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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마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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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수봉공원을 향했다. 

그때는 거북이 모양을 한 놀이기구를 타는 걸 가장 좋아했다. 

느리게 물위를 시계방향으로 도는 그 기구에 앉아있으면 

엄마의 웃는 얼굴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공원 입구에는 장난감 가게가 있었다. 

온갖 종류의 인형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엄마는 가장 마음에 드는 인형을 사줬다. 

그땐 몰랐다. 

귀여운 인형에 정신이 팔려 눈물이 가득 고인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설아 지켜줄게. 우리 설아 엄마랑 같이 살자. 우리 꼭 행복하자, 알았지?     


그땐 몰랐다. 

엄마도 감정이 있다는 걸.

엄마만의 행복이 있고 가치가 있다는 걸. 

그걸 알게 된 순간 난 악마와 마주했다. 

바로 지금처럼.     


눈을 사러 가자고 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거잖아. 눈이 아니라 얼음 말하는 거 아니야? 지수는 스마트폰으로 매장을 하나 보여줬다. 역 근처에 시장이 있는데 그 안에 잡다한 걸 파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거기서 의안(義眼)을 사는 거야. 양쪽 다 눈이 있으면 넌 더는 안대녀가 아니잖아. 그러면 애들이 놀릴 거리도 사라지고, 네 예쁜 얼굴이 더 부각되니 반하는 애들도 있을 수 있고, 그러면 혹시 알아? 질투에 눈 먼 신이 내린 저주가 풀릴지.     


지수는 스케치한 미래를 주절거리며 색을 칠했다. 

의안을 낀 설아는 침묵의 저주에서 해방된다. 

신의 저주가 풀리면서 설아의 목소리는 모두의 귀를 향한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눈을 마주본다. 

그들의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

소녀의 목소리는 세상에 끝에 있던 엄마의 귀에도 들어간다. 

설아는 엄마와 눈물의 상봉을 하고 동화의 한 문구가 아래에 흘러나온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 꿈의 첫 단계를 위해 시장을 향했다. 바닥만 보고 걷는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지 않는다. 마녀보다 긴 그들의 그림자는 나와 지수를 완전한 어둠 속에 감춘다. 우리는 여느 소녀들처럼 물건도 구경하고 오뎅도 먹고 셀카도 찍었다. 어색한 즐거움이 무르익을 즈음 지수가 말한 가게 앞에 도착했다. 주인아저씨는 의안 몇 개를 들이대더니 내 눈에 맞는 사이즈가 없다고 말했다. 더 작은 크기를 주문할 테니 일주일쯤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집에 가자는 내 말에 지수는 손을 잡아끌었다.     

 

-시장에서 구경하는 건 공짜니까 오늘은 사치 좀 부리자. 어차피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잖아.     

  

지수는 내 입술에 틴트를 바르고 온갖 액세서리를 가져다 댔다. 거울로 내 얼굴을 비추며 볼에 입을 맞췄다.     


-설아 넌 진짜 마녀가 분명해. 너무 예뻐서 신이 저주를 내린 거야. 신도 인간이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질투한다잖아. 널 질투하는 신은 헤라일까, 아니면 아프로디테일까. 과연 네 저주를 푸는 건 누가 될까. 어쩌면 나 아닐까?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이 피어났다. 마음이란 우주에서 화성까지 달아났다 여긴 감정이 지금 곁에 있다. 태양에서 멀어지는 동안 달이 떠오르는 걸 보지 못했다. 붉은 전등불이 눈앞을 밝힐 때에야 집을 향했다. 수많은 선택지 중 가장 작은 길을 택했고 출구 앞에서 최악의 가능성과 마주했다.     


-안대녀 아냐? 야, 익성아! 저기 안대녀랑 똘마니 간다. 잡아서 조질까?     


지수가 말했다. 빨리 튀라고. 그 애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두 다리는 무작정 달리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지수의 뒷모습을 보며 숨이 차오르다 못해 터질 거 같은 고통을 느꼈다. 잡히면 안 돼. 잡히면, 잡히면 더 괴로울 거야, 잡히면....... 골목을 통과하던 중 누군가 쌓아둔 나무상자 더미에 걸렸다. 손을 놓쳤고 몸은 옆으로 넘어졌다.      


