 날인 거죠? 이제부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겠죠? 저도 무리에 들어갈 수 있는 거겠죠?

소리는 혀와 입술을 타고 올라온다. 한때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이 여자에게 물어본다.

-왜 바꾸려는 거죠? 스스로 ‘물건’이 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신은 내가 만든 최고의 ‘작품’입니다. ‘언덕’ 위에서 살 수 있는 가면을 힘들게 만들어 주었는데 다시 돌아가려는 이유가 뭐냐고요.

-에덴동산에서 내려온 순간부터 ‘인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 이 실낙원에서는 버림받는 거죠. 복낙원을 꿈꾸는 어리석은 이는 선생님 한 명이면 족하다고 생각해요. 언덕은 없어요. 절벽아래에서 심연을 바라보고 언덕에 있다 착각하는 거죠. 그들은 모를 거예요. 신과 가까워지려 노력할수록 얼마나 더 비참해지고 무력해지는지. 전 무리로 ‘돌아가고’ 싶어요.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버림받은 구덩이 만이 제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에요.

메스를 들어올린다. 망치를 들고 전기톱을 휘두른다. 천천히 바꾸어 나간다. 아름다운 ‘이브’의 모습을 에덴동산에서 떨어뜨린다. 여자는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 받은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깨달았을 것이다. 그 선택은 신이 아닌 비참한 인간의 자위라는 걸. 데카메론의 저주를 받지 못한 건 고통이라는 것을.


수술이 끝났다. 다연이는 거울을 바라본다.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짓는다. 거대한 이빨과 둘로 갈라진 혀가 모습을 드러낸다. 메스로 자신의 얼굴을 그어본다. 샛노란 피. 그 피를 핥으며 내 볼에 연신 키스를 해댄다. 문틈 사이로 보인다. 야릇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물건’의 남편이.

-가자, 우리가 선택 받은 곳으로.

다연이가 남자의 손을 잡는다. 그들은 향한다. ‘전쟁터’로. 인간이 아닌 자들과 인간들이 엉켜있는 그 끔찍한 살육의 숲으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갈 것이다. 태초의 ‘아담’과 ‘이브’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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