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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괴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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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마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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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주어졌다면 하늘 높이 날아갔을 거야. 

태양을 향해 오르고 또 올라 불타 죽어버렸겠지.      


차라리 그게 나았을 거야.  

    

재가 되면 

땅속으로 사라지니까. 

그럼 누구도 내 존재를 모를 테니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리워하는 

끔찍한 경험 따윈 하지 않았겠지.      


그런데      


내게는 조그마한 발코니를 빠져나갈 힘도 없어 구석진 공간에 숨어야 했다. 

난 

모두가 혐오하는 생쥐 같다. 

그래서 

다들 짓밟으려 드는 게 분명하다.     


1     


옥선 아줌마는 오후 3시면 돌아간다. 학교가 빨리 끝난 날이면 쥐구멍에 숨는다. 재건축이 물 건너간 30살이 넘은 아파트 지하실에는 주인이 누군지 잊어버린 물건들이 즐비하다. 네발 자전거부터 항아리, 의자, 책상, 라디오, 인형. 

돗자리를 펴고 앉아 소꿉놀이를 시작한다. 엄마는 딸을 위해 찌개를 끓이고 계란말이를 준비한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은 가방을 침대 위에 던지고 씻는 것도 잊은 채 재잘재잘 그날 있던 일을 떠든다. 엄마는 미소를 보이며 한 마디 한 마디 정성껏 반응하고 밥을 차린다. 맛있게 식사를 마친 모녀는 함께 소파에 앉아 TV를 본다. 예능 프로그램 재방송을 보면서 웃고 또 웃는다. 잠에 빠진 아이는 초인종 소리에 눈을 뜬다. 정장차림의 아빠는 무릎을 내리고 두 손을 활짝 편다. 아빠에게 안겨 오늘 있던 일을 이야기하려는 순간이면 옥선 아줌마의 발이 보인다. 

조그마한 창문으로 아줌마의 빨간 구두를 확인한 후 집에 돌아간다.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낸다. 변기야, 오늘 먹을 식사야. 막히지 않게 조금씩 물과 함께 삼키렴. 다음으로 천장을 바라본다. 방 하나에 화장실 하나 달린 복도형 아파트는 TV가 필요 없다. 위층의 발소리와 기침소리도 생방송으로 들리니까. 위층 아이들은 시끄럽다. 유치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밤새 뛰어다닌다. 위층 남자는 늦은 시간에 돌아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 아내는 한 마디씩 거들 뿐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새벽 1시가 넘어가면 남자는 아이들을 혼낸다. 아이들은 아빠를 피해 도망 다니고 아빠는 필사적으로 뛰어 아이들을 잡고 때린다. 이웃집이 항의라도 하면 생활소음도 못 견디느냐며 화를 낸다. 그래도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매일 뛰고 소리 지르고 빌고 또 빌며 잠을 자기를 거부한다.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 두 아이는 즐겁다. 게임이라도 하듯 한 아이가 혼나면 다른 아이가 떠든다. 남자는 지치지도 않고 때리고 또 때린다. 남자가 죽었으면 한다. 남자도 두 아이도, 여자도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옥선 아줌마도 같은 생각이겠지. 어느 날 눈을 뜨면 죽어있길 바라겠지. 아줌마는 꽃을 살 거야. 눈물도 흘릴 거고. 이웃을 향해 없는 이야기도 지어낼 걸.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떠들고 또 떠들 거야. 그리고 모두의 관심이 사라질 때에 방에서 혼자 웃음을 터뜨릴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닿을 때면 눈은 스르르 감겨 꿈나라를 향한다.

온전한 어둠이 찾아올 때 내 저주는 잠에 든다.     


2     


초등학교 입학식 날 처음 알았다.      


내가 ‘마녀’라는 걸.      


난 그 애들보다 2살 더 많았고 머리가 하나는 더 컸으며 힘도 더 셌다. 

그 애들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교만과 멸시와 확신이 만든 변질된 정의가. 

한 애가 시비를 걸면 다른 애가 달려들어 때렸다. 

때린 애를 상대하려 들면 다른 애들이 달려들어 사지를 붙잡았어. 

실내화를 벗어 내 코에 들이댔지. 

양말을 입에 넣는 애도 있었어. 

