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국
트래킹 멤버들이 강력 추천했던 빠이로 간다. 시내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리조트에 3일을 예약했다. 거기서, 긴 여행으로 지친 심신을 회복하고 가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버스 옆자리에는 콜럼비아 출신으로 스페인에 살고 있는 체격이 푸짐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가진 흑인 여성이 앉았다.
또 그 옆에는 제법 유쾌한 이탈리아 남자가 자리했다. 그녀가 영어를 못해서 나와는 의사소통이 잘 안됐지만, 그녀와 이탈리아 남자는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를 섞어가며 내내 유쾌한 대화를 이어갔다. 휴게소에서 우리는 셀카도 함께 찍었다.
1시쯤, 미니 밴이 빠이 시내를 한참 지난 어느 휑한 곳에 멈추더니 승객들을 다 내려주었다. 땡볕 아래 부려진 나는, 순간 패닉에 빠졌다. 이 캐리어를 들고 갈 수도, 끌고 갈 수도 없는 이 자갈길에서 어떻게, 어디로 이동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시내로 진입할 수 있는 건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냥 강 위에 걸쳐진 대나무 다리를 건너보기로 했다.
낑낑대고 다리 앞까지 갔으나 어떻게 이곳을 건널까 망연자실해 있는데, 좀 전에 미니밴에서 멀미로 차를 한 번 세웠던 남자가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옆에 함께 가던 여자 친구인지, 아내인지 모를 여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너무 무겁다고 했다. 그는 괜찮다며, 안 무겁다며, 길다면 긴 그 다리 위로 내 캐리어를 들고 날라주었다. 너무 고마워서 연거푸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이런 친절들이 여행의 피로를 확 풀어주곤 한다.
대나무 다리를 건너니, 다행히 좀 전에 차로 지나왔던 시내 거리가 바로 나타났다. 미니밴이 길을 반원형으로 빙 돌았을 뿐 직선거리로는 바로 코앞이었던 것이다. 작고 예쁜 거리였다.
좀 전에 차로 이곳을 지나면서 빠이가 한눈에 마음에 들었었다. 그래도 땡볕이라 짐을 끌고 돌아다닐 수는 없어서 가장 가까운, 그러면서도 괜찮아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리조트에 메일을 보냈다. 식당 이름을 보내면서 픽업하러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답이 없었다.
캐리어를 식당에 맡기고 거리로 나섰다. 예쁘지만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강한 햇빛이다. 시원스러워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망고 셰이크를 시키고 앉아있는데 리조트에서 답이 왔다. 15분 후에 식당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좀 더 있다가 와도 되는데.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나를 데리러 온 이는 70대 후반 정도의 백인 남자였다. 아고다에서 본 리뷰에 의하면 부부가 네덜란드인이다. 조용조용한 목소리를 통해, 가난한 아시아의 한 시골에 사는 부유한 백인 남성의 프라이드가 느껴졌다.
도착해보니 리조트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그러나 분위기가 고급스럽고 로비에서 바라본 호수의 풍경도 아름다웠다.
리셉션 직원은 젊고 예쁘고 친절했다. 좀 있다가 5시쯤 안주인이 시내에 나가는데, 그때 함께 나갔다가, 돌아올 때 택시로 오면 된다고, 택시는 200바트라고 했다. 늦어도 9시 30분까지는 택시 타러 여행사 사무실로 가야 한다고 했다. 오, 잘됐다.
2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서, 방에 짐을 풀고 발코니의 벤치에 드러누웠다. 방은 생각보다 훌륭하진 않았고 창이 많았으나 좀 답답했다.
그렇게 벤치에 누워 있다가 바닥이 딱딱해서, 여분의 이불과 베개를 가져다가 누웠더니 아주 좋다. 커다란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는 소리, 새소리, 적당한 햇빛과 바람. 평화롭다.
그렇게 쉬다가 안주인의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차가 진입하지 못하는 워킹 스트리트를 걷는데 모든 게 신기하다. 강 쪽으로 걸어갔더니 어둑해지는 강가 레스토랑에 불이 켜지고, 강 건너엔 방갈로들이 있고, 강을 따라 벤치와 쉴 수 있는 평상 같은 것들이 있어서 평화롭기 그지없다.
굳이 그 먼 곳의 리조트를 예약할 필요가 없었다. 리조트에는 이틀만 묵고, 하루 정도 이 근처에서 묵었어도 충분히 편안했을 것이다.
빠이는 생각보다 한적했다. 천천히 강가를 돌아보다가 다시 다리 앞에 섰는데, 누가 나를 보고 뭐라고 한다.
“Annie, 너 맞지?”
트래킹에서 만난 네덜란드 걸, 유타였다. 우린 반가운 포옹을 하고 몇 마디 나누고는 헤어졌다. 머리를 풀어 내리면 참 아름다운 유타, 그녀에게선 옅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렇다.
서양 걸들은 머리를 질끈 동여맨 민낯에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여행하다가, 밤이 되면 동여맸던 머리를 풀어 내리고, 화장을 하고, 차려입고는 거리로 나선다.
그들의 기나긴 여행, 숱하게 길을 떠나며 자유로이 여행하는, 젊음이 누리는 그 행복한 시간들이 보기 좋다. 우리 애들도 그랬으면. 나 혼자 누리느라 바쁘지만, 여력이 되면 애들도 지원해주고 싶다. 좀 더 인생을 즐기라고.
저녁 7시부터 차량이 통제되는 워킹 스트리트는 도로 양편에 즐비한 수레마다, 갖가지 거리 음식들이 신기한 모습으로 채워진다. 너무나 다양한 음식들을 적당히 맛볼 수 있을 만큼의 양으로 포장해서 값싸게 팔고 있다.
조금씩 사서 맛보다 길이 끝날 때쯤 되면 엄청 배불러진다. 음식들은 하나같이 신선하고 맛도 훌륭하다.
근사하게 디스플레이된 기념품 가게들도 있고, 작지만 어느 나이트 마켓보다 질 높은 물건들이 눈에 띈다.
한쪽 모퉁이를 돌면 바와 식당가가 있다. 두어 개의 라이브 뮤직바, 근사한 뷔페식당, 수많은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모두 예쁘고 근사하다.
라이브 바에 가고 싶은데 혼자서는 머쓱하고, 함께 갈 사람이 없으니 난감하다.
하지만 그것 빼고는 혼자서 돌아다녀도 너무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수수떡과 또 뭘 사 먹었지? 그전에 이미 파스타 한 그릇과 와인 한 잔을 비웠던 참이다.
코모도르 파스타는 메뉴에 보이는 사진이 너무 근사하고 먹음직스러워 시켰는데 실물은 전혀 달랐다. 그냥 파스타 면에 야채 한 조각 없는 소스뿐. 그러나 탱글탱글한 면은 처음 맛보는 신기함이었다. 맛도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서 난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난 먹거리 수레에서 오렌지 주스와 망고 슬라이스, 브라우니 한 개를 사들고 리조트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사로 향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정해진 게 아쉬웠다. 여행사에서는 한 직원이 나를 기다리느라 퇴근을 못하고 있었다.
200바트면 좀 비쌌지만 지금 이 시간에 그 먼 시골길을 안심하고 타고 갈 다른 택시가 없으리라는 건 확실했다. 아! 좋다! 이래서들 Pai, Pai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