지수야, 도와줘! 지수야!      


지수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계속 뛰어간다. 저주를 피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아니, 저주 때문에 들리지 않는 건가. 답은 알 수 없다. 남은 건 현상뿐이니까. 또 다시 난 미로 한 가운데에 홀로 남겨졌다.     


상흔은 회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고 인내하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믿음은 거짓이다. 책임감과 죄책감은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한 집에 살던 형제는 노모가 치매에 걸리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첫째는 집을 나갔고, 둘째는 남아서 병간호를 했다. 그리고 3년 뒤, 둘째는 노모를 살해했다. 책임감을 버린 첫째와 지킨 둘째. 두 사람의 죄책감은 같은 무게일까. 아닐 것이다. 그 무거운 감정을 짊어지고 싶지 않은 이들은 침묵을 무기로 방관한다. 경찰이 지나간다. 한 번 시선을 보내더니 제 갈 길을 찾는다. 안대를 본 거다. 사냥당하는 마녀를 구해줄 용사는 없다. 어느 동화에서나 마녀는 죽는다.      


호경이 내 머리채를 쥐었다. 걸음이 느려질 때마다 재석이 엉덩이를 걷어찼다. 종종걸음으로 향한 곳은 놈들이 아지트라 부르는 곳이었다. 푸른 벽과 새하얀 문으로 이뤄진 이층짜리 단독주택은 주변의 풍경과도, 발을 들이미는 이들과도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대리석으로 된 탁자 위에는 술과 과자, 안주, 컵라면이 널브러져 있다. 호경은 날 소파 위로 내동댕이쳤다. 익성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들이켰다. 울렁이는 목젖 뒤로 먹잇감을 노리는 눈빛을 하고서.



-안대녀 너도 혼자 살지? 전에 너네 집 근처까지 가봤어. 호경이 얘가 보고 뭐라 그랬는지 알아? 쓰레기 아파트래. 하하하, 거기 사람이 살 수 있는 거 맞아? 쥐랑 바퀴벌레가 신혼살림을 차렸을 거처럼 생겼던데. 너무 더러워서 들어갈 수가 없더라. 그런데서 지내니까 네 몸에서 악취가 나는 거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뭘까. 때릴 거면 가로등 불빛이 없는 골목에서 짓밟았을 테지. 그보다 더 악랄하고 추잡한 짓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겠지. 아지트라는 저렴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요새까지.     


-너 말이야, 지수 걔랑 친하더라. 걔가 만날 너네 집에 가더라고. 그런데 걔가 어떤 년인지 알고 어울리는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녀석의 얼굴에 장난 끼가 사라졌다. 침착한 눈빛에는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 보는 매의 서늘함이 얼어있다.     


-걔가 초등학교 때 사람을 죽였거든.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를.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지수가? 그 여린 애가? 네 말이면 다 믿고 내가 혼란스러워 할 줄 알았나 보지? 정신 차려. 거짓말에도 정도가 있는 거야. 작가도 재능 없는 사람이 하면 재미도 감동도 없는 법이라고.      


-내가 걔랑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거든. 그래서 잘 알아. 걔가 얼마나 간악하고 교활한 년인지. 만날 같이 어울리던 친구를 따돌렸어. 그 애 곁에 누가 붙기라도 하면 거짓말을 지어냈지. 왜 그 나이에 흔히 하는 거짓말 있잖아. 쟤가 네 뒷담을 깠어, 쟤가 너랑 놀지 말라고 나한테 말했어. 그 순진하고 상냥해 보이는 얼굴로 누구도 전직 베스트 프렌드랑 같이 놀지 못하게 막았어. 절정은 생일날이었지. 그 애는 초대장도 하나하나 다 손으로 썼고 패밀리 레스토랑도 예약했는데 혼자 보내게 만들었어. 담탱이라고 답이 있었겠어. 때린 것도 아니야,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야. 그저 지수 년을 불러서 타이르기만 했지. 그렇게 3개월을 혼자 끙끙 앓던 소심한 여자애가 택한 답은 자살이었어. 아파트 복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그 유서에 뭐라 적혀있었는지 알아? '김지수가 날 죽였어' 이 글자만 한가득 빼곡하게 적혀 있었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네 말을 믿는다고 치자. 그래서 뭐 어쩌라고.