구토를 할 때까지 괴롭힘은 계속 됐어. 

그리고 담임선생님은 장난이 심했다는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지. 

입술이 터지고 옷이 찢어져도 학교에 다녀야만 했어.

날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학교가 끝나면 엄마들이 교문 앞에 줄서있었지. 자기 아이를 데려가려고 말이야. 난 교실에 끝까지 남아있다 모든 아이들이 돌아가면 그제야 집에 갈 수 있었어. 선생님들은 돌아가면서 날 상담하고 감시했지. 괴롭힘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어. 오히려 내가 반격이라도 하려 할 때면 흥분해 소리쳤어. 

맞아.

애들보다 날 무서워했던 건 어른이야. 혼탁하다 못해 아스팔트 빛깔이 되어버린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었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으면 경비 아저씨가 경찰을 불러 쫓아냈거든. 이 아파트로 온 것도 민원 때문이래. 나랑 같은 아파트에 살면 불안하다나봐. 아니, 무섭다고 해야 하나. 여기 사람들은 나에 대해 몰라. 알아도 신경 쓸까. 다들 해가 뜨기 전에 나가서 해가 진 후에 돌아와. 해가 떠 있을 때면 듣기 싫은 아이들 소리랑 백수들의 신음소리만 들려. 어둠이 오면 천장에서 술이 비가 되어 내리나 봐. 다들 취해서 소리 질러대고 서로 시끄럽다고 지랄하고. 왜 내 방에만 안 내리는지 모르겠어. 뭐 여기가 이런 곳이야. 냉장고에 우유 있는데 좀 마실래?



-아니 괜찮아. 그래도 부러운 걸. 이 집에 너 혼자잖아. 힘들고 지치면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나아질 때까지 쉴 수 있잖아.     


그러게. 나아지진 않더라도 덧나지도 않으니까. 난 핸드폰도 없으니까 괴롭히고 싶어도 괴롭힐 수 없겠네. 그나저나 오늘 정말 고마웠어.     


-내가 뭐 한 게 있나. 은성이가 없었으면 우리 둘 다 맞아 죽었을 거야, 아마. 으~ 생각만 해도 싫다. 설아 넌 계속 이 동네에만 있는 거야?     


처음에는 섬으로 가라고 하더라. 집도 단독주택에 창고에 생필품이랑 통조림도 가득 채워준다고 그랬어. 학교도 홈스쿨링으로 대체하고, 최신 컴퓨터랑 핸드폰도 주겠다고 했어. 근데 여기를 떠날 수 없었어. 만약 떠났다가 엄마가 다시 돌아오면, 그러면 날 찾을 수 없잖아. 엄마는 꼭 돌아올 거야. 날 사랑하니까. 마음은 몸보다 더 오래 아프겠지만 내가 여기 있으면 언젠가 엄마를 만날 수 있어. 지옥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미래가 없는 천국보다 낫겠지.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왜? 왜 내가 행복했으면 하는 거야? 너 나랑 친해진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됐잖아.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야?     


-불행 속에서 사는 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아니니까. 우리가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잖아. 오늘 하루가 남은 인생의 전부라면, 힘든 순간이 있더라도 행복한 순간도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좋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재미있는 영화를 본다거나 지금처럼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시간을 보낸다거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좋은 추억 하나쯤은 지니고 싶어. 그래야 참 좋은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미소를 지었던 순간이 기억 저편에 있다면 지금 행복이 찾아와도 그게 행복인지 모를 거야.     


지수 넌 참 이상한 아이야. 

월요일. 

학교 체육관에서 지수를 만났다. 

익성 패거리는 언제나 그랬듯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농구공을 내 몸에 던졌다. 

7~8개의 농구공이 몸을 때렸다. 

체육선생님은 쓰러진 날 응시하며 교무실로 올라갔다. 

공 하나가 재수 없게 얼굴을 향해 코와 입에서 피가 흘렀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다 농구공을 밟고 미끄러졌다. 다음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몸은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일어서려는 순간 계단을 아래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뛰어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에 몸이 움츠려들었다. 창고 안으로 기어갔다.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뒤 체육관으로 들어오는 저 애들이 모두 공놀이에 집중할 때 공기처럼 내려가고 싶었다. 그때 지수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너 피 엄청 나.      


