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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Jul 29. 2022

드디어 남해, 숲속에는 양들이 노닐고

- 가을 여행 2018


  순천에서 남해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남해에 들어서니 도로에 '감성 가도'라는 팻말이 보였다. 길게 이어지는 그 길은 양쪽에 늘어서 있는 벚나무에 단풍이 예쁘게 물들어 있다. 막상 남해를 향해 오면서도 남해의 어디를 가야 할지는 알아보지도 않았다. 그냥 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비에 행선지는 찍어야 해서 예약해둔 게스트 하우스 근처의 충렬사를 먼저 가보기로 했다. 


  구름 낀 잿빛 항구 옆에 있는 충렬사는 생각보다 너무 작은 곳인 데다 그나마 공사 중이었다. 그곳은 절이 아니라 그냥 충무공의 충절을 기리는 작은 건물이라고 봐야 맞다. 작아서 아기자기하게 예쁜 계단과 알록달록한 담쟁이 잎들이 늘어진 작은 담장이 어쩐지 내 눈에만 들어올 예쁨인 것 같아 정이 갔다. 


  충렬사에서 게스트 하우스까지 가는 7km 남짓 되는 길은 벚나무 단풍과 바다 풍경이 어우러진 뜻밖의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냥 지나쳐 가기에는 어쩐지 아까워서 다시 되짚어 오고 싶을 만큼. 


  게스트 하우스는 꽤 근사했던 사진과는 달리 빛바랜 외관이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목공일을 하다 나온 것 같은 사십 대 중반쯤의 남자가 안내해주었다. 벽난로, 커다란 책상과 긴 벤치의자 위에 놓인 앙증맞은 방석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옛날 배우들의 흑백사진들(오드리 햅번이나 제임스 딘 같은),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 내부는 나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3인실의 도미토리도 침대마다 흰 망사로 된 캐노피가 걸려있는 예쁜 방이었다. 손님은 나 혼자라 그 게스트 하우스 건물을 통째로 나 혼자 쓰는 것이었다.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어서 어딘가 다른 곳을 다녀오기도, 그렇다고 그냥 눌러앉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날까지 흐려서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도 같았다. 


  주인은 내게 남해 관광지도를 내주면서 여기저기 가볼 만한 곳을 짚어주었고 시간이 늦었으니 가까운 양 떼 목장에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간 김에 마을의 하나로 마트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 올 수도 있다고. 


  '그런데 이 텅 빈 게스트 하우스에 설마 나와 이 남자 주인만 자는 건 아니겠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내는 없이 혼자인가?'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봄이가 전화해서 숙소 이름과 전화번호를 대라고 한다. 내가 품고 있던 걱정을 말하자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더니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휴우'


   일단 양 떼 목장을 가보자며 길을 나섰다. 구부러진 숲길을 달려 양 떼 목장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매표소에서 주차비 포함 오천 원을 내고 양 먹이 한 쪽박을 받아 들었다. 비 오는데 우산 들고 카메라까지 메고서 양 먹이를 줄 일은 없을 것 같아 그냥 차 안에 두었다.


 







  양 떼는 딱 있을 만큼 있었고 목장도 딱 그 크기만큼 컸다. 목장 위로 편백나무 숲 산책로가 있었지만 인적 없이 비까지 내려 어둑한 숲 속을 걷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위아래 목장을 천천히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곳을 내려와서 하나로 마트에 들렀다. 따뜻한 라면 같은 것을 먹을까 하다가 인스턴트 까르보나라를 집어 들었다. 조금은 덜 초라할 것 같아서.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가 보니 벽난로에 따뜻하게 불이 지펴져 있었다. 빛깔도 온기도 없이 축축한 밖을 떠돌다, 돌아와 불그레한 벽난로 불빛과 온기를 대하니 기분이 확 좋아졌다. 주인은 좀 있다 다시 와서 난로의 나무를 더 넣어주겠다고 했다. 


  난 까르보나라를 끓여 접시에 담고 언니가 싸준 감과 키위를 썰어서 다른 접시에 담았다. 벽난로를 앞에 두고 나름 품격 있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럴싸한 플레이팅에 비해 까르보나라는 느끼하고 맛이 없었다. 다행히 주홍과 녹색의 빛깔도 예쁜 과일들은 맛도 좋아서 느끼했던 까르보나라의 뒷맛을 상큼하게 잡아주었다.


  샤워를 할까 하다가 주인이 또 벽난로에 나무를 더 넣어주러 온다고 했으니 그냥 기다리면서 글을 쓰기로 했다. 한참 글을 쓰다가 주인이 와서 나무를 더 넣어주는데 난 이제 나무는 그만 넣어도 된다고 했다. 다시 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는데 자기 전에 다시 한번 와서 재를 정리하겠다고 했다. 나 혼자 싼 값에 머무는데 너무 신경 쓰게 하는 것 같아 좀 미안하고 부담스러웠다. 


  글을 좀 더 쓰다가 씻으러 들어갔는데 하필 노크 소리가 들린다. 욕실에서 대답했더니 그는 다시 나간 것 같았지만 난 씻지도 못하고 벗었던 옷을 다시 입고 나가 창문까지 모두 잠갔다. 다시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오자 드디어 안주인이 나타났다. 이제야 좀 안심이다. 그들은 아침에 일찍 일을 나가야 하니 편한 시간에 그냥 떠나면 된다고 했다. 


  아침에도 주인들이 들어와 확인해볼 것 같아 안에서 쪽문을 잠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서운 마음이 있는 데다 도미토리 옆의 방에 혹시 누가 숨어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잠들었다. 


  그럭저럭 잠은 들었는데 자다 보니 뭐가 뚝 하는 소리에 깨었다. 시간을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었다. 다시 자려고 하는데 몇 분 간격으로 계속 그 소리가 난다. 한동안 무서움을 느끼다 다시 잠을 청하는데 간헐적으로 계속 들리는 그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아무래도 난방기에서 나는 소리 같아 전원 케이블을 빼버렸다. 역시 그랬다. 이후로는 조용해서 다시 잠들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가보니 긴 테이블 위에 큰 모시 송편 두 개가 접시에 담겨 있다. 아마도 주인들이 제공한 내 아침 식사인 모양이다. 난 남은 과일을 깎아서 송편과 함께 아침으로 먹었다. 


  지도를 보자. 오늘은 저 남쪽 다랭이 마을과 남해의 다른 쪽 땅, 가운데 지점의 보리암에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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