-걔가 왜 너한테 붙어 다니고 도와주는지 알아? 그 죽은 애가 너랑 닮았거든. 그래서 그러는 거야. 자기 죄책감 좀 덜어보겠다고. 그런데 있잖아, 진짜 김지수가 너한테 잘 대해주고 있다고 생각해?     


무슨 의미일까. 어떤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있기에 다들 입가에 비소를 머금은 걸까.     


-만약 그날 김은성 그 새끼가 오지 않았다면 그년 우리한테 달려들지 않았을 걸? 오늘 봤잖아.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거. 걔는 널 죄책감을 덜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가증스러워. 존나 착한 척하잖아.     


맥주캔을 두 손으로 구긴 익성은 강속구를 날리듯 집어던진다. 내 어깨와 귀 사이를 지나간 맥주캔은 바닥을 축축하게 적신다. 왜 화를 내는 거야. 잘못은 네가 다 했잖아. 네가 한 잘못만 따져 봐도.......     


-아니지. 계산은 정확히 해야지, 안대녀. 난 사람을 죽인 적은 없어. 너랑 네 똘마니가 죽였지! 너희 둘은 당해도 돼. 죽을 만큼 쳐 맞아도 침묵해야 한다고. 그런데 눈깔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 네 눈빛, 그게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다 품고 있잖아. 세상이 널 싫어해야 하는데 왜 네가 세상을 싫어하냐고!      


놈들이 달려든다. 재석과 호경이 양옆에서 팔을 잡아 소파 아래로 몸을 내리끈다. 무릎을 꿇게 만든 뒤 민규의 손이 뒤에서 턱을 잡고 얼굴을 들어올린다. 익성은 서랍장에서 잭나이프를 꺼낸다.     


-네 몸에 새겨줄게. 세상이 너를 싫어해야 하는 이유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네가 마녀라는 증거를 온몸에 남겨줄 거야!     


냉기를 품은 칼날이 얼굴을 향한다. 피부를 찢고 감정을 도려내 상처를 내려 든다. 더 이상 망가지기 싫다. 여기서, 여기서 더 망가지면 엄마는 날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도망쳐야 된다. 지금 당장.     


눈을 떴을 땐 

새하얀 달빛이 아닌 

누런 가로등빛이 날 반겼다.



아스팔트의 냉기가 

등줄기를 파고 들어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줬다.    

  

일어설 힘을 잃어버리고 

다시 눈을 감을 즈음 

누군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따뜻한 온기를 간직한 손으로 

날 껴안았다.     


5     


-너 몇 살이니? 눈은 왜 그러고?     


눈앞에 덩치 큰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오래된 노트와 만년필을 꺼내더니 이것저것 물어봤다. 



-말을 잘 하는 구나. 아니, 좀 의외라서. 아저씨는 말이지, 밖에 있는 저 아저씨들이랑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야. 아저씨가 지금 하는 일은 설아가 학교에 다녀도 되는지 판단을 내려서 보고하는 거란다.      


엄마랑 같이 살 수 있느냐는 질문에 표정이 바뀌었다. 

안경 아래로 자국이 생길 만큼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     


-엄마도 설아랑 같이 살고 싶대. 그런데 지금은 그러기 힘들다나 봐. 엄마 마음이 많이 아파서 다 나을 때까지 설아가 오랫동안 기다려야 될 거야.      


엄마가 먼저 약속을 어겼다고 했다. 

끝까지 지켜주겠다 했는데 

엄마는 설아만 있으면 된다고 그랬는데

엄마가 먼저 날 배신했다고

그래서 내 마음이 더 상처를 입었다고

그러니까 엄마가 치료해줘야 된다고 

투정을 부렸다.      


남자는 날 꼭 안아주었다. 

다시 엄마를 만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노력할 테니 

꼭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했다. 

날 무서워하지 않는 어른은 

그 남자가 마지막이었다.     


6     


눈앞에 머그컵이 보인다. 손끝으로 만져보니 따뜻하다. 은은한 코코아향이 올라온다. 허리가 아파 고개를 올리니 은성이가 보인다. 부릅뜬 두 눈이 어린 시절 골목에서 봤던 정승 같다. 그 애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고 카페란 걸 알았다. 차가운 기억의 끝을 잇는 장소로 어울리지 않는 아늑함에 저절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고맙다는 말을 꺼내자 은성이가 자리를 뜬다. 화장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거 보니 어지간히 참았나 보다. 