지수의 부축을 받고 양호실을 향했다. 새하얀 솜이 몇 번이고 빨개지는 걸 보며 그 애는 눈물을 흘렸다.      


-그만 하라고 그래. 매일 너무 아프지 않나? 학교에 맞으려고 오는 거 아니잖아.     


아프다. 아프다고 말해봐야 달라질 건 없다. 소리쳐도, 울부짖어도 내일은 똑같은 해가 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괴롭힘을 참지 못해 교무실을 향한 적이 있다. 인자한 얼굴을 했던 노년의 담임선생님은 내 말에 반사적으로 안대를 잡아당겼다. 눈을 가리려는 내 손을 잡아 비틀고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질러댔다.



-애들이 널 무서워하는 건 생각 안 하니? 애들이 무서워서 널 공격하는 거야! 네 이 안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지 알아? 아냐고!     


담임선생님은 울음을 터뜨렸고 교무실의 수많은 눈들이 한 곳을 응시했다. 온몸에 구멍이 뚫린 듯한 서늘함에 도망쳤다. 안대를 꼭 쥔 채 계단을 구르고 바닥을 기며 집을 향해 뛰었다. 그날 이후로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엄마가 아니면 날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세상에는 나와 엄마 둘 뿐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날 사랑해줄 수 없다. 그리 믿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다. 증오가 있으면 사랑이 피어날 가능성이 있다.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공포와 두려움만이 가득하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실종된 유일한 감정은 증오다.    

 

-난 네 눈이 좋아.     


뭐? 지수가 웃고 있다. 밝은 달빛이 그 애의 미소를 비춘다.     


-네 눈을 보면 슬픔이 가득해 보여. 슬프다는 건 누군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난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지수는 다르다. 지수의 눈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그래서 두렵다. 지수에게 증오가 피어난다면, 그 증오가 다시 내 몸에 구멍을 뚫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3     


죄인이 되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옥선 아줌마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은 다른 중학교로 진학할 것을 강요했다. 입학이 확정된 중학교에서 날 꺼려한다고, 항의전화가 빗발쳐 자퇴를 해야 할 수 있다며 자기들이 좋은 방법을 알고 있으니 따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복도에서 담배를 피며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다. 

아줌마는 내가 무섭다고 했다. 

다른 사람으로 바꿔달라고 몇 번을 말해도 소용이 없다며 내 손에 죽기 전에 짜증으로 죽길 바란다고 말했다. 

담임선생님은 왜 그쪽이 죽느냐며 죽어야 하는 건 나라고 했다. 

아이들한테 괴롭힘을 당하다 죽어버리면 최고지 않겠냐. 

덩치 좀 큰 애들한테 너희가 우리 반을 지켜야 하니 마녀를 죽이라 하는데 꽤 명줄이 길다며 웃었다. 

아줌마는 걱정마라며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먹는 밥에 조금씩 독약을 넣고 있으니 길어도 1년 안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죽을 거라며 미소를 보였다. 

나름대로 선택을 했다. 두 사람의 바람대로 다른 중학교로 진학을 결정했다. 대신 아줌마가 해놓은 반찬은 입에 대지 않았다. 아줌마 몰래 반찬을 버리고 배를 곪는 일이 잦아졌다. 정부 보조금은 모두 아줌마가 관리를 했고, 아줌마는 밥과 반찬을 해주고 간다는 이유로 한 푼도 주지 않았다. 핸드폰도, 노트북도, 속옷과 양말도. 내게 주어진 건 오지 않았다. 아줌마는 점점 말라가는 내 몸을 보며 자신의 계획대로 되고 있다 여길 것이다. 내가 죽으면 제일 먼저 기뻐하겠지. 무용담처럼 말할 거야. 마녀는 불쌍한 아이였고 그 불쌍한 아이를 열심히 돌본 게 자신이라고. 성경을 품에 안고 기도하겠지. 주여, 제가 어린 사탄을 죽였사옵니다. 절 천국에 데려가옵소서.      


신이 존재한다면 성녀의 이면에 거짓으로 물든 늑대가 있단 걸 알겠지. 빨간 모자를 통째로 잡아먹은 어둠의 짐승이.      


진학한 중학교는 문제아 집합소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2년. 

사고를 쳐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한 애들만 모아두었다. 

