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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해져도 남을 가르치지 못한다

내가 근무하는 언론사에서는 반년에 한 번 대학생 기자단을 뽑는다. 이때 영화리뷰를 제출하게 하는데 그 글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본다. 이때 무조건 탈락시키는 글이 있다. 바로 남을 가르치려고 드는 글이다. 한 글은 히어로 영화를 비판하면서 ‘관객들도 재미없게 보는데 마블이란 이름값 때문에 이를 숨기고 있다. 당당하게 말해보라. 재미없지 않느냐’라는 말을 더했다.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 기자란 직함을 지니면 더 위험한 글이 탄생한다.     


최근 연예란에 댓글을 막아두면서 기자들의 글 수위는 더 높아졌다. 특정 연예인을 향한 비판과 비난의 강도를 높이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무례한 지적도 서슴없이 가한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걸 알면서 그 무기를 가차 없이 휘두른다. 누가 맞아죽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무기를 통해 또 다른 대상을 찾으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요즘 대중은 이런 선동에 쉽게 휘말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업혁명 이후 소비의 트렌드가 된 대량생산-대량소비는 2010년대에 들어 미니멀리즘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여전히 대중이 선호하는 브랜드와 소비방식은 유효하지만,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사지 않고 유명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건 주문방식을 통해 구매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양성영화 시장의 확대와 OTT나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경로로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취향에 맞는 영화를 골라볼 수 있는 시대에 도래했다. 과거에는 시네필이라면 꼭 관람해야 하는 죽기 전에 꼭 봐야하는 영화와 소수 평론가에 의해 명작과 졸작이 결정됐다면, 현재는 관객들의 평가와 요구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평론가가 별로라고 평한 영화라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흥행에 성공한다. 저예산에 모르는 배우들이 나와도 영화가 좋으면 관객들은 상영관을 찾아서 먼 길을 향한다. 상을 받은 영화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최고고, 왓챠 같은 영화 평점 사이트를 통해 자신만의 목록을 완성할 수도 있다. 남의 목록보다 내 목록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난다.     


이런 환경에서 리뷰어나 기자, 평론가가 지닌 권력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은 좋다. 다만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매도하는 건 옳지 못하다. 대중적인 취향을 천박하거나 수준 떨어지는 것으로 평하는 이들은 반대로 자신의 취향은 고결하다 생각한다. 그 고결함은 편견으로 가득하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과 영화를 성역으로 생각하는 자세는 영화가 추구하는 다양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다.     


이동진이나 정성일은 물론 박평식 같은 원로 평론가도 욕을 먹는 게 인터넷 세계다. 쌍방향의 세계에서 내가 낸 의견은 무조건적인 동의를 얻지 않는다. 그런데 남을 가르치려고 들고 그 수준을 논하려고 한다면 앞서 언급한 지나친 비판보다 더 본인의 무덤을 파는 행동이다. 교수나 강사처럼 교육이 업무인 직업이 되지 않고서야 유명해져도 남을 가르치진 못한다.     


이 이야기를 마지막에 하고 싶은 이유는 누구나 글을 쓸 때 자만에 빠지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팬이 한두 명씩 늘고, 블로그가 인기를 얻으며, 인플루언서라는 이름과 함께 글을 써달라는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자신이 뭐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다 기자나 평론가 같은 전문적인 직함을 달게 되면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나에게 있다는 착각을 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창작자의 소유물인 영화를 가공자인 자신의 것처럼 여긴다. 내가 이 영화에 대해 하는 말이 다 정답이고 진리라 주장한다. 내가 좋게 본 영화는 명작이고 나쁘게 본 영화는 졸작이라 명시한다. 대중이 이 졸작이라 여기는 작품에 열광한다면 수준이 낮다 규정한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려는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교만함이 느껴지는 글은 결국 도태된다. 요즘 말로 ‘라떼’를 말하는 ‘꼰대’가 대중적으로 비호감을 사는 건 그 말의 좋고 나쁨과는 별개로 남을 가르치려는 태도와 자신만 옳다는 교만함에 있다. 꼰대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젊은 사람도 꼰대가 될 수 있다. 내 글이 최고라는 자부심은 필요하지만, 남에게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 거만함은 지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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