두 번 정신을 잃을 뻔했다. 놈들의 집에서 한 번, 아스팔트 위에서 두 번. 첫 번째 장소에서 정신을 잃었다면 내일 학교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내 기억 속 지수의 마지막 모습을 바꾸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현관문을 향해 뛰었다. 문을 부순 뒤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쓰러졌다. 힘을 분출하는 것보다 억제하는 게 더 힘들었다. 분노를 짓누를 때면 숨도 함께 타들어갔다. 그 고통에 주저앉을 때면 다가오는 건 주먹질과 발길질 그리고 멸시였다. 그 순간이 다시 펼쳐질 거라 여겼을 때, 누군가 날 업었다. 익성 일당의 목소리를 피해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젠장, 병원으로 가야하나. 그 목소리에 답했다. 아프지 않아. 그저 조금 쉬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에 눈을 감고 밤에 눈을 떴다. 오늘이 빨리 끝나길 바랐고 내일이 찾아오지 않길 원했으니까. 오늘이 예외인 줄 알았다면 지수를 따라 샘플 화장품을 더 바를 걸. 텅 빈 창가자리를 보니 일부러 놈들을 피해 구석진 자리를 택했나 보다. 카페는 미지의 공간이다. 어릴 때 TV에서 보던 드라마의 모임 장소는 항상 카페였다. 하나 둘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니 가슴이 설렌다. 분위기 있는 공간에서 누군가와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 속에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 머그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을.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지금이라도 병원 갈래?     


아냐, 괜찮아. 그나저나 고마워. 너 이 동네에 사는 거야?     


-아니. 운동 갔다가 오는 길이라서. 버스로 20분 거리라 운동 더 할 겸 걸어 다니거든. 평소에도 사람이 쓰러져 있는 걸 봤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진짜 당황했다. PC방이나 찜질방은 내가 가 본 적이 없어서 카페가 좋겠다는 생각에 여기로 왔어. 또 익성이 녀석들이 괴롭힌 거지?     


맞아. 이번에는 당하지는 않았어. 도망쳐 나왔거든. 대단한 용기를 낸 건 아니야. 반대로 겁에 질려서, 그래서 너랑 만날 수 있었어. 아. 은성이 너 지수랑 같은 초등학교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솔직하게 답해줄 수 있어? 지수, 초등학교 다닐 때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익성이 녀석이 왜 널 데려갔는지 알겠다. 걔가 그랬지? 지수가 가장 친한 친구를 죽였다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맞아. 엄청 유명한 사건이었고 그 여자애 아빠가 학교까지 찾아와서 지수 때렸으니까. 익성이 그 새끼 그거 하나 말하려고 여태까지 널 괴롭힌 거야?     


그랬구나. 다들 아는 이야기였구나. 걔네가 그러더라. 나도 지수도 둘 다 살인자니까 당해도 된다고. 자기들은 사람은 안 죽였으니 우리가 더 나쁘다고 하더라. 그리고 날 찢으려고 했어. 



-너 진짜 사람 죽였어?     


하하, 그래. 죽였어. 죽였으니까 이렇게 사는 거겠지. 내가 죽인 사람은 내게서 너무 많은 걸 앗아갔어. 그래서 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다 생각했지. 그런데 죽이고 나니까 더 많은 걸 잃어버린 거 있지. 아슬아슬하게 지상과 걸쳐 있던 반지하 창문을 내가 깨뜨렸어. 그 유리조각이 두 눈을 파고들 줄 모르고. 어둠속으로 내가 날 던진 거야.