어른들은 알고도 모른 체한다.

쓰레기는 모으면 모을수록 썩어서 악취가 난다는 걸.     


입학과 동시에 소문이 났다. 

‘그’ 안대녀가 여기로 왔다고.      


날 보기 위해 복도 가득 애들이 모여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분명 그럴 거야. 풍선껌처럼 부푼 기대는 몇 분 만에 터져버렸다. 권익성 패거리는 내 자리 주변을 둘러싸고 말했다.      


-어이, 마녀. 마법 좀 부려 봐.      


그런 거 부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목구멍을 가득 채운 목소리를 다시 삼켰다. 반응이 없으면 반작용도 없겠지. 관절이 움직이지 않는 목각인형은 눈길만 주고 가지고 놀지 않으니까. 잠깐의 괴롭힘은 있더라도 우물 안에 가두진 않을 거야. 

녀석들 중 한 명이 물었다. 

남자 고추 본 적 있냐고. 

단체로 성기를 꺼내더니 내 교복에 오줌을 쌌다. 축축하게 젖은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역 표시 했으니 건드리는 놈이 있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야, 안대녀! 쓰레기통 비워!     


그날도 그랬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학교 뒤편에는 재활용 쓰레기장이 있다. 

놈들은 날 그 안에 집어넣고 쓰레기를 부었다. 

유리병 조각이 피부를 파고 들고 통조림 뚜껑이 상처를 남겼다.

한 번은 각목으로 종아리를 때렸다. 

튀어나온 못에 박혀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때 체육관 2층 교무실에서 담배를 피던 체육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양호선생님은 하루에 세 번도 넘게 찾아오는 나에게 참으라 말했다. 참는 게 이기는 거라고.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넌 아파도 되는 애니까 상처를 치료하지 말라고. 

커다란 쓰레기통이 가까워질수록 피하고 싶었다. 고양이를 피해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톰처럼 멍청한 고양이가 나타나 웃음을 주길 바랐다. 꼬리가 없는 제리도 도망칠 수 있게 행운의 반전이 일어나길 소망했다. 쓰레기통에 다다랐을 무렵 목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놈들은 미소 후 웃음을 터뜨렸다. 사자도, 호랑이도 먹잇감을 보고 여유를 부리지 않는다. 날카로운 이빨이 근육과 핏줄을 완전히 끊어버릴 때까지 야성을 유지한다. 경멸과 멸시를 보내는 건 인간뿐이다.      


-안대녀 까꿍!     


호경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기 무섭게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검은 비닐봉지가 얼굴 전체를 감쌌다. 숨을 쉬면 쉴수록, 소리를 지르려 할수록 비닐은 입안을 가득 채워 생명의 통로를 봉쇄했다.      


-어때? 죽을 거 같아? 죽을 거 같으면 소리를 질러. 그래야 도와줄 거 아냐. 뭐라고? 똑바로 말해야 듣지, 씨발!     


주먹이 날아와 배를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처음에는 침이 흐르고 다음에는 구토가 나오더니 이내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사방에서 달려든 손이 내 몸을 때린다.

투명해진 감각은 이 순간이 고통인지 수치인지 아니면 치욕인지 답을 내리지 못한다. 

또 다시 갇혀버렸다. 

소리를 내지를 수 없는 덫이 입술을 깨물고 사지를 비틀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아버리면 더는 엄마를 볼 수 없다. 

죽음은 종착역이 아니다. 

슬픔으로 떠나는 끝이 없는 통로다. 

만약 지수가 호경에게 달려들지 않았다면, 그래서 재석이 나를 놓치지 않았다면 악마가 나타났을 것이다.     


-이게 진짜 미쳤나.     


비닐봉지를 벗었다. 침과 피와 구토로 범벅이 된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내 옆에는 지수가 있었다. 그 애의 코에서는 냄새가 없는 피가 흘렀다.      


-자살하고 싶으면 어디 높은데서 뛰어내려. 이래봐야 너 신격화 해 줄 인간 여기에는 없으니까. 

-이럴 필요 없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만약 익성의 주먹이 지수의 얼굴을 때렸다면 난 다시 영혼을 팔았을 것이다. 은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 몸이 붉게 물 들었을 테지.      


-그만 둬.     


은성의 말에 익성 패거리는 행동을 멈췄다. 뒤돌아 선 무리들은 한 명 한 명 빠짐없이 은성이의 눈을 쳐다봤다. 그 뒷모습은 배부른 하이에나 떼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은성이는 사자가 아니다. 벽과 문으로 이뤄진 학교에는 숨을 곳도 숨길 곳도 많다. 곳곳에 숨은 악의가 드러날 때마다 내 피는 조금씩 악취로 물들어갔다. 그때마다 지수가 나타났다. 지수는 누굴까. 누구이기에 날 찾아내는 걸까.     


-처음에는 은성이한테 부탁했어. 들은 체도 안 하더라. 그래서 교무실에 갔는데 선생님들마다 전부 바쁘다면서 꼼짝도 않더라고. 그래서 내가 뛰어 온 거야. 아마 은성이가 그걸 봤나 봐. 걔도 우리 앞에서만 폼 잡은 거지, 아마 허겁지겁 뛰어 왔을 걸? 크크크. 올 거면 더 빨리 좀 오지, 한 대 맞았는데 죽을 거 같더라. 뭐, 너랑 같이 죽으면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늙어서 혼자 죽는 것보다 덜 외롭고 고통스럽지 않을까. 설아 너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 줄 아니? 내가 살아있는데 네가 죽는 거야. 네가 죽으면 나, 살아가지 못할 거야.



내가 뭔데. 왜 날 소중하게 여기는지 모르겠어. 너한테는 가족이 있잖아. 가족은 소중하지 않은 거야? 네가 죽으면 걱정할 텐데? 미안하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야. 난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엄마랑 난 한 몸을 공유했었거든. 그래서 우리 심장박동은 하나야.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알 수 있어. 만약, 정말 만약 엄마가 사라진다면 난 살아갈 이유가 없어. 그럼 난 죽을 거야. 내가 죽으면 지수 너도 따라 죽을 거야? 그럴 수 있어?     


-슬픈 이야기지만 만약, 만약 그때가 되면 내가 네 엄마가 되어줄게. 혼자서 외롭지 않게 이렇게 손을 꼭 잡아줄게. 이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는 집에서 꺼내줄게. 네 몸에 상처가 더는 생기지 않게 막아줄게. 우린 친구야. 그렇지? 너도 날 친구로 생각하는 거지?     


7살 때였어. 놀이터에서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자애랑 해가 질 때까지 놀다 그 애 엄마가 찾아왔지. 그 아줌마는 날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어. 처음 본 애의 식탁에서 함께 돈까스를 먹고 장난감을 구경했어. 그 애는 소꿉놀이 세트를 상자에서 꺼내며 말했어. 넌 내 친구니까 특별히 보여주는 거라고. 

그날 이후 누군가 날 친구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가시덤불이 무성한 무인도를 보고 정박을 택할 선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난파선조차 침몰의 위험을 택했다. 지수는 망망대해에 홀로 남은 섬에 새로운 이름을 달아줬다.      


-나 그만 가볼게. 내일 보자.     


지수가 입을 맞춘다. 

내 입술 위로 분홍 꽃잎을 포갠다. 

현관 앞에 선 지수를 껴안는다. 

그 애의 머리가 코에 닿는다. 

검은 머리카락 위로 눈물을 떨어뜨린다. 

허리를 감싼 손을 지수가 잡는다. 

그 애의 뺨 위에도 투명한 수정이 흐른다. 

미안하다는 말. 

미안하다는 지수의 말이 눈처럼 차갑다. 

너도 저주에 걸린 거니? 

나처럼 미로에 갇혀버린 거구나.

우리에게 열쇠는 주어지지 않을 거야. 

위로는 잠시 슬픔을 잊게 만들 수 있지만 

고독에서 빠져나올 순 없어. 

내일이 오면 햇빛은 피부를 태우겠지. 

구름은 막아주지 않고 바람은 거세게 때릴 거야. 

재가 되어 땅에 파묻힐 때까지 고통은 끝나지 않겠지. 

매일 하늘이 흐리더라도

태풍이 불고 번개가 내리치고 안개로 가득하더라도 

지수 네가 곁에 있어준다면 살아갈 수 있어.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다시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 

내 곁에 있어줘. 

나도 

네 곁에 있어줄게. 

널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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