-솔직히 말하면 난 너희가 두려워. 이건 내 감정이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지수랑 초등학교 때 꽤나 친했어. 지수는 뭐랄까 모든 애들이 좋아하는 그런 애였거든. 그래서 지수가 그 애랑 놀지 말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어. 우린 전부 방관자가 아니라 가담자였어. 그 애가 그렇게 여릴지, 지수가 그렇게 악독할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익성이도. 그 놈하고도 친구였어. 어느 날, 내가 요즘 유도를 배운다고 그랬어. 그 한 마디에 갑자기 한 번 붙어보자고 하더라. 내가 덩치가 더 크니까 당연히 이기고 있었어. 근데 걔 친구들이 팔 다리를 잡는 거야. 그리고 익성이가 의자로 내 팔이랑 다리를 내리쳤어. 더해서 얼굴을 계속 내리쳤지. 분했던 거지. 자기가 더 강할 줄 알았는데 내가 이기니까 분했던 거라고. 난 아직도 걔 얼굴만 보면 오금이 저려. 몇 달을 병원에서 보냈어. 1년이 지나고 학교로 돌아갔는데 익성이도 지수도 다 있는 거야.     


은성이의 손이 떨린다. 겁을 먹은 걸까. 아니면 울분에 찬 걸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난 피해자야. 그런데 걔들이랑 같이 1년을 피해봤어.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게 되었다고. 이게 뭐지? 왜 이래야만 되는 거지? 난 익성이한테 사과를 들은 적 없어. 그 애의 아버지도 마찬가지겠지. 지수가 사과했단 말은 들어본 적 없으니까. 안대녀 네가 누굴 어떤 이유로 죽였는지 난 몰라. 다만 다른 사람한테 해를 끼치는 사람하고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 또 그때처럼 침대 위에서 꼼짝도 못한 채 부모님이 우는 소리만 듣고 싶은 생각, 난 없거든. 너희들이 무서워. 익성이도, 지수도, 안대녀 너도, 다 나한테는 너무 무서운 사람들이야.     

집에 불이 켜져 있다. 


옥선 아줌마가 실수로 안 끄고 간 걸까. 

핸드폰이 있다면 연락을 해 봤을 텐데. 

아줌마는 핸드폰을 사 주라고 나온 정부 지원금을 주지 않았다. 

그 돈은 나를 돌보는 자신에게 주는 상여금이라 했다. 

지난 8년 간 아줌마는 한 번도 나를 안아준 적 없다. 

그 기간은 내 마음이 울어본 적 없는 시간이다.

아직 안에 있다면 지하실로 가야 되는 걸까. 

익성 일당은 아닐 것이다. 

그 안에서 대기하고 있어봐야 

나를 죽일 수 없단 건 놈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집 밖에서 창문을 연다. 

쇠창살 아래에서 지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다. 

문을 여니 지수가 일어선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입을 열려는 그 애에게 달려든다. 입술을 포개고 혀를 뭉친다. 어떤 말을 해도 삼킬 것이다. 내 귀가 들을 수 없게. 네 생각과 감정을 모두 녹여버릴 것이다.     


7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지수는 날 바닥에 눕혔다. 먼지 사이에서 거칠게 단추를 뜯으며 숨을 헐떡였다.     


-나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수정이란 애였는데 내가 그 애를......     


알아. 네가 그 애를 죽였잖아. 당황하지 마. 난 마녀야. 모르는 게 없다고. 네 눈을 본 순간부터 알았어. 너도 나처럼 우물에 갇혀 있다는 거. 보이지 않는 눈물 때문에 언제 폐가 막힐지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거 다 알아.



-난 겁쟁이야. 정말 사소한 일로 수정이랑 다퉜어. 걔가 먼저 사과했는데 안 받아줬어. 우린 절교라는 그 애의 말에 심장이 내려앉아 버렸어. 혹시 소문을 내면 어떡하지. 새로운 절친이 생겨서 날 따돌리면 어쩌지. 그래서 아무도 그 애랑 친해지지 못하게 소문을 냈어.



넌 그 애를 몰랐던 거야.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란 걸 알았다면 떨어뜨리지 않았을 거야.     


-일 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어. 다시 학교에 갔을 때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넌 알 거야. 다들 날 쳐다봤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옆사람이랑 귓속말을 했어. 역시나 이미 소문은 다 나 있었고 아무도 나랑 어울리려 하지 않았어. 그러다 널 본거야. 수정이랑 닮은 너랑 친해지면, 그러니까 마녀인 널 인간으로 만들면 용서받지 않을까 해서.     


용서해 줄게. 내가 너를 용서할 거야. 넌 이제 구원받았어. 그러니 날 구원해 줘. 네가 내 엄마가 되어줘.



-안 돼. 그럴 순 없어. 네 엄마는 이 세상에 존재하잖아. 기다리면 돌아올 거라고......     


아니, 엄마는 돌아오지 않아.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거든. 사랑했다면 돌아왔을 거야. 내 온몸에 상처가 나고 마음이 썩어서 벌레들이 나뒹굴 때까지 버려두지 않았을 거라고. 내가 마녀가 된 날 엄마가 말했어. 넌 이제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그러니 누구의 사랑도 받을 못할 거라고. 안기려는 날 밀치면서 울음을 터뜨렸어. 자기가 괴물을 낳았다고 경찰들한테 말하는 걸 들었어. 그런데 엄마가 왜 돌아오겠어.



-그럼 왜 기다렸던 거야?     


살고 싶으니까. 어떻게든 살아가고 싶으니까 엄마를 기다린 거야. 누구도 날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잖아. 더는 혼자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지수 네가 내 엄마가 되어줘. 그리고 날 사랑해줘.     


지수는 단추를 풀었다. 한 손으로 내 가슴을 애무하고 다른 손은 성기에 손가락을 넣었다. 부드러운 살결을 맞대며 서로의 냄새를 맡았다.



-수정아, 용서해줄 거지? 우리 이제 다시 친구인 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 용서할게. 내가 다 용서할 테니까 엄마도 날 용서해줘. 다시 날 사랑해줘, 엄마.     


이 밤이 끝나지 않길. 

심장박동 소리가 뜨겁게 울리는 이 소리가 절대 멈추지 않길. 

위층의 소음보다 더 강하게 귀를 때리는 우리의 신음이 사라지지 않길 바랐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나서야 바라볼 수 있었다. 

땀으로 잔뜩 젖은 바닥과 침으로 범벅이 된 서로의 얼굴을. 

우리는 하나의 하늘을 비추는 두 개의 태양이 되었다.     


엄마가 날 버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나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었다. 항상 엄마 곁을 지킬 거라 굳게 다짐했다. 우리 집으로 그 남자가 오기 전까지.      


외로워서 그런 거야. 

TV만 봐도 알잖아. 

남자가 여자 좋아하듯 여자도 남자를 좋아하는 게 당연한 거야. 

엄마는 여전히 날 사랑해. 

이 사랑은 변함이 없어. 

그치, 스티치? 

이 왕눈이 코알라야, 어서 맞다고 말해! 

스티치는 외계인이야. 

그땐 너랑 말할 줄 몰랐지. 

세상에는 나랑 엄마만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 아저씨가 싫었어. 

날 보고 실실 웃기만 하는 그 얼굴이 짜증났지. 

아저씨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어. 

TV를 보거나 과자를 먹고 주구장창 통화만 했지. 

가끔은 내 장난감을 함부로 만져서 화를 내기도 했어. 

엄마는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더 인내심을 지니고 남을 배려해야 된다고 했지. 

그러다 그 일이 터져버렸어.

처음 사랑의 무게를 알게 된 사건이.     

 

아저씨는 엄마랑 같이 잘 테니 넌 다른 방에서 자라고 했어. 

당연히 거절했지. 

항상 엄마랑 같이 침대에서 잤으니까. 

엄마는 날 달래보려 했지만 소용없었어. 

아저씨를 싫어했으니까 나와 엄마만의 공간인 침대에서 내보내고 싶었지.

아저씨는 엄마를 밀치더니 날 침대에서 끌어냈어. 

그리고 그 큰 발로 배를 걷어찼어. 

정말이야! 

붕 날아서 벽에 부딪혔다니까.     

 

잠깐이지만 숨을 쉴 수 없었어.

구역질이 올라왔고 저녁으로 먹은 카레를 다 뱉었어. 

엄마가 화를 내자 문을 열고 뛰쳐나갔어. 

이런 더러운 집구석 다시는 안 올 테니까 날 찾지 말라며 소리쳤지. 

상상했어. 

엄마가 날 달래줄 거라고. 

언제나처럼 다가와 안아주고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줄 거라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렸어. 

내가 아니라 아저씨를 택한 거야. 

그때 난 버림받았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 

스티치가 코알라가 아닌 외계인이란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부정했던 거야. 

어쩌면 떠나야 했던 건 엄마가 아니라 나였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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